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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 제 2편 제 2부 개별 교회와 그 연합
1990년 11월호 (제 142호)
제1절 개별 교회 (6) 1983년의 교회법전 가. 준교구 대목구(라틴어 vicariatus apostolicus : 영...

주일의 말씀
1990년 11월호 (제 142호)
모든 성인 대축일 : 11월 1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묵시 7.2-14) : 사도 요한은 세상의 ...

주간 부활 축일인 주일
1990년 11월호 (제 142호)
4. 주일의 의미 주일은 그 명칭과 기원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여러 가자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
1990년 11월호 (제 142호)
I. 문제의 제기 우리는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한국 땅에 모시고 서울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

신앙의 성숙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1990년 11월호 (제 142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

나의 고백
1990년 11월호 (제 142호)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전남 목포 출신으로 목포 공립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 경희대 대학원에서 ...

우리 시대의 표정
1990년 11월호 (제 142호)
1. 상징의 의미 인간의 삶은 상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흐름이다. 마치 위대한 강물과도 같이 그 상징은...

신앙의 발전을 위한 신심 활동
1990년 11월호 (제 142호)
대 담 : 정옥동 (레지오 마리애 서울 세나뚜스 단장), 전성민(성령쇄신 봉사회 서울 10지구장), 허종열 (...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소고
1990년 11월호 (제 142호)
I. 머리말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하느님의 말씀의 초보...

말이 문제되는 신앙 생활
1990년 11월호 (제 142호)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평신도로서 신랄한 비판과 제안을 해달라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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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앙의 발전 1990년 11월호 (제 142호)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소고

김몽은 (서울대교구 신당동 천주교회 신부)

I. 머리말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하느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단단한 음식을 먹 지 못하고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형편입니다.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은 아직 어린 아이이니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훈련을 받아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이제 와서 죽음에 이르는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일과 하느님을 믿는 일과,세례와 안수, 그리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같은 기초적인 교리를 다시 배우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우리는 성숙한 지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히브 5,12-6,3).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은 신앙이 성숙되지 못하면 배반하는 일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일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신앙의 성숙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한 말씀이다.


그럼 신앙의 성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반 사회에서도 성숙한 인간이 아니고서는 행복의 참뜻을 모르듯이,신앙에 있어서도 성숙한 신앙이 아니 서는 신앙의 기쁨, 축복, 영광 등을 몸으로 깊이 느끼지 못한다. 사회적으로도 성숙한 인간이란 단순히 육체적으로 어른이 되었다든가,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든가, 혹은 많은 재산을 모았다든가, 높은 지위를 얻었다든가 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재산이나 지식, 지위나 명예 등은 없다 할지라도, 깊은 통찰력과 이해심, 자비,포용력 그리고 인내심 등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사실 많은 것(지식,재산 등)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해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아니 현사회는 대부분이 그런 미숙한 인간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옛날에 비해 굉장한 부(富)와 지식의 문화적인 편의 속에 살면서도, 범죄, 부조리 등 불안, 긴장, 공포의 노이로제 환자들이 자꾸만 급증해 가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성숙한 신앙이 아닌 신앙은 오히려 신앙 을 그르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2000년을 내려오면서 인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윤리나 도덕 등 그리스도교를 비롯해서 모든 종교가 지향하고 있는 면은 더욱 나빠지고 타락해 가고 있는 이 엄연한 현 실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 물론여러 가지 사회적인 여건과 교회 자체 내의 서려움 등이 있겠지만,그 모든 것들을 차치(次置)하더라도, 그것은 곧 신자들의 미숙한 신앙이 이 사회를 개혁시키는 데 있어서 무력 내지는 무능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성숙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다함이 없다고 본다.


그럼 성숙한 신앙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 다. 옛 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히브 11.1-2), 즉 언제나 믿음의 사람은 그가 바라는 것이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만을 바라기 때문에 항상 보증을 받을 수 있고, 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만물의 근원이시며,세상의 핵(核)이 되는, 참 실상(實相)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세상의 뜬구름 같은 허망한 것들 (부귀 영화, 쾌락, 안일 등)에 현혹되지 않는 자세가 확립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또 성숙된 믿음은 다음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고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고 동정하고 있습니까?”(필립 2,1-2)


여기에 확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곧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3-5) 이런 사람이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II. 현대 세계의 상황과 교회


1. 급변해 가는 세상


교회도 역시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 현재 세계가 겪고 있는 상황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대로 현상 유지만을 위하고 급변해 가는 시류(時流)에 대처할 방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일에 대해서도 역시 이렇다 할 방도가 없는 것 같다.


역사를 통해 인간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처럼 급변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옛날에는 30년을 1세대로 하고 30년을 세대차라고 한다면 역시 30년의 거리를 두고 말했지만, 요즈음은 중학생과 고등학생, 즉 3년을 두고 세대차라고들 말하며, 심지어는 1년 사이에도 세대차를 느낀다고 할 정도이다. 이것은 곧 일찍이 인류가 체험해 보지 못했던 급변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인들은 이 급변의 세계에 신속히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감이 요청됨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현대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방법을 찾아내도록 강요하고 있다. 만일 그렇게 못할 때, 교회는 사회의 조류에서 어느 한 모퉁이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이미 선진국(특히 서유럽 등)에서는 그러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로버트 아돌프스(Robert Adolfs, O.S.A.) 신부의 다음 글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참으로 곤란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대한 의의가 감퇴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는 이미 현대의 세속화된 사회에 대해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공언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가 현대 세계 에 대해서 지극히 작은 뜻 밖에는 없음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미 복음의 전파는 기대했던 바와 같은 기쁨과 해방을 가져오지 않는다. 현대 세계는 생명 그 자체의 커다란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또한 각종 과학과 현 대의 새로운 이념에 의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현저하게 그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풍기는 인상은 날이 갈수록 피상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거의 하나의 개인적인 의견의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늘날에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다. 아마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 진정 활기찬 영역에 있어서는 전면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도시화(都市化) 시대에 있어서 자동화, 인구 폭발, 공해 문제 그리고 정치, 경제에 있어서의 비국적화(非國 籍化)의 경향에 당면해서 무방비 상태이며, 둔감하고 무능력하다. 이제 이 현상은 근절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속에 뿌리를 뻗고 있으며s 더 한층 급속히 변화될 미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1)


물론 이것은 우리나라의 사정은 아니지만, 조만간에 이 땅에도 이런 풍조가 밀려닥칠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양상은 조금 다르겠지만,오늘날과 같은 급변 하는 시대에 현재 한국의 교회도 대처해나가기 위해 무엇인가 시급히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제도적 개혁이나 전례의 쇄신이나 그 밖의 시설 등의 확장이나 개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보다 근본적인 것,즉 내적인 면에서의 쇄신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 첫째 단계가 신자들의 신앙을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2. 한국 교회의 특수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한국 교회에서도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과 그 효능을 인정하고, 평신도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참여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성직자 중심적인 면을 탈피하지 못함으로써 평신도의 신앙 성숙을 위한 배려 문제가 그리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지 못하다. 물론 각종 세미나를 비롯해서 피정의 형식 등으로 신자 재교육을 실시하고는 있지만,신자들의 신앙을 성숙한 믿음으로 높이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행사와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교황 방한 이후,천주교를 찾는 구도자의 수효가 급증함에 따라 각 본당에서는 입교자를 위한 교리 교육 실시만을 위해서도 손발이 모자랄 지경이어서,신자 재교육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재교육을 위한 교재라든가, 지도자,그 밖의 여건들이 갖추어 져 있지 못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도 한국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로서의 한국의 현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즉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무속(巫俗)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종교’라 하면 덮어놓고 기복 신앙(祈福 信仰)을 말한 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도 역시 이 무속 신앙 위에 뿌리를 내렸고, 유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음양오행설은 사주나 관상,복술 등으로 기울어졌고, 삼 강 오륜 사상은 시대적 유물로 남아 있다손 치더라도 아직도 민족의 사상 속에 깊이 깔려 있는 윤리 도덕적 기준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지 200년이 넘었는데도,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 (Chnstianism)이 우리나라에 형성되고 있지 못한 그 사실의 이면에는, 천주교 신앙도 역시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하 기보다는,재앙을 막아 주고, 마귀의 유혹에서 지켜 주며, 올바른 구원관보다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신앙을 찾는 편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신자들의 일상 생활면에서 뚜렷한 그리스도교적인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유교의 영향으로 체면을 중시하여 내적인 면보다는 외적인 면에 치중하여 외부적 행사에 는 적극적이면서도 내면적인 면,즉 교육이나 피정 등에는 참여 의식이 희박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특성을 지닌 한국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신앙의 성숙을 위한 교육은 시급하고도 중대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방안이 마련돼 있지 못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문제는 비단 한국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시급한교회의 시대적 요청으로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네덜란드의 개신교 목사인 반델벤( J.M. Vanderveen )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s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미래는 낙관적이 못된다.… 급변하는 사회와 인간의 생활 양식이 전혀 그 형태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고 있는데,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자들 역시 극단적인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2) 사실 뜻있는 교회 책임자들은 그리스도교와 그 교회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노를 저어가야 할지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이에 대해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도 각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인류 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되므로 이미 여러 가지 역사권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이렇게 인류는 정적(靜的) 세계관에서 동적(動的), 혹은 발전적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으며,여기에서 새로운 분석과 새로운 종합을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방대하게 야기된다”(사목헌장 5항). 이어서 동 헌장은 이 급변하는 세계의 모든 질서는 옛 것을 무너뜨리고 각 분야에 급속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대중화 내지는 사회화 (socialization)를 가져왔으나, 이에 합당한 성숙한 인간화 (personalization) 로까지는 촉진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인간의 심리상 의 변화와 윤리 도덕의 변화 그리고 종교상의 변화 등을 언급하면서, 그 모든 것 들이 불균형하게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어 사회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켜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소망하는 평화와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교회의 역할과, 특히 사목자의 사명이 더욱 막중함을 강조하고, 모든 사목 자들은 이 급변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 중에서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최선 을 다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3)


III. 문제의 핵심


1. 교리 교육의 면에서


요즈음 사회에서는 평생 교육이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도 평생을 통해서 계속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특히 세례를 받기 전에 예비자 교리를 마치고,입교한 후에는 별로 교리 교육에 관심이 없거나,기껏해야 주일 강론을 통해서 신앙 생활을 유지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태생 교우의 경우는 어렸을 때 첫영성체를 위한 교리 교육을 받고, 그 후에는 별로 교리 나 성경에 대해 공부하는 일이 없기도 하다. 물론 현재 전국 각 본당에서 주임 사제들이 신자 교육을 위해 나름대로 최대한 열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일 문제되는 것이 교리 교육을 위한 교재의 부족과 불충분한 점이며, 이어서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인적 자원의 부족은 극심한 정도이다. 거기에 덧붙여 교육을 위한 시설 또한 부실하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면서 일선 본당에서의 사목을 담당하는 책임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자연히 임기응변식으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교육을 실시하고는 있으나, 그 성과는 노력에 비해 심히 미약하다. 더군다나 신자들의 연령,지식 수준 그리고 직업적 차이 등으로 해서 일률적인 교육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대학생을 위한 교리 교육은 현재 별로 없는 것 같고, 중고등 학생들을 위해서도 그러하며? 겨우 주일학교라는 이름으로 국민학생들만을 교육하는데 그 교리 교사는 대부분 대학생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교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대학생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그나마도 시골 본당에서는 그림의 떡(?)이다. 첫째 대학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 고 주일학교에 등록하는 학생 수도 절반 정도밖에는 안되는 실정이고 보면, 이 교리 교육면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각 본당에서의 일반 신자들에 대한 교육은 주일 강론이나 판공성사 때의 특별 강론, 그 밖의 교육으로는 일 년에 한 번 정도의 특강이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렇게도 강조한 그리스도교 교육이 부진한 이유 중 몇 가지를 개략적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을 보완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시급한 문제는 우선 체계적이고 공통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교리 교육의 교재를 엮는 일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교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이 번역물이어서 우리 나라의 현실에 부적합한 점이 많다. 주일학교 아동용 교리서, 첫 영성체 및 중고등 학생을 위한 교리서들도 다양하게 출판되어 나왔지만,전국적으로 통일된 것이 없다. 다음은 교리 교사의 양성이다. 현재 교리신학원에서 신학 및 교수법 등의 교육을 받은 인재를 배출 하고 있지만, 역시 전국 본당 수에 비하면 너무나도 인재난이 심하다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시골 본당에서는 인건비 문제로 교리 교사를 채용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것은 곧 신자들을 신앙으로 성숙하게 이끄는 데 있어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각 교구의 교구장은 교리 교사의 양성을 위한 기구(평신도를 위한 교리 신학교 등)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부족하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일도 미래의 교회를 위해서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라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이와 같은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교회의 설 자리가 위태롭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서구를 비롯한 선진국에서의 교회의 양상을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므로 성직자 (특히 교구 책임자)의 중요한 과업의 하나는 평신도로 하여금 급변하는 현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으로서의 자각과, 이 혼탁하고 타락한 세상에 효율적으로 봉사하는 적극적인 신앙을 키워 나가는 일이야말로 현시대의 교회가 당면한 문제라 생각한다.


2. 복음 선포의 면에서


그리스도교적 교육은 일반 사회 교육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복음적이고 봉사적이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기에 합당한 새로운 인간”(에페 4,22_24 참조)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즉 “그리스도교적 교육은 인간의 완성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주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즉 성세를 받은 사람이 차차 구원의 신비를 인식하도록 인도되면서, 받은 신앙의 은혜를 나날이 더 잘 의식하게 한다.” 그리고 전례에의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예배하면서, 정의 와 참된 성덕을 갖춘 새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를 닮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교회의 발전에 진력하면서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고, 이 세상이 그리스도교화 되도록 신비체를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도록 하는 일은 성직자의 중대한 책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과연 우리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볼 때,그것은 확실히 찬란한 신학적인 업적이나 일사불란한 전통적 체계가 아니라,현대 세계의 당면한 문제인 비인간화,물량주의,과학 만능주의 등에 식상 한 나머지 진정한 구원의 손길인 그리스도의 메시지(복음)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현재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인간은 빵만 으로는 살 수 없다”(마태 4,4)는 사실이다. 눈부시게 발전한 문명 세계,기계화,자동화 등 각종 편의가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들어,인간에게 약속 한 행복의 그림자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이다. 세상은 이제 서서히 이 사랑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후진국이나 개발 도상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그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부(富)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서,소득 증대와 문화 시설을 그렇게도 갈망하고 있지만,저들 역시 문화에 물들고 인간성이 파괴되면,그때에 가서 새삼스럽게 물질은 부 족했지만 인간성은 풍부했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도 풍요롭고· 인간성 역시 풍부한 사회가 도래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문명이나 과학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에 함께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느님이냐 재물(맘몬,mammon) 이냐?”(마태 6,24)의 흑백론에 사로잡힌 경향이 있다. 사실 그래서 세속의 물질 문명은 교회의 재부(복음)를 소홀히 다루었고 또 등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재물까지)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3). 주님의 말씀은 순서의 문제지 대적(對敵)의 문제가 아님을,하느님이냐 재물이냐의 질문에 이어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실 현세계는 그 순서가 바뀌었다. 하느님과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뒷전에 미루어 놓거나 아예 내던져 버렸다. 그 결과가 오늘과 같은 비도덕적 비인간적 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곧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앞세운 결과이다. 그런 데 세상의 문화가 그렇게 옆길로 빠지도록 한 것은 누구인가? 물른 물질. 과학 만능의 세속화될 사회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겠지만,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등지게 한 책임은 곧 그라스도의 교회에 있다. 그것은 곧 순수한 복음의 선포가 아니라,교회가 가마한 복음 이외 것에 더 비중을 둔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에 대해 그렇게 복음 선포에 열성인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까지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가 인간적인 상황으로부터의 이탈을 극복하려면, 인간의 욕구나 갈망,그리고 인간의 요구들에 대한 문제성을 계속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이것을 등한히 한다면, 인간의 욕구나 갈망 그리고 인간의 요구들에 대한 문제성을 계속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이것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그것이 전파될 인간의 상황과의 사이에는 상호 작용과 상관 관계가 꼭 있어야 한다.5)


복음을 선포하고 인간과 세상이 다 같이 그리스도화(복음화)되도록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최고 최대의 막중한 사명으로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 능력의 최대 극한에 이르기까지 발휘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신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3. 대(對)사회적인 면에서


“세계가 교회를 역사적 사회적 현실로 보고 그 누룩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듯이, 교회도 인류 역사와 그 발전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교회는 그 역사의 시초부터' 여러 민족들의 언어와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으며, 또한 철학자들의 예지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애 써 왔다. 이것은 결국 가능한 한, 복음을 만민에게 이해시키고 지성인들의 요구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6)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복음’이라는 낱말이 표명하듯이, 인류가 이제까지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들은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1 고린 2,9) 즉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 세상에 선포하는 전달자로서의 대 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의 신앙이 미숙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대 사회적인 면에서의 교회는, 사 회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 각자가, 스스로의 신앙을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과, 참으로 천상의 기쁨 속에 사는 행복한 모습,그리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레위 19,18; 마태 22,39) 사랑으로 이웃에게 대하는 사랑의 전달자,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 있는 삶이 제대로 비쳐지지 않고, 다만 의지할 곳 없어 교회에 기대는 약자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진국 등에서는 ‘종교로부터의 해방'7)을 부르짖기도 했다. 그리고 “과연 교회는 현사회 안에서 현존하고 있는가?” 하고 묻기도 했다. 물론 교회는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인 단체로서 엄연히 존재하며, 세속인들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 는 ‘현존’이라는 말의 뜻은, 다만 피동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거기 있다”는 문제가 아니라,그것은 여기,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개입되어 현실적으로 현존 하는 것을 의미한다.8)


우리 나라의 현실로서는 교회란 신자 개개인이 사적(私的)으로 신봉하는 것으로서,사회적으로는 물론이요 일상 생활의 현실 속에서는 별로 상관 관계가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일에 그들의 입으로 고백한 것을 월요일에는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을,유감스럽게도 잘 알려진 사실”9) 이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즉 그것은 신앙이 생활화, 활성화,인격화 되지 못하고 계속 의존적 미신적 기복적인 개인 사정에만 국한시키는 습성 때문 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서 신자들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일은 우리 교회가 당면한 화급한 일 중의 하나라 여겨진다.


만일 모든 신자들이 주일 미사를 비롯해서,각종 교회의 모임에 참석할 때마 다 저들의 신앙이 성숙되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가정이나 사회에 나가서 그대로 증거하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은 바로 그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 교회의 현존을 실감할 것이며,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지금 여기에 현존하심을 확인하면서,그 믿음을 보고 교회를 찾게 될 것이다. 과연 그럴진대, 교회의 현존은 바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현존으로서 “세상의 빛”(마태 5.14) 이 되어 찬란히 빛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마태 5,1S) 우(愚)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미숙한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개인의 것으로 만들어, 됫박으로 덮어 둔 등불 정도가 아니라 심히 왜곡 된 모습으로 비쳐져,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대해 혐오감까지 자아낼 수도 있다.


IV.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제언


1. 교구(敎區)에 대해


옛날 사도 시대의 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천국의 그것이었다. 복음을 통해서 역사와 전세계에 걸쳐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10)를 알려 왔고(Kerygma), 이어서 실질적으로 천국이 도래했음을 증거했다. 그것은 우선 육신과 영혼에 병 든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었고,가난한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이 되어 주는 헌신적인 봉사(diakoma) 로써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신자들 상호간의 가족화로써 참으로 한 살과 피를 나누는 친교적 공동체 즉 복음 선포와 헌신적인 봉사 활동과 교우들 간에 격의 없는 친교로써,세상의 통치자들까지도 “보라,저들이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고 감탄할 정도 였다. 그러한 교회의 특징을 보다 더 강화시키고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며 세상이 빛을 던져 주도록 하는 총체적인 책임자는 각 교구의 주교들이다. 그래서 공의회 문헌에서도 '주교의 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주교는 성신 안에서 복음과 성체로써 그들(사제단과 하느님의 백성들)을 모아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는 것이므로,그 안에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으로 내재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주교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자기의 사도적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자들의 으뜸을 이미 따르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또한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진리의 길을 떠났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자비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돌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사람이 '완전한 선과 의(義)와 진리 안에서'(에페 5,9) 살게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11) 이렇게 교회의 활성화를 위한 주교들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제까지 교구 행정과 견진성시, 그밖에 대외 활동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선적이고 제일차적인 사목직을 등한히 해서는 안될 줄 안다. 특히 여기에서는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언하고 싶다.


각 교구에서 유능한 사제와 또 교육에 깊은 조예가 있는 평신도 등을 선임하여 성인 교리 교육의 문제와, 청소년과 젊은 층의 지식인들에 대한 참신한 교리 교육 방법을 연구하는 상설 연구소를 설치할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지금도 이에 대해 진력하고 있지만, 각 교구간의 교류가 별로 긴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도시 교구와 농촌이 많은 교구들 간에 연구 결과를 나누어, 풍요롭게 할 것이 바람직스럽다. 아니면 주교회의에서 전국적으로 연구소를 설치하는 일은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다음은 교구 신학교 및 신학원을 좀더 개방하자는 것이다. 현재 수도자나 평신도들의 방청을 허용하고는 있지만, 신학교나 신학원에서 특별히 평신자 봉사자의 양성을 위해,방학 기간이나 그 밖의 특별 절계(사순절 등) 때에 집중적으로 특별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렇게 해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봉사하도록 할 것이다.


끝으로 더욱 바람직스런 것은, 주교회의에서 평신도 봉사자를 위한 특별 교육 기관(학교나 학원)을 공동으로 설립하는 일은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2. 본당에 대해


주교가 교구의 총책임자라 할지라도 실질적인 교육에서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본당 사제들이다. 그러므로 본당 사목의 책임자인 주임 사제의 신자들의 성숙한 믿음을 위한 노력은 참으로 지대하다. 이는 교회의 발전과 사회의 복음화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첫째,입교자를 위한 교리 교육부터 현시대에 적응하는 신앙 생활을 심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예비자 교육을 단순히 성세성사를 위한 준비로만 생각지 말고 성숙한 신앙인을 위한 예비 교육으로 생각할 것이 요청된다. 현대는 문맹인이 없을 뿐 아니라 대개 지성인들이 고등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특히 이런 점을 유의하여 복음 선포와 봉사 정신 그리고 친교를 이루는 산 신앙이 되도록 교육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생활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어, 그리스도 가.삶의 중심이 되어서 타인에게 그리스도화된 모습을 보이도록 교육한다.


참으로 성숙된 신앙이란, “자기가 죽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사는”(갈라 2,20) 사람, 즉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요한3,5)을 뜻한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입교만이 아니라 이제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생활함도 아울러 뜻하기에, 거기에 합당한 교육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본당 사제는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예비자 교리에 이런 점에서 더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평일 미사에도 짤막하게 그날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이미 일부 사제들은 이를 실시하고 있다.) 한편 주일 미사에 독서 낭독자들과 사전에 사제와· 함께 모여, 해당 구절을 살펴보는 것도 권장하고 싶은 일이다. 특히 본당 사제가 전체 신자들에게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기회는, 주일 미사가 가장 적절하므로 ‘주일 강론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특히 열심한 평신도에게도 가끔 주일 강론을 부탁하여 그들의 신앙 체험을 다른 신자들에게 들려주는 것도, 신자들와신앙 성숙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평신도 주일 외에 가끔 시행할 것)·


다음은 신자 재교육을 위한 적극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본당 평신도협의 회와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 될 수 있으면 유능한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반모 임 등에 파견하여 신앙 성숙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특히 주 일 강론의 실효를 위해 사전에 평신도와 상의하여 각 본당 실정에 맞는 특색 있는 강론 준비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 그것이 어려우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요일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특별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매주 수요일에 특별히 모이기도 하고 금요일에는 금식 기도 일을 정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지만,성경 공부를 위해 특별 계획을 세울 일이다. (요즈음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열심한 신자들뿐이자 전체 신자들은 아직도 거기에 참석하고 있지 못하다. 특히 시간과 경제적인 문제로 해서 참여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주보에 각 주일의 성경 해설이나 강론 요지가 게재되고는 있으나, 그것을 읽고 있는지 또 읽었다 해도 그 내용을 옳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만일 주보에 게재된 내용만 이라도 잘 알아듣는다면 결코 미숙한 신자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문지를 매주 작성해서 거기에 답을 써내도록 하는 방법도 권장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기 위해 본당 내에 신자 재교육을 위한 상설 기구 같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설문지는 반드시 읽고 될 수 있으면 주석 등을 가해서 본인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권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실천 가능성이 희박한 일들을 희망 사항으로만 나열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튼 사제들의 열성 여하에 따라 신자들의 자질아 향상되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열성이 없는 사제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 열성에 따르는 방법이 적절하지 못할 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렵다. 선교 3세기에 접어든 우리 한국 교회가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하여, 진정으로 “이 땅에 빛을” 밝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현세기가 요구하는 사제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V. 맺는 말


선교 200주년을 넘기고 선교 제3세기에 접어든 한국 교회는, 과거 너무나도 많은 박해로 인한 순교자의 피로써 오늘에 이르도록 성장해 왔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 심한 박해를 피하기 위해 불가피적으로 폐쇄성을 지니게 되었고 그것이 선교 자유가 허용된 시대에도 타성적으로 잔재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선교 100주년을 맞은 개신교의 교세 확장에 비해 가톨릭은 너무나도 완만한 성장이었던 것도 거기에 기인된 것이라 본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교회도 성년(成年)에 이르렀고, ‘성숙한 신앙인이 배출될 때도 되었다. 이제 모든 신자들은 과거의 폐쇄성을 과감히 탈피하고 자기 스스로, 선교적 사명과 평화의 친교와 사랑의 봉사를 앞장서 나설 때가 되었다. 교회는 이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신자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 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현시대가 요청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평 화’와 '성령의 사랑의 능력,을 세상에 펼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격동을 겪고 있으며,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마저 잃고 있는 것 같다. 이때야말로 '구원의 표지’(標識)로서의 교회가 인류의 가야 할 방향과 길을 밝혀 주는 하느님의 손가락(성령)이 되어야 할 때이다. 과거 그리스도의 교회는 항상 그렇게 해왔었는데,어느덧 그러한 교회의 주도권은 사라지고,세속적 퇴폐 문화가 세계의 지도 논점인 양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교회가 사회에 비해 그 성장에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성숙된 신앙을 신자들의 가슴 속에 깊이 심어줄 것이 시대적 사명이라 확신하면서 몇 가지 추상적이나마 제언하는 바이다. 많은 뜻 있는 분들이 이에 대한 연구와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기대한다.


[주]


1) R. 아돌프스 저,박갑성 역, 신의 무덤, 삼성문화문고,8ㅡ9면.

2) J.M. Vanderveen, ‘Kerken toekomst', Wending 20, pp.649 一 650.

3) 사목 헌장, 제1부 '부르심을 받은 .교회와 인간’ 참조.

4) 그리스도교 교육 선언,2항.

5)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I, pp.3 ? 10.

6) 사목 헌장 44항 '현대 세계로부터 교회가 받는 도움’ 중에서.

7) Walter Schultz, 'Der Modernen Metaphysi’, Stuttgart, 1964, pp.89 - 108 참조

8) R. 아돌프스,신의 무덤, '격리와 부재’,97면 참조.

9) 상게서≫ '주택지 환경에 있어서의 교회’,103면.

10) 세례자 요한의 외침(마태 3,2),예수님의 전교하실 때의 첫 음성(마태 4,7)

11) 주교 교령 제2장 주교의 의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