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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 제 2편 제 2부 개별 교회와 그 연합
1990년 11월호 (제 142호)
제1절 개별 교회 (6) 1983년의 교회법전 가. 준교구 대목구(라틴어 vicariatus apostolicus : 영...

주일의 말씀
1990년 11월호 (제 142호)
모든 성인 대축일 : 11월 1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묵시 7.2-14) : 사도 요한은 세상의 ...

주간 부활 축일인 주일
1990년 11월호 (제 142호)
4. 주일의 의미 주일은 그 명칭과 기원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여러 가자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
1990년 11월호 (제 142호)
I. 문제의 제기 우리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한국 땅에 모시고 서울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

신앙의 성숙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1990년 11월호 (제 142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

나의 고백
1990년 11월호 (제 142호)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전남 목포 출신으로 목포 공립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 경희대 대학원에서 ...

우리 시대의 표정
1990년 11월호 (제 142호)
1. 상징의 의미 인간의 삶은 상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흐름이다. 마치 위대한 강물과도 같이 그 상징은...

신앙의 발전을 위한 신심 활동
1990년 11월호 (제 142호)
대 담 : 정옥동 (레지오 마리애 서울 세나뚜스 단장), 전성민(성령쇄신 봉사회 서울 10지구장), 허종열 (...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소고
1990년 11월호 (제 142호)
I. 머리말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하느님의 말씀의 초보...

말이 문제되는 신앙 생활
1990년 11월호 (제 142호)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평신도로서 신랄한 비판과 제안을 해달라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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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앙의 발전 1990년 11월호 (제 142호)

말이 문제되는 신앙 생활

강대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전례부 부장)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평신도로서 신랄한 비판과 제안을 해달라는 요청올 받고, 뭔가 써댈 건덕지가 없어 고민만 하다가 약속한 마감일을 3번이나 넘겼다. 나의 신앙 생활이 이렇게 바닥인 줄은 미처 생각지를 못했다. 제 분수를 모르고 천방지축 무슨 일에나 나서는 것이 미숙하고 유치한 행태임을 절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이 보속을 시작하고자 한다.


I.  그리스도의 추종


“왜 당신들은 하루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마태 20.6).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를 마친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그 후속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발표하시고, 제3천년대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는 이 세상에서 곧 주님의 포도원에서 땀흘려 일해야 할 전세계의 모든 평신도들에게 비상 동원령을 내리셨다. 역사의 이 위대하고도 극적인 순간에 평신도들이 능동적이고도 책임 있는 역할을 맡아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라는 절박한 호소이다. 오늘날 교회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생활의 새로운 상황은 특별히 평신도들의 행동을 절실하게 촉구하고 있다. 무관심이란 언제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은 더욱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저 빈둥거리기만 하는 무관심은 어느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주님의 포도원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빈 씨릴 여지가 전혀 없다. 그 ‘주인’은 한층 더 절박한 목소리로 거듭거듭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마태 20.7)


이 사도적 권고「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특별히 공감했던 문제들을 먼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과 생활의 괴리를 극복하여 스스로 고백하는 믿음과 일상의 삶을 일치. 통합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는 흔히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도 된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다. 세속에 사는 평신도라고 해서 과연 속물로 살아가도 그만인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같이 완전한 자 되어라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 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추종의 요구는 과연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만 이르시는 말씀인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당장 잃어버릴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나 자신도 이 말씀만 생각하면, 금방 안색이 변해 부자 청년의 슬픈 얼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권위 있는 성서학자이신 어떤 신부님께서 그러한 추종의 요구는 분명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신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위로의 말씀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란 말인가? 이 속세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신앙과 생활의 분열 내지 피리가 더욱더 극심하게 돋보이는 것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공의회 이후 평신도들의 길에 곤경과 위험이 없지 않았음을 적시하였다. 특별히 평신도들이 자주 빠져 들였던 잘못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신앙과 생활의 부당한 분리, 즉 복음의 수용과 현세와 현시대의 다양한 상황에서 '수행하는 활동과의 분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항),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7차 정기 총회는 한마디로 모든 평신도들이 인간 존재의 온갖 실존에 태한 그리스도교적 통합의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방안을 장구하고자 하였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참다운 자유와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의 이러한 증거는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여려 가지 형태로, 성령의 감도를 받아, 일상 생활의 모든 일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는 커녕, 내가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유와 진정한 평화를 깨닫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너나없이 철저한 성찰과 회개, 끊임없는 참회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각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로써 다시 태어난 우리는 진정 새사람이 되었는가? 하루 하루의 삶에서 세례를 받기 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있는가? 세례로 거듭난 새 생명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우리 가 철저하게 따라 걸어야 할 그리스도의 길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몰라서도 아니고 결코 못 배워서도 아니다. 말이 아니라 삶이 문제이다. 이러저러한 말장난으로 꼬고 또 꼰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세례의 서약에 나의 온 삶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것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되도록이면 남의 몫까지도 내가 다 챙기고, 그 위에다가 교회나 하느님의 것도 가능하면 더 얹어 보려는 탐욕의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으며 우리 나약한 인간에게 넉넉하게 내려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바라는 희망으로,성령의 역사 앞에서 우선 이기적인 욕심으로 닫혀 있는 내 마음과 집안의 문을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문을 열어 제쳐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예사 때와는 다른 소란스런 소리에 눈을 떴다. 뒷집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말이 집이지 그저 시멘트 벽돌 몇 장 위에 쓰다 버린 널빤지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자라 콧구멍만한 방이다. 대로변의 눈부신 상점들 뒤편으로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골목에 그런 방들이 상하좌우도 없이 엉켜 있는 곳이다. 거기 공장에 다닌다든가 하는 아가씨가 죽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우는 사람은 하나 없고, 사인을 규명하겠다는 경찰들의 카메라 플래쉬만 쉴 새 없이 터지고 있었다. 그날 하루도 일에 매달려 그 아가씨의 죽음은 그냥 잊고 지냈다. 여름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워 있는데, 비를 피할 처마도 없는 비좁은 골목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비보를 듣고 시골에서 올라온 여남은 가족들이 별도리 없이 그 비를 다 맞고 서 있는 모양이다. 그 골목에서 그래도 제대로 된 모양의 건물은 우리 집밖에 없으니 일어나 문을 열어 주고 싶었다. 좁은 마루나 층계참에서라도 비를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러나 이기심으로 닫힌 마음에서 싫은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나도 세 들어 사는 처지에 같은 건물에 사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도 염려스러웠지만,극도의 가난 속에 엉겨 사는 그 골목 사람들의 온갖 행동거지가 떠오르며 그저 밉기만 했다. 골목엔 그저 시도 때도 없이 부부 싸움이다. 무슨 돈으로 처먹은 술인지 곤드레가 되어 주정 부리는 꼴도 가관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이 있다. 그 골목엔 화장실이 없어 우리 집 화장실을 예닐곱 세대가 공동변소로 알고 사용한다. 그런데 청소하는 작자는 하나도 없다. 아무데나 일 보고 토하고 나가버리면 그만이다. 더구나 지난 겨울엔 화장실와 수도가 얼어붙었다. 수도가 얼어붙은 줄 번히 알면서도 넘치고 또 넘쳐흐르도록 일을 보아댄 작자들의 심사는 무엇일까? 그들의 머리 속에는 도대체 뭘로 들어차 있을까? 그리 살아도 싸지 온갖 욕을 퍼부어대며, 급한 사정에 근처 학교나 예배당을 기웃거리다가 수위에게 쫓겨나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공원의 공중변소로 줄달음질쳐야 했던 구역질 나는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깨끗한 집의 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그건 정말 제때에 갖다 맞춘 기막힌 핑계거리였다. 가당찮은 이기심과 일말의 양심이 힘겨루기를 할 때에 그런저런 핑계로 양심을 어루만지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십 년 전와 그 일이 아직도 부끄러운 잘못으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어디 가난한 사람들이 눈앞에만 있으랴, 가난하고 억눌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애써 외면한 채 살아오고 있다. 그래도 감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나설 수 있는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는 못하더라도, 아니 가진 것의 천분의 일을 내놓지는 않더라도, 그저 가까운 이웃 사람들에게 자기 집 문을 기꺼이 열어줄 수 있어야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노력한다는 자기확인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 대도시의 한복판이든 변두리 주택가든 가난한 사람은 어디에나 가까이 있게 마련이다. 자기 집에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면, 탁아소에 아이들을 맡길 형편도 못 되는 그런 집의 자녀들을 자기 아이들의 동무 삼아 놀게 하고 끼니까지 챙겨 보살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한 두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런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그 철저한 추종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현실적으로 무척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난한 이웃들과 따뜻한 마음이라도 나누고 그 이웃들이 아무런 스스럼없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릴 수 있을 때에 우리는 함께 살 고 있다는 느낌을 지니게 되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전해들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이나 일터에서 꾸려 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이 과연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인지 철저한 성찰과 통회가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II.  성덕의 소명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평신도는 성직자도 수도자도 아닌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뒷전에 주저 앉아만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인간 본성의 한계와 죄악으로 인하여, 온갖 불의와 억압과 고통이 만연해 있는 이 세상에서, 평신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최일선에서 있어야 할 사람들이다. 평신도 들은 이러한 복음 선포와 증거에 있어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근본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다. 바로 평신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희망과 사랑의 표지요 원천으로서 세상의 모든 분야에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생명과 사랑 자체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므로 교회는 신비이며, 교회는 역사 안에서 바로 하느님의 친교를 재현하고 천명하고 전달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바로 친교의 신비인 교회의 신비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이 드러나며,평신도들의 근본 존엄성이 밝혀진다. 오직 이러한 존엄성의 맥락 안에서만,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정의할 수 있다. 평신도란“성세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하느님 백성 중에 들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참여하여,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도들 을 말하는 것이다"(교회 헌장 31항),


평신도의 전실존은 세례를 받는 그 순간부터 전혀 새로운 삶이어야 한다. 세례는 하느님 아들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에 우리를 결합시켜 주며 우리를 영적인 성전으로 삼으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준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구세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똑같은 삼중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모든 일, 일상의 모든 생활을 하느님의 뜻에 맞갖는 영적 제물로 바치며,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평신도들도 예배를 드리며 어디서나 거룩하게 삶으로써 이 세상 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또한. 신앙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용기 있게 죄악의 정체를 밝히고 고발하며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한다. 평신도들은  가정과 사회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름받고 있으며, 현시대의 반대 속에서도 자신의 희망과 미래의 영광을 인내로이 용기 있게 표명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평신도들은 또한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도록 부름 받아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안에서 죄의 지배를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바쳐 정의와 사랑으로써 몸소 모든 형제 자매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왕직이다. 평신도들은 특별히 모든 피조물을 그 본래의 가치로 회복시키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은총의 생활을 통한 활동으로써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피조 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가운데,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권한 행사에 참여한다. 사제요 예언자요 왕이신 그리스도의 삼중 사명에 대한 평신도의 참여는 세례의 도유에서 그 근원을 찾고 견진성사로써 더욱 발전을 하고 성체성사 안에서 실현 되고 역동적으로 유지된다. 세례의 이 공통된 존엄성은 평신도들 안에서 사제와 수도자와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구별지어 주는 생활 양식, 곧 세속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세속적 성격은 평신도의 고유한 특징이다. '세속’은 평신도들이 자신의 그리스도인 소명을 성취하는 자리가 되고 그 수단이 된다. 평신도들은 본래 현세적 일에 종사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찾도록 불린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소금과 빛과 누룩의 표상들은 예수님의 모든 제 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만 특별히 평신도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여하신 첫째가는 근본 소명, 성덕 곧 사랑의 완덕에로 부르시는 소명을 숙고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평신도의 존엄성이 지니는 완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성덕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부여된 존엄성에 대한 가장 위대한 증거이다. 성덕에의 소명은 바로 복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쇄신을 일으키고자 하였던 공의회가 교회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맡긴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무는 단순한 도덕적 권유가 아니라 교회의 신비에서 솟아나오는 명백한 요구이다. 성덕이 그 열매인 성령을 따르는 삶은 세례받은 모든 사람을 일깨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으라고 요구한다. ‘참된 행복'을 받아들이고,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며, 교회의 전례와 성사 생활에 의식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기도를 바치며9 정의를 열망하고 추구하며, 생활의 온갖 여건 속에서도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형제들을, 특별히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가난하고 고통 받는 형제들을 섬기라고 요구한다. 성령을 따르는 이 거룩한 삶은 현세사에 때한 관여와 지상 활동의 참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평신도들은 성덕에의 소명을 무엇보다도 먼저 회피할 수 없는 요구요 의무로서 인식하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성덕에의 소명은 세례의 새 생활이 지닌 불가분의 본질 요소이고 평신도들의 존엄성을 결정하는 본질 요소이며, 교회와 세계 안에서 평신도들에게 맡겨진 책임과 사명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덕은 교회의 구원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기본 전제요 필수 조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사도직 활동과 선교 노력의 감추어진 원천이요 그르침이 없는 척도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9?17항 참조),


III. 신앙과 생활의 괴리


거룩하게 살라는 이러한 가르침을 몰라서 실천하지 않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실천이 문제이다. 믿음과 삶의 일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오늘날의 세태는 어떠한가?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만이 횡행하고, 황금 만능 주의와 퇴폐적 향락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죄 의식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다. 교회의 가르침이 인간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제시하는 인공 피임 및 인공 유산의 금지에도 불구하고,내면의 법정인 양심에서는 어떠한 송사가 이루어지는지 모를 일이지만,적어도 통계상으로는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일반인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 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미 상품화된 성(性)은 매매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젊은 성직자의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가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분위기로 보아 그 말씀이 술에 취한 가르침이고 죄에 찌든 속물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들어 위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새겨 입에 게거품을 물고 설쳐 대는 주정뱅이 속물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 국토가 투기판으로 변해 땅 값 집 값이 하늘 높이 치솟기 전에,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가 마땅히 해야 될 일과 지역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돈 이 나오기는 커녕 엄청난 돈만 드는 그런 사목(?)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도 되지 않았다. 집세가 터무니없이 올라 가난한 사람들이 아우성을 쳐대고 목숨을 끊는 사람들마저 생겨나도, 집 주인들이 많은 중산층의 신자들 가운데서 집세 올려 받지 말자는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교회는 신축 성당 부지 확보만을 걱정하지나 않았는가? 일반인의 눈에는 성직자들이 그 전부로 보이는 교회마저도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그 하는 이야기와 실천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어지고 발전하려면 이제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주장이나 구호만으로는, 비록 그것이 신앙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민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비록 성직자가 강론대에서 외치는 인간 존엄이나 이웃 사랑이라 하더라도 의례적인 겉치레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사 진지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뒤에 흑심이 없나 하고 저의를 의심할 뿐이다. 도대체 믿을 사람도 없고 믿는 사람도 없는 불신 풍조가 휩쓸 지 않는 구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최근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벌이고 있는 신뢰 회복 운동이 일반의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도 그러한 불신 풍조를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일반인들에게는 참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내 탓이오”라는 참회의 구호 또한 입술에 발린 빈말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그 신뢰 회복 운동의 추진자들은 물론 우리 신자들부터 이미 '내 탓’으로 인해 생긴 분열과 불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구체적이고도 진지한 행동을 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 운동이든 성령 운동이든, 생명 운동이든 공동체 운동이든, 아니면 어떠한 사회 운동이든 정치 운동이든,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의 밀알이 되어 썩어 없어지지 않으면 그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이것은 안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 준 가르침이다. 죽음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을 희망할 수는 없다. 생명 운동 등을 추구하는 농민들이나 일부 신자들 가운데서 완전히 썩어 묻히는 ‘침잠,(Immersion) 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그러한 '침잠'은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장차의 세력 형성을 위하여 일정 기간 종교 운동 등의 겉껍질을 둘러쓰는 외피론과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몰골들이 너무나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교회에서마저 본당이든 교구이든 조그만 단체에서부터 제법 커다란 조직에 이르기까지,저마다의 최우선 관심사는 편 가르기이다. 내 편과 네 편을 갈라놓고 보아야, 모든 이야기가 쉽게 이해(?)되고 그 저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어떻든 자기 편 숫자에 어느 정도 자신이 서면, 깃발을 드높이 치세우고 화려한 주장을 내걸며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새겨 두려 한다. 그런 치졸한 행태 자체가 상당한 업적으로 평가되기까지 하는 세태를 두고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 교회 기관의 한복판에 서부터 주도권을 다투고, 소위 현대판 예루살렘 부인들마저 헤게모니 싸움을 해 댄다면,예수님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수없이 더 죽으셔도 모자랄 일이다.


나라 발전의 암적인 병폐라는 정치인들·의 패싸움이 쉰내가 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원래 정치판이라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이 또한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복음 정신으로 성화하여야 할 영역이라고 가르치고는 있다. 기존의 정치인들 가운데는 신자들도 제법 있어, 무슨 모임에서 합장을 하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신문에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일반 신자 비율보다도 정치인들이나 관료들 또는 권력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들의 신자 비율이 더 높다고도 한다. 그런데 왜 우리의 정치에서는 복음 정신은커녕 일반의 상식적인 윤리 의식마저도 찾아보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신자들만을 두고 말하자면, 한마디로 신앙과 정치 생활이 철저하게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같은 것은 저승에 가서나 뒤져볼 일이다. 이승의 정치판에서야 그 권력의 당부당을 떠나 권력자에게 빌붙어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가면 거나하게 먹자판이 벌어지고 또 화끈하게 한판 먹어치우고 나도 별탈이 없다. 눈치껏 또 다른 판에, 그것도 힘 있는 쪽에 붙고 나면 뒷탈을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극단의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는 이러한 모리배 정치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세태도 실은 우리 국민들의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 것이다. 최근 수년간의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철저한 집단적 이기심뿐이다. 그 응축된 표출이 곧 지역감정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지역 감정의 폐해를 운위하는 사람들 또한 지역감정을 동원해 온 가해자들로서 천박한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극대화하자는 뱃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교회 안에서마저 수도회에서마저 그런 치졸한 지역감정이 전혀 여과되지 않은 채 그대로 흐르고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 화해의 희망을 찾을 것인가? 그 누가 있어 회개를 부르짖고 또 누구부터 참회를 할 것인가? 너나없이 우리 모두가 당장 참회를 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성직자들 사이에서마저 지역이나 학교 또는 갖은 인연을 따져 내 사람 네 사람으로 패를 가르고 소위 인맥을 형성해 간다고 하면, 그런 인맥이 세속적인 이권을 놓고 먹을 것을 두고 움직여 나간다고 하면 一 주의 수난 주간만이 아 니라 일년 사시장철 십자가를 가려 두어야만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인간적이고도 세속적인 조직과 자금과 운동이 요구된다 하더라도, 인간 구원 운동의 한복판에서 그 핵심이 되어야 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그 누구보다도 먼저 사랑의 완덕 곧 성덕을 갖추고 이를 모든 신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평신도들에게 성덕의 보편적인 소명을 명확하게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이다. 평신도들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그러한 증거와 실천에서 힘을 얻고 또 성덕을 닦아,썩어가는 세속의 구석구석에까지 녹아 들어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누룩이 될 것이며, 세속의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우리 신자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여, 어쩌다 믿음이 약한 새로운 구도자들이 교회를 찾아왔다가 영원한 생명이 아닌 부패한 주검만을 얻어 놓은 회칠한 무덤에서 환멸을 느낀다면 그는 극단의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되거나 비록 폐쇄적일 망정 철저한 공동체(집단) 의식이라도 살아 있는 신흥 종교를 찾아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발흥하고 있는 무수한 신흥 종교들의 양태에서 이 땅의 기성 종교인들은 신앙과 동떨어진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반성하여야만 한다. 거룩한 교회의 심장부라 할 신학교에까지 신흥 종교 운동아 뻗쳤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밑바닥 가난한 민중의 한과 열망을 외면해온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참회하여야 하고, 소위 중산층의 이기적 소유욕을 제도적으로 위로해 주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처절하게 반성하여야 한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버지의 장례마저도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 둔 채, 지금 당장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어떤 신흥 종교 교주의 호령보다도 무지막지하고 엄청난 것이다. 이보다 더 철저한 추종의 요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다 어떠한 관념의 허울이나 제도적 장치를 씌우고 명석한 신학적 해석을 입힌다 하더라도,이 철저한 추종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할 수 없을 것이다.


IV. 부질없는 상념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추종의 요구를 글자 그대로 지금 당장 따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각자 이기의 껍질을 털어 내고 가능한 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연습이라도 진지하게 거듭하여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일이지만, 되도록 자기 집 문을 누구에게나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세상이 하도 험해서 도둑이나 강도 걱정도 많겠지만, 무슨 일이든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활짝 문을 열어젖히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가까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찾아 나선다면 더 좋은 일이다. 구태여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아니라도 주위에 사는 사람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밥이라도 같이 먹는다면, 아무리 삭막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요즘의 콘크리트 도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가로막고는 있지만 아파트나 연립 또는 다세대 주택 등 공동 주거의 형태가 많으므로, 내가 먼저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그러한 기회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본당마다 다 조직되어 있는 반 모임이나 구역 모임 등도 단순한 사목 행정의 편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생활 공동체 운동으로서 실질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아버지 모임 등이 실천적인 생활의 유대를 통하여 활성화된다면 기초 공동체의 신앙 실천을 위한 하나의 토대로서 커다란 힘을 지니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한 작 온 모임들의 진지하고도 구체적인 신앙 실천에서부터 생활과 신앙의 일치가 모색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거기서 우리는 주변에 사는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의 시간과 역량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지역 사회와 민족 그리고 전세계 인류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열려 있는 신앙을 지니게 될 것이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라는 사목자들의 격무와 고충을 모르는 잠꼬대 같은 이야기지만,공상에 그치더라도 한번쯤 함께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 그 잠꼬대를 늘어놓기로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랑의 완덕에 이르지 못하여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 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본당 신자들만이 아니라 그 지역 사회의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문화관 등을 건립하는 본당도 있다. 반드시 새로운 시설을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기존의 교회 시설을 그 지역의 일반인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나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하다못해 우선 화장실부터라도 개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당은 어린이 놀이터로, 봉사자가 있는 곳에서는 교리방이나 회의실 등을 탁아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자들 가운데는 아직도 선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믿는다. 도회지든 농촌이든 사목자들이 관심만 기울인다면, 선의의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 가능한 교회 시설을 지역 사회에 개방하고 그 효율적인 운명 방안을 함께 강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랑인들이나 노숙자들을 위한 급식소나 숙소를 운영해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일반인들의 관혼상제를 위해서도 일부 시설을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모든 일들이 실제로 다 불가능할 경우에도, 어느 본당이든 적어도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단순한 휴식처로는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무엇이든 형편에 따라 손쉬운 일부터 시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떻든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내 집처럼 드나드는 교회여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나누어 주라는 엄청난 요구보다는, 그저 가능한 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 용하는 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한결 더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교황 성하께서는 얼마 전에 발표하신 회칙「사회적 관심」에서 교회에 요긴한 것마저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교회 가르침의 일부요 가장 오래된 관행이, 교회는 ㅡ 교회는 물론이요 그 성직자들과 그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ㅡ 그 소명으로 말미암아 가깝든 멀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비참을 덜어 주어야 하며, 단순히 교회의 '남는 것'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요긴 한 것'을 갖고서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곤궁한 사람들의 처지에 임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를 위해서 피상적인 교회의 장식이라든가 값비싼 비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그런 사람들을 못 본 체할 수가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지붕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마련하기 위하 여 이런 재산들을 파는 일이 의무적이 될 수도 있다.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가치의 서열',소유의 권리에 관해서 '갖는 것'과 '사람됨' 사이에서 가치의 위계이다. 더욱이나 소수의 '갖는 것’이 다른 많은 인간들의 s사람됨'을 손상시킬 경우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회칙(「민족들의 발전」)에서 바오로 6세는 사목 헌장에서 영감을 받아 바로 이 가르침의 노선에 서 있다. 나로서는 이 가르침의 심각성과 절박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으며,주께서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이것을 실천에 옮기게 해주십사 기도드린다”(31항), 어떤 의지에 의하면, 가진 것을 팔라는 가르침의 실천을 촉구하는 회칙 초안의 이 부분이 지금 인용한 본문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고였는데, 교황 청 내부에서부터 지역 교회에 이르기까지 반발이 하도 자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주님께 올리는 기도로 바뀌어 버렸다고 한다. 확인할 길이 없는 이야기 거리이지만, 이는 또한 용기 없는 못난 우리 신자들의 슬픈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교회나 우리가 가진 것 이 너무 많아서 이 가르침을 슬픈 얼굴로 들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엄청난 괴리의 간격만은 분명 하게 알고 살아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 부질없는 언사는 그만두자, 누군가 언어는 침묵의 퇴화된 형태라고도 하였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작은 일 하나라 도 나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하여야 하겠다.


1) 요한 바오로 2세, 사도적 권고,평신도 그리스도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9.

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88.

3) 제7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총회 의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20년의 세계와 교회에 있어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 42호(1987.7.1).

4)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집없는 형제들을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하였는가,198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 50호(1989.3.1).

5) 심상태,한국 교회와 신학, 바오로출판사, 1988.

6) 문화공보부, 한국의 종교, 문화공보부 종무실, 1989.

7)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 한국갤럽조사연구소, 1990.

8) 정하권, 교회의 쇄신, 광주 가톨릭대학, 1976.

9 )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위원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