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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호 (제 141호)
연중 제27주일 : 10월 7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이사5,1-7):이사야예언서의 유명한 ...

제 2권 제 2편 제 2부 개별 교회와 그 연합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제1절 개별 교회 3. 성직자치구와 자치수도원구 제370조 : 성직자치구와 자치수도원구는 특수한 ...

주간 부활 축일인 주일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기뻐하며 즐거워하자,(시편 117,24). 그리스도교는 성서와 교회 전승을 바...

성서와 새로운 복음화
1990년 10월호 (제 141호)
*본고의 내용은 제4차 세계성서사도직협회 총회에서 브라질의 기초공동체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

나의 고백
1990년 10월호 (제 141호)
강영훈 국무총리는 평북 창성군 청산면 출신으로 만주 건국대학교와 미국 육군 참모대학을 수료하고 미국...

멕여서 보내자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여중 시절 필독서를 정해준 선생님이 계셨다. 강제성을 띤 건 아니었지만 문학 소녀였던지라 그 기회에 ...

선교사가 본 한국 교회의 실상
1990년 10월호 (제 141호)
대 담 : 반예문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홍콩난민선교) 김정수(사목주간·신부) 일 시 : 1990년 8월 1...

가톨릭의 종교 개혁
1990년 10월호 (제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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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반성 - 성직자, 수도자, 신도의 특성
1990년 10월호 (제 141호)
I. 머리말 역사학은 어느 시대를 연구하는가? 그 연구의 범위 안에 역사 연구자 자신이 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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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 천주교회의 반성 1990년 10월호 (제 141호)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반성 - 성직자, 수도자, 신도의 특성

조광 (고려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I. 머리말

역사학은 어느 시대를 연구하는가? 그 연구의 범위 안에 역사 연구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의 역사를 포함할 수 있는가? 역사 연구자가 당대의 역사를 서술할 때 그것은 여타 사회 과학 분야의 연구나 시사 평론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나? 역사학계에서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의문들을 스스로 던지며 그 해답을 찾아 왔다. 일부 역사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분야를 한 세기나 반세기 이전 의 사건들에 국한시키려 했고,관련 당사자들이 살아 있는 현대 사회의 사건들을 역사학 연구와 범위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이 현대의 사건들은 현존하는 제도와 문물을 분석하여 어떤 규범을 얻으려 하는 사회 과학의 연구 영역에 속 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적 보수적 입장에 반대하며 역사학의 연구 영역 안에는 당대사(當代史)도 포함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주장들이 강하게 제시되었다. 역사란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단순한 서술에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밝히고 미래에의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입장에서 당대사 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강조의 경향은 '역사학의 사회 과학화'라는 현대 학문의 일반적 추세와 관련하여 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서 역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진보적 성향의 연구자들은 당대사 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역사학도들이 연구하는 당대사의 특성은 여타 사회 과학 분야에서의 연구보다는 한 사건에 대한 종합적 구조적 인식을 강조하는 데에 있으며,당대의 사건에 대한 시사 평론적 접근과는 달리 인과적(因果的) 인식을 중요시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교회사는 일반 역사와는 달리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지니고 있는 교회의 역사인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 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교회사에는 과학으로서 의 역사학이란 측면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 역사학에서 당대사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면,교회사의 분야에 있어서도 당대사의 연구 작업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의 한 부분으로 당대사가 연구된다는 것은 종교 사회학의 한 분야로 현대의 교회가 분석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연스러운 추세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현대 교회사를 밝혀 나가야 하며, 그 현대 교회사의 한 부분으로 1980년대의 한국 교회사에 관한 정리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1980년대 한국 교회’에 대한 논의의 가능성을 우선 검토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80년대는 1980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10년을 나타내는 편의적 시간 단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편의적 시간 단위에 대한 평면적 인식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과 1989년은 단순한 편의적 시간 단위에만 그치지는 아니하고,거기에는 역사학의 시대 구분론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즉, 1980년에 발생한 5 · 17 광주 민중 항쟁은 현대 한국사의 이해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이 광주 민중 항쟁의 여파는 한국 천주교회에도 적지 아니하게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 교회사의 여러 단계 중 하나로 우리는 1980년도를 주목할 수 있고 이를 그 시대 구분의 한 연대로 인정할 수도 있다.

또한 1989년은 1980년대를 마감한 해라는 의미 외에도 교회의 1980년대적 현상들이 절정을 이룬 해로 볼 수도 있다. 즉, 1980년대 한국 교회는 대규모의 신앙 집회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이를 민족과 세계 교회에 알린 때였다. 그 대규모 신앙 집회 중 하나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1989년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조선교구 설정 150년이나 한국 천주교회 200년을 기념했던 신앙 대회와는 근본적인 성격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성체대회는 앞서 개최된 두 차례의 대규모 집회의 경험을 전제로 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성체대회를 80년대적 현상의 한 절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은 한반도의 분단 구조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후 8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민족의 재일치와 화해를 향한 노력들이 전개되었다. 교회에서도이 기간에 이르러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지향하는 구체적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교회의 노력들이 1989년도의 이른바 '공안 정국'에 이르러 일대 문제로 제기된 바도 있었다. 그렇다면 1989년도는 단순히 80년대를 마감하는 해로서의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논할 때에도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국 현대 교회사에서 독특한 자리매김이 가능하리라 생각되는 1980년대의 교회사를 간략하게 검토해 보고자 한다. 즉, 우리는 1980년대의 한국 교회의 성직자·수도자·신도들의 특성에 주목하면서,1980년대 교회에 대한 이해와 반성을 동시에 시도하고자 한다.

II. 1981년대 천주교 신도의 특성

현대 교회에서는 복음화의 개념이 단순한 교세 확장이나 교회 성장만을 의미하지 아니하고 사회와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1) 이와 같은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전제한다 하더라도,우리는 복음화에 관한 뚜렷한 지표로서 신도 증가 상황과 증가율 등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80년대 신도 증가 상황은 다음〔표1〕과 같다.

〔표1〕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1980년도 한국 천주교회의 신도수는 132만 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89년도에 이르러 신도 수가 261만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신도의 증가지수는 1980년도를 100으로 볼 때 1989년도에는 198에 이르러 10년 동안 신도수가 거의 배에 가까운 숫자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로써 1980년 당시 전체 인구의 3.53%에 지나지 않았던 복음화율이 1989년도에 이르러서는 5.98%로 증가될 수 있었다.

1980년대에서 신도 수의 증가율이 가장 높았던 해는 1981년도로서,이 해는 전 년도에 비하여 9,01%라는 높은 증가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신도 증가율은 이 해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감소의 추세를 나타내고 있으며,1989년 도에는 그 증가율이 5.89%로까지 감소되었다. 1989년도의 신자 증가율은 80년대의 평균 증가율인 7.54%보다 월등히 낮은 것으로서, 이는 차후 신도 증가율 의 둔화 현상을 예시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8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신도 증가율은 현대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표2〕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현대 한국 교회는 휴전 직후인 1953년도 이래 1959년도 사이에 걸쳐 16.5%라는 경이적 증가율을 기록했다. 그 후 ’60년대의 증가율은 6.2%, 70년대의 증가율은 5.2%였지만,80년대 .한국 교회는 7,54%의 증가율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80년대는 50년대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60-70년대 전국 평균 인구증가율이 2?3%였고, 1988년도의 전국 평균 인구 증가율이 0.97%임을 감안할 때, 이 시기의 신도 증가율이 매우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1>

<표2>

그런데,80년대 한국 교회의 입교자 중 그 입교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새로 영세를 받은 사람의 25.7%가 태중 교우이고, 타인의 권유로 입교한 사람이 33.5%, 자발적으로 입교한 사람은 38.2% 등으로 집계된 한 조사 보고서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3) 그렇다면, '80년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큰 성장 원인은 교회 자체의 적극적인 선교에 있지 아니하고, 비신도들의 자발적 입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편, 타인의 권유를 받아서 입교했다고 한 경우,비신도에게 입교를 권유한 ‘타인’은 성직자나 수도자라기보다는 일반 신도로 상정되고 있다. 그런데 신도는 한국 교회의 일원이며 일부인 것이므로 ’80년대 한국 교회가 선교 에 무관심했거나 등한시했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또한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까지도 복음화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할 때 ’80년대 한국 교회는 복음화 룰 위해 일정한 노력을 한 것으로 평가해 주어야 한다. 특히,자발적 입교자들에 게 입교 동기를 제공해 준 것도 이 시기의 한국 교회가 전개한 정의와 평화의 구현을 위한 일련의 노력들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이 시기에 있어서 교회 의 직접적 성장을 위해 한국 교회의 구성원인 성직자 · 수도자 · 신도 모두가 조 직적으로 최대한의 노력을 전개해 왔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이 시기 교회 성장 내지는 복음화 진전이 가능했던 것은 비신도를 복음화하고자 하는 최대한의 노력을 교회가 전개한 결과라기보다는 비신도 동포들이 천주교회에 대하 여 가지고 있던 최선의 호의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말할 수 있다.

비신도의 복음화 문제와 더불어 ’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영세한 신도들의 재복 음화(再福音化) 문제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갖도록 요청받고 있다. 즉,1989 년도의 교세 통계 중 냉담자(10.05%)와 거주 불명자(12.88%)는 전체 신도의 22,93%에 이르는 60여만 명에 이르고 있다. 냉담자와 거주 불명자에 관한 1989 년도의 비율은 1980년도의 26,24%보다는 약 3.31% 정도 감소된 것이다.

그리고 냉담자나 거주 불명자의 증가율은 신도 증가율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냉담자와 거주 불명자의 절대 숫자는 계속 증가 추세에 놓여 있다. 즉, 1980년도를 100으로 볼 때 1989년도 냉담자는 163으로 증가되었으며,거주 불명자 또한 182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이향자 사목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바도 있다. 그러나 냉담자와 거주 불명자에 대한 교회의 사목적 배려는 앞으로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으로 전망되 며,신도들의 재복음화를 위한 노력을 체계적으로 전개해야 함을 요청받고 있다.

한편,’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중산층화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4) '80년대 한국 교회 신자들의 평균적인 지적 수준은 한국인의 그것보다 대단히 높으며,신도들의 거주 지역도 대도시나 그 인근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그들의 직업을 살펴볼 때 전문직 · 관리직 종사자들이 전체 신도의 18% 내외로 추정되어 전국 평균치인 2.2%를 월등히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 가족의 월 평균 수입도 한국 가구의 평균 소득액보다 10만원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이 보다 풍부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한국 교회가 중산층 중심의 종교로 변화됨으로써 하류 계층이 교회로부터 소외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5) 그러나 교회가 특정 계층에 의해 독점된다면, 교회가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구원에 대한 사명은 결코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중산층에 안주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추구해 나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1980년도 한국 교회의 본당 수는 589개소였지만 1989년도에 이르러서 776개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본당당 평균 신도 수는 1980년도의 2,237명에서부터 1989년 도에는 3,367명으로 증가했다. 본당 내 신도 수는 도시와 농촌에 따라서 큰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며,한 도시 안에서도 그 규모에 있어서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대도시에는 신도 수가 1만 명이 넘는 거대 본당들이 속속 나타나게 되었고,이와는 반대로 농어촌의 교구나 본당에서는 신도수가 감소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한국 교회의 본당당 평균 신도 수가 3,367명으로 급증하게 된 것은 80년대의 본당 증가율(3.04%)이 신도 증가율(7.54%)을 따라잡지 못한 당연한 결과이기 도하다. 그러나 본당당 평균 신도 수의 증가는 본당 사목에 있어서 새로운 많은 문제들을 제기해 주게 되었다.

요컨대,'80년대의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교회 성장의 이면에는 직접 선교에 대한 열의가 미흡했고,냉담자와 거주 불명자의 증가로 인해 교회 성장의 내실을 기할 수가 없었음을 지적하게 된다. 또한 교회 구성원의 중산층화로 말미암아 중산층 이외의 계층에 대 한 선교가 새로운 과제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당의 거대화로 말미암아 신도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Pastord Service) 문제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90년대 한국 교회의 과제는 교회 성장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해 나가면서 복음화의 질을 높이는 데에 있는 것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III. 1980대의 성직자

1980년대 한국 교회는 신도 증가율에 있어서 높은 기록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함께 교회의 전문 인력인 성직자들의 증가율도 '80년대의 경우 연평균 4. 55%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성직자 증가율은 세계 교회적 입장에서 볼 때에 는 매우 높은 것으로 파악해 줄 수 있다 하더라도,연평균 신도 증가율 7,54% 에는 월등히 미달되는 상황이다. 그러나,성직자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하여, 1980년 당시 모두 1,166명에 이르렀던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이 1989년에 와서는 1,626명으로 증가했다. 이를 1945년 해방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직자의 총수가 238명이었음과 비교해 보면 한국 교회는 성직자의 수에 있어서 도 크게 성장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해방 당시 한국인 신부는 136명이고 외국인 선교사는 102명에 이르러 한국 교회의 전체 성직자 중 한국인 신부의 점유비(占有比)는 57.14%였다. 그러나 1980년에는 한국인 신부 대 외국인 신부의 숫자가 901명 : 246명으로 나타나며,한국 교회의 전체 성직자 중 한국인 신부의 점유비는 78,55%에 이르렀다. 그리고 1989년도에는 그 숫자가 1,383명 : 221명이며,한국인 신부의 점유비도 86,22%로 증가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들을〔표3〕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표3>

[표3]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80년대의 한국 교회의 성직자 중 한국인 신부의 점유비는 꾸준히 향상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80년대에 걸쳐 여전히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상당히 의존하고 있던 실정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한편, 해방 당시에 전국에는 5개의 대목구(서울, 대구, 평양,함흥,연길)가 있었는데 이 중3개의 대목구가 외국인 감목대리에 의해 관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1957년도 남한에는 8개의 감목대리구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4명의 외국인 감 목대리가 사목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모두 14개의 교구가 있었고 이 교구의 교구장 주교들 가운데 3명은 외국인이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에 외국인 선교사가 계속 활동하고 있으며, 외국인 교구장 주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교회의 전문적 인력면에 있어서 '토착화'의 여지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음을 뜻한다.6)

한국 천주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신부들이 드러내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 대부분이 교구 사제라는 점이다. 1989년의 경우 전체 한국인 신부 중 93,35%가 교구 신부로 되어 있으며, 이 비율은 ’80년대 전기간에 걸쳐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외국 교회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한국 교회로서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전체 신부 중 교구 신부가 차지하는 비율은 우리의 인근인 일본 교회의 경우 15.15%, 대만 교회는 28. 96%, 필리핀 교회는 42,99%이다. 유럽 교회의 경우 프랑스 교회는 전체 신부 가운데 교구 신부가 78.57%, 아일랜드 교회는 61.1-5%, 서독 교회가 70.79%에 이른다.7) 이와 같은 나라의 교구 사제 점유비와 우리나라의 경우를 비교해 보. 면 한국 교회는 아시아 지역의 몇몇 다른 나라 교회들에 비하면 교구사제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고,유럽 지역의 교회에 비하더라도 교수 사제가 전체 사제에서 점유하고 있는 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 교회 전체가 수도회 소속 사제의 양성을 위해서도 좀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980년도 한국 교회는 성직자 1인당 신도 수가 1,133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1989년도에 이르러 성직자 1인당 신도의 숫자는 1,607명으로 증가되었다. 한국 교회의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위해 세계 교회에 있어서 성직자 1인당 신도의 숫자를 산정하여 도표화하면 다음[표4]와 같다.

<표4>

이〔표4〕를 통해 비교해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 교회의 성직자 1인당 신도의 비율은 유럽의 아일랜드(635명), 스페인(1,148명)이나 프랑스(1,2이명) 및 미국(891명)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내지는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와 비교해 볼 때 한국 교회에 있어서 신부 1인당 신도의 비율은 매우 양호한 편이다. 그리고 1982년도 아시아 지역의 필리핀 교회가 신부 1인당 8,640명의 신도로 나타나고 있음을 감안해 볼 때 1980년대 한국 교회의 상황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복음화의 추진을 위해서는 신부 1인당 신도들의 비율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율이 복음화의 정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볼 수만은 없다. 예를 들면 아시아 지역의 일본(213명)이나 대만(398명)의 경우처럼 신부 1인당 신도의 비율은 현저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복음화 내지 교회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저조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동시에 아시아 지역에서의 복음화에는 성직자 개개인의 노력 못지않게 이 지역의 역사적 조건과 문화 전통이 작용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의 한국 교회에서는 성직자의 부족을 자주 호소해 왔다. 이와 같은 호소는 실제 사목상에서 직면하게 된 어려움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그 어려움은 제3세계 지역의 다른 나라 교회와 비교해 볼 때 어려움의 강도(强度)가 상당히 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한국 교회는 성직자의 상대적 부족으로 인한 자신의 어려움을 성직자의 증가를 통해서만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평신도의 양성을 시도하는 등 다른 합리적 방안들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요컨대,1980년대 한국 교회에서는 한국인 성직자들이 비교적 빠른 속도로 증가되어 갔다.이 시기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 가운데 한국인 신부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높아져 1989년도에는 86.22%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여전히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또한 이 시기의 한국인 성직자의 주류는 교구 사제들이었다. 한국 교회는 다른 어느 지역의 교회보다도 교구 사제들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한국인 성직자 1인당 신도 수는 전세계 교회의 평균치인.1,960명보다 월등히 적은 것이었다. ’80년대 한국 교회의 성직자에 대한 간단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와 같은 결과를 확인하게 되었 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의 한국 교회는 교회의 전문적 인력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해야 함을 확인했다. 또한 수도회 사제들의 양성을 위한 방안 모색이 요청되고 있으며,사제의 상대적 부족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이 전개되어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IV. 1980년대의 성직자 양성

흔히들 한국 교회의 미래는 성직자 양성에 달려 있다고 한다. 비록 이 말에는 성직자 중심적인 교회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는 하더라도, 하느님의 백성들 가운데 성직자가 차지하고 있는 고유한 위치를 감안할 때 결코 지나친 말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의 성직자 양성에 관한 문제는 20년, 30년 후와 한국 교회사 형성에 중차대한 영향을 주는 문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80년대 교회의 제반 사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성직자 양성 내지는 신학교 교육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게 된다.

'80년대 이전 한국 교회에는 가톨릭대학 신학부와 대건신학대학(광주 가톨릭 대학의 전신)이 있었고 이곳에서 성직자를 양성해 나갔다. 또한 서울의 성신중·고등학교에서는 소신학교 과정의 교육을 실시했다. 그런데 1982년부터 대구에서 선목신학대학(대구 가톨릭대학의 전신)이 개교했고, 1983년에는 수원 가톨릭대학이 설치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8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한국 교회는 사제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 기관으로 4개의 신학대학을 갖게 된 것이다. 한편 1983년 2월에는 오랜 전통을 가진 소신학교인 성신 고등학교를 폐교함으로써 한국 교회는 대신학교 교육 과정만을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80년대 한국 교회에서는 비교적 높은 사제 지망률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1980년 당시 528명에 이르렀던 대신학생 수는 1989년에 1,483명으로 증가하여,10년 동안 무려 2,81배가 늘어났고 연평균 증가율도 12.55%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신학생 증가율은 신도증가율(7,54%)을 상회하는 것으로서,미래 한국 교회의 성장과 한국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고무적 현상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들을〔표5〕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 5>

1983년 말을 기준으로 할 때,교황청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신자 대신 학생의 비율에 있어서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8) 신도 100만 명당 신학생의 숫자가 1980년도에는 400명으로 집계되었지만, 1989년도에 이르러서는 568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이 증가의 추세는 '80년대 전기간에 걸쳐 꾸준히 상승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80년대 거의 전기간에 걸쳐 한국 교회는 신자 대 신학생의 비율에 있어서 세계 교회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유지해 나갔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사제 양성 분야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바람직한 현상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즉, 단순히 사제 지망자의 숫자만 나타내는 그 양적 측면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비율을 유지했다 하더라도, 사제 양성의 구체적 내용, 즉 그 질적 측면을 검토해 볼 때 적지 않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고등교육 기관의 질적 측면을 검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적용될수 있을 것이다. 그 기준 가운데에는 교수 대 학생의 비율,교수의 자질,도서를 비롯한 학교의 실험 실습 시설, 교과 과정의 내용 등이 우선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제 양성의 질적 측면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기준들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기준에 관한 검토의 자료가 충분치 못하므로 본고에서는 우선 교수 신부 대 신학생의 비율만을 검토의 대상으로 삼아 보고자 한다. '80년대 한국 교회의 경우 교수 신부 대 신학생의 비율이 대략 1 : 20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1980년도의 그 비율은 1 : 16명이었지만 2개의 신학대학이 증설된 1983년 이후 교수 신부 대 학생의 비율은 점차 높아져 갔다. 그리하여 1987년에는 무려 1 : 22명 정도에 이르렀고 1989년에는 1 : 20 내외로 조정되었지만 그 비율은 여전히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대신학교 교수 신부의 숫자는 해당 연도의 교회 주소록에 기록된 교수 신부들을 망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학교의 행정직이나 영신 지도만을 맡고 있는 신부들도 있겠고,안식년을 맞아 학교를 떠나 있는 신부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소록의 해당란에 기록된 모든 신부들을 합산하여 계산한다 하더라도 교수 신부 대 신학생의 비율은 1 : 20 내외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율을 교수 대 신학생의 비율이 보통 1 : 5~10 정도에 이르고 있는 유럽의 신학대학교와 비교해 볼 때,1980년대 우리나라 신학 대학의 교수 신부 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교수에 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은 1 : 10 미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서울특별시에 자리 잡고 있는 주요 종합대학들 중 문과대학 혹은 인문대학의 경우에 있어서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이 1 : 12 내지는 1 : 16 정도에 이 고 있다. 이들 대학들에서는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이 높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교수 요원의 확보를 위해 그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80년대 우리나라 교회의 신학대학의 교수들은 미래의 사제에게 요구 되는 지적 교육뿐만 아니라 영성 지도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배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시간 부담은 일반 대학 교수들보다도 월등히 무거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 신부 대 신학생의 비율이 1 : 20 내외에 이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신학교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 비율은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능함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앞으로의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대학 교수의 증원,교수 요원의 확보 등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전체 한국 교회의 사제 중 4.42%에 불과한 교수 신부의 비율을 좀 더 높여야 할 것이며,이를 통해 신학대학 교육의 내실화 와 정상화를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한편, 신학대학 교육의 질적 수준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신학대학 교수에 대한 경제적 보상 방법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가 미사 예물을 비롯한 모든 수입을 공유화하고 이를 공동 분배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신학대학의 교수들은 그 경제적 보상이란 측면에서 도시 본당의 주임 신부들과 상당한 격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 고 있다. 고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학교 교수들의 연구 여건에 불비한 점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자신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의 하나로 신학교 교수들의 교수 여건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주어야 한다. 신학대학에서 교수를 담당하고 있는 사제들에게는 적어도 수도교 구의본당 신부 수준에 해당하는 경제적 배려가 보장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1980년대 한국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도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전개해 왔다. 즉, 1982년도에는 대신학교 간 상호 협력을 모색 하고 성직자 양성의 통일적 방안을 수립하기 위해 3개 신학대학 관계자들이 모여 ‘가톨릭신학대학협의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984년 7월 3일에는 "가톨릭 신학대학협의회 규약"이 제정되었다.9) 이 협의회에서는 대신학교의 교과 과정과 교과 운영 등에 관한 문제들을 논의했다.

그리고 1987년 3월 23일에는 '한국사제 양성 지침서’가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아 한국 교회의 사제 양성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고자 했다. 특히 이 지침서에서는 신학교 교육에서 지역 문화를 존중해야 함을 규정했다. 그리하여 "신학생들이 한국의 문화 유산을 이해하고,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한국인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10) 그리고 신학교의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일반 교양으로 "한국의 민속 신앙과 종교적 전통에 대하여도 깊은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동양 종교에 대한 과목을 이수할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신학교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다. 그러나 '80년대의 한국 교회의 신학교는 이러한 규정들을 단지 선언적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80년대 한국의 신학대학에서는 자국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종교와 문화에 관한 관심이 대체적으로 낮았던 것으로 생각되며,바로 이 점은 ’90년대의 한국 교회가 극복 내지는 개선해 나가야 할 과제의 하나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80년대 한국 교회의 신학대학들은 대부분 사관학교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지 깊이 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진정한 고등교육 기관으로서의 특성이 약했다. 즉,대부분의 대신학교에서는 사목자 양성에 가장 중요한 목표를 두어 왔고, 신학을 비롯한 교회 학문의 전문적 연구를 목적으로 삼지 아니한 듯하다. 이러한 전문적 연구들은 국내 신학대학에서 전개되기보다는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신학 대학 등에 의뢰하였고,최근에 이르러서는 미국이나 필리핀 등지에 있는 교회 계통의 고등교육 기관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물론, 국내의 신학대학에도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신학대학의 석사 과정 은 신학대학 연구과와 병행하여 운영됨으로써 석사 과정 고유의 기능을 발휘하는 데에는미흡한 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박사과정이 설치되었다하더라도 이를 운용하기 위한 적극적 시도가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100여 년 이상의 신학 교육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한국 사회도 일반 인문 사회 과학과 자연 과학 분야에 있어서 박사 학위 이상의 많은 고 급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보면,한국 교회의 신학대학 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고급 인력을 양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고급 인력의 양성을 외국의 학계에만 의존하는 한 한국 교회의 발전에는 한계가 뚜렷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80년대 한국 교회는 그 양적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수의 성직 지망자 들을 배출했다. 이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무척 바람직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직자 양성에 관한 질적 측면의 검토 결과는 결코 바람직한 상황만을 뜻하지는 아니한다. '80년대의 한국 교회는 교수 대 신학생의 비율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교수 요원의 양성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도 미흡한 점이 드러나며,교수들의 연구 여건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 또한 신학대학의 교육 과정 안에서 민족 문화에 관한 관심이 더욱 강화되어야 하며 대학원 교육의 정상화가 추진되어야 한다. '80년대 한국 교회가 남긴 이러한 과제들을 ’90년대의 한국 교회가 성실히 검토해 나갈 때, 21세기의 한국 교회에서는 희망과 활력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V. 1980년대 수도회와 수도자

’80년대 한국 사회에 있어서 천주교에 대해 연상한 단어들을 조사했을 때, 조사 대상이 된 비신자 중 14.10%의 사람들은 천주교라는 단어에서 수녀들을 연상해 냈다. 이 비율은 종교의 신앙 대상, 종교적 상징, 종교 인식, 종교의 사회 적 기능에 관한 각종의 연상 내용 중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것이다.11) 그리 고 이와 같은 사실은 수도자인 수녀들의 존재가 일반 비신도들에게 그만큼 큰 인상을 주었음을 말한다. 한편,수도자는 성직자, 신도와 함께 하느님 백성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한국 문화의 복음화와 한국 교회의 성장을 위해 적지 않게 기여해 오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80년대 한국 교회 에 대한 검토 작업의 일환으로 수도회와 수도자들에 관한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도 한국 교회에서는 20개의 남자 수도 단체와 37개의 여자 수도 단체가 있었다. 그리고 1989년도에 이르러서는 남자 수도회가 30개로 늘어 10년간에 걸쳐 50%의 성장률을 드러내 주었다. 반면에 여자 수도 단체들은 64개로 늘어 73%의 성장률을 드러냄으로써,이 기간 동안 남자 수도 단체보다 여자 수도 단 체들의 한국 진출내지는 창설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특성들을〔표6〕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표6>

이 표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80년대의 한국 수도 단체들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수도회의 성장 속도는 1953년 한국 전쟁의 휴전 이후 여러 수도회들이 한국에 활발히 진출하던 때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

그런데 1980년대 한국 교회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수도 단체 수는 1989년을 기준으로 할 때 30 : 64 즉 1 : 2 정도의 비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 단체를 구성하는 회원 수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양자 간에 드러나고 있다. 즉, 수도회 신부 및 수사들은 513명인 데 반하여 수녀들의 총수는 5,616명에 이르러/ 남자 수도자는 전체 수도자의 8.37%에 지나지 아니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1989년도의 경우 남자 수도 단체의 경우 평균 17.16명의 회원이 있는 반면, 여자 수도 단체들은 87,95명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 수도 단체들이 그 규모면에 있어서 남자 수도 단체보다 월등히 큼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여자 수도 단체들의 경우에는 회원수가 733명에 이르는 규모가 큰 수도회가 있는 반면, 단 1명의 희원만이 있는 수도회도 있어서 수도 단체의 평균 희원 수를 산정하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평균 회원 수의 비교를 통하여 남녀 수도회 간의 규모를 대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89년도 남자 수도회에 있어서 수도 신부의 경우 한국인 신부는84명이고 외국인 신부는 88명으로 집계되고 있어, 이 두 집단의 숫자가 거의 비슷하였다. 그리고 수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한국인 수사가 313명, 외국인수사가 28명으로 한국인 수사의 점유비(占有比)가 전체 수사 중 91.79%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수사 신부와 수사를 모두 합하여 검토해 보면 한국인 수도자는 397명이고,외국인 수도자는 116명이다. 이는 한국인 남자 수도자의 점유비가 전체 남자 수도자의 77.39%에 이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치(數置)룰 한국인 교구 신부 대 외국인 전교회 소속 신부들의 숫자와 비교해 보면 그 특성이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즉 한국인 교구 신부들과 외국인 전교회 소속 신부들은 대체 적으로 90.92%:9.08%의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80년대 한국교회에 있어서 교구 사목 분야는 한국인 신부들이 절대적인 기여를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남자 수도회의 경우한국인 대 외국인의 비율은 77.39% :22.61%로 나타나서 외국인 수도자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수도회 소속 신부의 경우 한국인 대 외국인 비율은 48.84% :51.16%로 외국인 수도 신부의 비율이 오히려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발전 도상에 놓여 있는 한국의 남자 수도회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일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 수도 단체들이 외국에서 진출한 것이므로 수도자에서 외국인이 점유하고 있는 비율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수도 생활 자체는 인종이나 민족의 범위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진 것이므로 수도 단체에서 굳이 한국인과 외국인의 존재를 구별하려는 것도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전문적 인력의 토착화가 우선적으로 중요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 과 한국 교회의 영성을 풍요롭게 해줄 수도회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전문 인력의 토착화를 위해 배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한편 여자 수도 단체들의 경우 '80년대에 이르러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수녀의 숫자가 1980년에는 3,169명이었으나,1989년에 이르러서는 5,616 명으로 급성장했다. 그리하여 1989년에는 수녀 1인당 신도의 비율이 465명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수녀 대 신도의 비율을 1982년의 세계 교회 사례와 비교해 보 면 다음의〔표7〕과 같다.

<표 7>

이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국 교회는 수녀 1인당 신도 수에 있어서 북아메리카나 대양주 및 유럽보다는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지만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는 상당히 양호한 상황임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교회의 수녀회는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일본 · 대만 · 인도 등의 신도수 대 수녀의 비율보다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보다는 월등히 좋은 조건 아래 놓여 있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 인식에 입각하여 국내의 일부 수녀회에서는 아프리카 지역 내지는 그 밖의 여타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 선교 수녀를 파견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편, ’80년대 한국 교회에서 수도자 성소 특히 수녀 성소의 지원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는 수도자 내지 수녀들에게 전문적인 교육을 시행할 고등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본격적인 검토가 요청되는 단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수녀들을 위한 교육의 문호가 4개 신학대학에서 폐쇄 된 것도 아니고, 수도자 영성 신학원도 설치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정식 학사 자격증을 인정해 주는 수도자들을 위한 고등교육 기관의 존재가 바람직 할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마도 1990년대 한국 교회에서 짚고 넘어가야 될 여러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1980년대 한국교회의 수도회들은 비교적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수도 단체의 발전은 대부분 수녀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때 에도 남자 수도회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수도회에서는 전문적 인력과 재정의 토착화를 위해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며, 수도자의 양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전문적 교육 기관의 설치 문제가 검토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 수녀회의 경우 타 지역의 교회에서보다 수도자 대 신도의 비율이 양호한 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을 감안할 때 각 수도회의 설립 목적 여하에 따라서는 외국의 교회를 돕기 위해 선교사 수녀를 파견하는 문제 등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VI. 맺음말

우리는 이상에서 1980년대 한국 교회가 드러내 주고 있던 일부 특징들을 성직자 · 수도자 · 신도들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통해 파악해 보고자 시도했다. 그 결과 이 시기의 한국 교회는 그 양적 측면에 있어서 각 방면에 걸쳐 지대한 성장을 이륙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즉, ’80년대 한국 교회의 신도 증가율은 ’60년대 내지는 '70년대보다도 더 높은 것이었다. 그리고 성직자나 수도자의 숫자도 상당히 증가했으며, 성직 지망자들도 계속 늘어갔다. 이러한 양적인 증가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매우 고무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양적 성장의 그늘에서 한국 교회는 질적 성숙을 성취해 야 될 과제를 발견하게 된다. 즉, 늘어나는 신도에도 불구하고 냉담자와 거주 불명자들이 또한 증가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사제 양성 교육에 관해서도 일부의 문제점들이 지적될 수 있었고, 수도자의 양성을 위해서도 새로운 방안들이 모색 되어야 함을 확인해 보았다. '80년대의 한국 교회가 제시한 질적 성숙에의 과제는 '90년대 한국 교회와 21세기의 교회를 위해서 반드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80년대 한국 교회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위해서는 이번의 글과 같이 성직자. 수도자. 신도의 특성 파악이라는 측면과 함께 그들이 표출한 구체적 신앙 과 삶에 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80년대 교회사에서 드러나는 일반적 특성이 무엇인지를 '80년대의 각종 교회사적 사건에 근거하여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화를 위한 구체적 노력들과 관련하여 '80년대의 선교 방법과 그 성과에 대한 평가,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구현을 위한 한국 교회의 노력 여부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복음화를 추진해 보려 노력했던 '80년대의 한국 교회의 구체적 모습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시도해야 한다.

본고에서 시도한 성직자, 수도자, 신도를 중심으로 한 1980년대의 이해는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화를 위한 한국 교회의 구체적 노력을 평가, 검증하기 위한 전제적 작업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80년대 한국 교회사의 위와 같은 측면에 관한 정리 작업은 다음 호로 미루며 본고의 견해에 대한 바로잡음을 부탁드린다.

1) 현대의 복음선교,18.19항 참조.

2) 조광,「한국천주교회사」(Π). 크리스찬출판사, 1990,76면 참조.

3) 노길명, 오경환 공저,「가톨릭 신자의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 가톨릭신문사, 1988, 22면.

4) 위의 책, 19ㅡ21면.

5) 위의 책,21면.

6) 오경환,해방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성찰과 전망,「1945년 이후 한국 종교의 성찰과 전망」,민족문화사, 155면 참조.

7) 이상의 점유비는 Annarium Statisticum Ecclesiae 1982년판을 근거로 하여 산정한 것이다. 이하 세계 교회에 관한 통계 자료도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경우에는 이 자료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 둔다.

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보,26호(1984.,12),32면.

9) 위의 책,23면.

10) 위 회보, 41호(1987.5),15면.

11)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위원회,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사회조사보고서, 1984, 2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