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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1990년 12월호 (제 143호)
대 림 제 1 주일 : 12월 2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 (이사 63,16-64,7) : 이사야 예...

대림시기
1990년 12월호 (제 143호)
대림 시기 1. 명 칭 우리말의 엄하기를 기다린다는 뜻의 대림(待臨)은 그리스어의 ‘에피파네이...

가톨릭 종합대학 안에서의 신학생 교육 - 정의채 신부의 시노드 발표 내용과 해설
1990년 12월호 (제 143호)
I. 머리말 제8차 시노드가 금년 9월 30일부터 10월 28일까지 로마에서 열렸다. 그 주제는 ‘현대 상황...

나의 고백
1990년 12월호 (제 143호)
  허 까리따스(Caritas Hopfenzitz) 수녀님은 1913년 독일에서 출생하셨으며 1937년 포교 성 베네...

생활 속의 성인
1990년 12월호 (제 143호)
신부님. 산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여느 날과는 달리 남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오후 3시쯤에 터벅터벅 혼...

사회의 성화를 위한 교회 언론의 역할
1990년 12월호 (제 143호)
대담 : 고국상 (가톨릭신문 미주지사편집국장) 이태호 (평화방송 해설위원) 최상완 (경향신문 조사연구실...

이 시대의거룩함 - 순결한 창녀인 교회
1990년 12월호 (제 143호)
  라합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녀이다(여호 2장). 여호수아가 요르단강 건너편을 정복하기 위하여 ...

교회와 사회의 상호성
1990년 12월호 (제 143호)
I. 시작하는 말 모든 공동체의 근본적 기초는 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 즉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

사회 성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
1990년 12월호 (제 143호)
‘사회 성화(聖化)를 위한 교회의 사명’이 주어진 주제이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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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회 1990년 12월호 (제 143호)

생활 속의 성인

정채봉 (샘터 편집부장)

신부님.


산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여느 날과는 달리 남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오후 3시쯤에 터벅터벅 혼자 올라갔습니다. 산도 이젠 어지간하면 저자 거리와 다름없이 북적거립니다. 그래서 저는 늦어도 일요일의 아침 7시에는 산으로 올라가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햇살이 산봉우리로부터 서서이 번져 내리는 걸음과 맞추어 서 내려오곤 하였었지요. 그러니까 다른 분들은 머리 위에 햇살을 얹고서 올라가는 반면에 저는 발뒤꿈치에 그것을 매달고서 내려온 셈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아침 그 시간에 진눈깨비가 뿌렸습니다. 세모에 내리는 진눈깨비. 저 같은 촌놈에게 그 상황은 앉도 서도 못하게 하는 ‘고독’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진눈깨비 내리는 섣달의 고향마을을, 고샅에는 개조차도 비치지 않고,안산 바람 소리만이 정미소 앞 공터를 훑고 지납니다. 참,부스러지고 남은 낙엽 몇 낱이 지푸라기 몇과 함께 해초 고랑으로 쓸려들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덮고자 반쯤 비로 반쯤 눈으로 내리는 저 가난한 진눈깨비 앞에서,신부님.


저 같은 약한 인간은 덜 여문 박을 타서 삶은 것처럼 오그라드는 것입니다. 80년 초에 저는 불교 조계종의 이성철 종정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카메라룰 맞추면서 “스님의 어디를 찍어야 마음이 나타나는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종정 스님은 "내 마음은 우주 전체에 퍼져 있으니 아무데나 찍어도 다 나타난다”고 대답하신 것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진눈깨비 오는 날씨조차도 ‘내 마음’ 아니겠습니까. 오그라진 바가지 모양의.


다행히 오후가 되면서 날이 개여서 산으로 올라왔는데 바위에 걸 앉아 이런 생각,저런 생각에 잠시 젖어 있었더니 어느덧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먼데 인가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밤안개 또한 골짜기를 메워오고 있습니다.


문득 시골 본당에 계시던 신부님을 찾아다니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꼭 그렇게 맞추어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관에 찾아가서 초인종을 누를 때 보면 번번이 이 무렵이곤 하였습니다. 앞치마를 두르시고 도마질을 하고 계시거나,찌개의 간을 보고 계시거나,밥을 푸고 계시거나.


"우리 몸님같은 양반 구세가 어디 있겠어요? 편하게 받들어 주면 줄수록 더욱 편하려고 한단 말이예요.”


신부님의, 자취의 변입니다만 어디 이런 양반 구세가 몸에 한정된 것이겠습니까. 우리들 영혼도 그렇겠지요. 맑히면 맑힐수록 끝없이 맑아져 갈 터이고, 추하게 간수하면 간수할수록 끝없이 추해져 갈 터이고. 아무튼 저는 신부님의 그 우수가 끼어들 수 없는 일상을 존경합니다. 명절 같은 날에 얼마나 고적할까 싶어 가보면 신부님은 이미 거기에 계시지 않았었지요. 더 외로운 분들을 찾아가신 당신.


아니,때로는 외롭지 않으려는 현대인들에 대해 "외로워 보라”고 권하시기도 하시지요. 한밤에 전등새신 촛불을 켜고 홀로 깨어 있어 보라고. 정말이지 ‘홀 로 있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자유에의 길이 아니라 매임의 길로 스스로 들어 서는 현대인들입니다. 여기에 지식인의 함정이 있습니다. 자유에로의 지향이 마 닐 때, 몸이 따르지 않는 지식의 저장이란 차라리 있지 않음만도 못 한 것이 아닙니까.· ·


신부님. 저는 티베트의 한 스님 설법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온 세계를 소가죽으로 덮는다면 우리는 신발 없이 맨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 하지만 우리가 6촌의 발에 소가죽 신발을 신는다면 그것은 온 세계를 가죽으로 덮는 것과 같은 일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덧붙여 설명하기를 “온 세계를 자기 뜻에 맞는 이상향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다, 그러나 우리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고 인욕(忍辱)의 신발을 신는다면 온 세계는 곧 자기 마음에 맞는 이상향이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수피교인 바야싯도 이런 체험담을 털어놓은 적이 있지요.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모두였다. 주여,나에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 중년에 이르러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 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나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 개심시켜도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도 오늘 내일 하게 되고 보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 처음부터 이렇게 빌었던들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으련만.”


저도 이분들의 깊은 속마음을 이제야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지개벽을 시키듯 이 세상을 갈아엎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큰 성취이겠습니까. 소가죽으로 온 세계를 덮어놓고 맨발로 다녀도 구두를 신은 것이나 다름없겠습니다만 그 일을 어느 누구가 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영웅호걸도 이루지 못할 꿈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 어느 누구도 마음은 바꿀 수 있습니다. 자기 발에 소가죽 신발을 신기면 이 지상을 소가죽으로 덮은 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 하나의 마음을 바꾸고, 눈을 바꾸면 변화된 세상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 바꾸는 데 바야싯도 평생이 걸리고 있습니다. 하물며 무슨 일에나 '네'만 을 탓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랴.


신부님.


순교의 성인도 물론 거룩하시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생활의 성인이 그립습니다. 우리와 함께 세속의 매연에 그을리고, 우리와 함께 유혹 속에 살면서 가만히 눈물 글썽이고 조용히 고개 흔드는 분. 때때로 '하마터면'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우리와 같은, 발걸음이 위태로운 분. 청정 수역으로 피해 가 시는 것이 아니라 이 도회의 감탕 속에 나와 있기도 하시는 분. 그리하여 흙탕물 위에서도 꽃을 피운 연처럼 우리의 위로가 되어줄 분이 교회에는 필요합니다. 한 처녀의 말 한마디에 감동을 받아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고자 해서 찾아오는 신랑 신부될 분들께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저 사람과 결혼하고자 합니까?' 그러면 열에 여섯은 앵무새처럼 말합니다.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또 넷에 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봤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좀 특수한 사정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어쩌다 보니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생겼습니다.’ ‘중매하신 분이 믿을 만해요. ‘경제력이 있고 직장도 그만하면 좋아요.'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선 신부께서는 참 좀체로 듣기 어려운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저분을 사귀어 보니 참으로 속되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저 분과 산다면 보람된 생을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저분을 본받고 도우며 살고 싶어 결혼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어떤 주례사’라는 제목의 졸문입니다만 여기에 옮긴 것은 신앙의 선택도 이러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막연히 믿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교회에 나왔다기보다는, 다녀야 할 사정이 생겨서. 혹은 전교자에 못 이겨,또는 어떠어떠한 점이 마음에 들어 교회에 나왔다기보다는 어떤 사람을 사귀어보니 참으로 속되지 않고,그분의 청정이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값져 보여서 그 분이 다니는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되리라 믿습니다.


신부님.


어둠이 재일수록 별빛이 여물어지듯 혼탁한 세상일수록 신부님의 투명이 저 은하가 되어 저희 가슴에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밤에는 어느 누구의 눈물을 닦아 주고 계시는지요?


우리의 가슴마다가 구유가 되는 크리스마스이기를 기도해 주시길 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