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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의 말씀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연중 제27주일 : 10월 7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이사5,1-7):이사야예언서의 유명한 ...

제 2권 제 2편 제 2부 개별 교회와 그 연합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제1절 개별 교회 3. 성직자치구와 자치수도원구 제370조 : 성직자치구와 자치수도원구는 특수한 ...

주간 부활 축일인 주일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기뻐하며 즐거워하자,(시편 117,24). 그리스도교는 성서와 교회 전승을 바...

성서와 새로운 복음화
1990년 10월호 (제 141호)
*본고의 내용은 제4차 세계성서사도직협회 총회에서 브라질의 기초공동체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

나의 고백
1990년 10월호 (제 141호)
강영훈 국무총리는 평북 창성군 청산면 출신으로 만주 건국대학교와 미국 육군 참모대학을 수료하고 미국...

멕여서 보내자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여중 시절 필독서를 정해준 선생님이 계셨다. 강제성을 띤 건 아니었지만 문학 소녀였던지라 그 기회에 ...

선교사가 본 한국 교회의 실상
1990년 10월호 (제 141호)
대 담 : 반예문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홍콩난민선교) 김정수(사목주간·신부) 일 시 : 1990년 8월 1...

가톨릭의 종교 개혁
1990년 10월호 (제 141호)
I.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의 집중 폭우 프로테스탄트는 종교 개혁이란 개신교의 배타적인 독점물처럼 ...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반성 - 성직자, 수도자, 신도의 특성
1990년 10월호 (제 141호)
I. 머리말 역사학은 어느 시대를 연구하는가? 그 연구의 범위 안에 역사 연구자 자신이 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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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만남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원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장)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의 생각을 점검하는 위치를 제공하련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같은 의견보다는 서로 보완하면서도 대치되는 다른 의견을 가진 이웃을 만나려 한다. 그런 일의 기준은 세계적으로 양분된 정치 상황에서 출발 되겠으나 그 바탕에는 철학적 역사 발전의 근저에 그런 논리가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내부에서도 자기 자신의 긍정, 부정의 긴장 관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느끼며 사는 오늘의 현실에서「사목」은 우리가 겪는 한계와 정반 (正反), 긍정 부정의 자기 상황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려고 고심하는 분들을 위하 여 "우리의 만남”을 시작한다.

60대의 시각

이원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장)

1.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급격한 교세 신장으로 세계 가톨릭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또한 국내에서도 다른 어느 종교보다 생동하는 교회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전인구 중 49%가 종교인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7% 가 천주교인이라 한다. 아직 전국민 가운데 천주교인의 점유 비율은 크다고 할 수 없으나 최근 10년 간 천주교세의 신장률이 매우 놀라와 1980년도 말 132만 명의 교인이 오늘날 260만 명에 육박하고 있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한국갤럽 조사연구소의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 조사,자료).

이처럼 급속하게 교세가 신장되고 많은 교회가 늘어난 사실을 사회적으로 의미지어 본다면 각박한 세상에 사랑과 정의를 심어 줄 복음의 씨앗의 살포라 할 것이다. 그 복음의 씨앗은 작은 누룩이 빵을 한껏 부풀려 주듯이 사회에 애(愛)와 의(義)를 충만케 할 가치 인소의 살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선(善)’과 ‘애(愛)’를 지향하는 신앙인이 전국민의 반이나 된다면서도 범죄는 날로 창궐하고 인간은 매일 파괴되기만 하고 있다. 이런 역리(逆理)의 슬픈 현실 가운데 교회는 과연 어떠한 존재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2. 그리스도의 ‘선(善)'과 ‘의議)' 그리고 '애(愛)'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맹세하고 교인이 된 그리스도 형제들의 신앙 공동체인 한국 교회는 다른 어느 교인 조직보다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희생과 봉헌을 마다하지 않은 교회로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인식되고 있다. 세속과 육신과 자아를 끊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직자와 수도자에 의하여 실천되고 있는 성직과 수도 생활과 그들의 사회 봉사는 가톨릭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더해주고 있으며, 각종 액션 단체를 통한 신도들의 일치와 사랑의 나눔의 활동도 다른 어느 교단보다도 다양하고 활발하며 값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사랑의 실천 활동은 매우 다채롭고 또한 희생적이어서 감격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아직도 그리스도에 아픔을 안겨 주고 교회를 손상케 하는 지체도 없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인 용서와 화해를 저버리고 증오와 분열을 키우고 회개와 사랑을 요구한다면서 독선과 미움을 조장하는 지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믿음의 형제 -성직자, 수도자,평신도- 모두가 혼탁과 분열과 이기의 사악이 범람하는 현실 사회에서 자기 신앙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진정한 사회의 소금으로 작용하는 한국 천주교회가 되어야 그의 존재 의의는 더할 것이다.

3.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보편과 개별의 가치를 조화 있게 추구하기에 노력하는 교회로 인식되고 있다. 급속히 신장하는 교세는 주로 젊은이와 지식층의 입교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노쇠의 교회가 아니라 젊음의 교회요, 활발한 액션 운동으로 쇠락의 교회가 아니라 생동하는 교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비록 천주교회는 예전 중심이고 성직자 영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라 할 것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한국 천주교회는 젊음의 새로움과 민족 복음의 교회로,평신도 액션 운동이 다른 어느 교단보다도 활발한 교회 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간의 존엄 그리고 구령의 가르침의 보편적 원칙은 고수하면서 민족과 더불어,사회와 더불어 살며 그리스도적 평화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기여하고 있다. 인류의 아픔을 사랑으로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적 보편과 민족의 문제에 파고드는 민족적 개별의 조화로운 새 역사를 추구하는 교회로 인식되고 있다. 이 인식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현격하게 간극이 벌어져 있는 도, 농간의 사랑의 나눔과 빈부간의 일치의 노력,그리고 가난과 불의의 고난을 같이 나누고자 하는 그리스도적 사랑과 회개와 화해에 대한 일치의 실천이 더욱 촉진되어야 한다. 자기 구령 위 주의 자기 본당만을 의식하는 이기적이고 소승적인 신앙인을 사회 복음적 신앙,민족 복음적 실천으로 승화시켜야 그 존재 의의를 더할 것이다.

50대의 시각

이정호 (작가)

신앙인에 대하여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특히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신앙에 혐오를 느끼게 하였다. 자나 깨나 중얼거리면서 지나친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 외인에게는 양심이나 이성도 없는 것으로 아는 광신도가 아니면 세속적인 욕망, 편협, 이기, 교만 같은 것을 노출시켜 가며 살다가 교회에 가서야 뉘우치고 참회하는 생활을 되풀이하는 신앙인, 그런 신자라면 겸손하게 바르게 살아가는 외인과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겸허하게 산다면 신앙인이 아니라도 충분히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톨릭에 입교한 것은 교리나 성경에 매료된 것이 아니었고 다만 나이가 들면서 막연한 갈망이 있어서였다. 아직도 일천하여 종교를 말하기는 외람되나 두 가지 깨달음으로 이전의 주장이 오류였음을 웅변으로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이라야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그 하나는 매사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의 평화, 즉 이웃과 더불어 이룩하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만이 질서를 지키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자기 만족,이웃을 외면한 자긍심의 충족은 일종의 이기요 교만이었다. 이웃을 도외시한 평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가톨릭이야말로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회의하게 된다.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냉랭하고 차갑다. 낯선 교우에게 다가가서 덥석 손을 잡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눈을 내리깔고 근엄한 표정을 한다. 하느님 전당에서의 숙연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로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을 생각하는 고루한 아집이 저변에 있지 않는가 싶다. 미사 중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하는 절차가 있는 것부터가 우리가 얼마나 인사를 나누기에 인색한가 하는 증거이다. 웃으며 인사를 나누지만 과연 마음을 열고 이웃을 받아들였는지 의문이다.

본당에는 크고 작은 단체가 있다. 각 단체 간의 화합이나 유기적인 관계에도 문제가 있다. 오로지 나의 단체의 유익에만 몰두하고 남의 단체나 속성이 애매한 일에는 꽁무니를 뺀다. 이웃의 의미가 교회 안에서도 너무 편협하다.

교회 차원에서 생각할 때 공동체의 개념은 더욱 심각하다. 우리의 공동체는 오로지 교회인가? 교회 안에서의 평화,그것이 평화인가? 성직자들의 사목의 대상은 다만 신도에 국한되어 있는가?

교회가 사회 구성의 하나이고 보면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교회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사회, 국가, 민족 그리고 인류에로 공동체 의식은 확산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인류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교회에서 신도들의 영혼을 구원에로 인도한다 하더라도 교회가 처한 사회적 현실이 복음과는 거리가 멀게 부패하고 있다면 돌밭에 씨를 뿌리는 결과 가 되지 않을까.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항거한 필리핀 교회와 신도들의 모습을 상기할 때, 통 일 독일을 부르짖는 촛불 행렬의 도도한 물결을 보았을 때, 한국 가톨릭은 민족 의 염원인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오염,자연 훼손,청소년 범죄, 마약문제, 음란비디오 범람 등등, 가공스러운 문제 등을 직사하면서 우리 가톨릭의 미약한 반응에 목마름을 느낀다.

여신도의 권위와 자질 향상을 위한 교회 차원의 혁신적인 노력을 요청하고 싶다. 어느 본당이고 여신도가 80%는 차지하고 있다. 가정의 평화와 사회 정화에 여성(어머니와 아내)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볼 때 교회 활성화 운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내가 나가고 있는 본당은 사목회 부회장 3명 중에 한 사람은 여 성이다. 여성 위원회가 있어서 미력이나마 여신도의 교양과 자질 향상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교구 여성 연합회 모임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사목협의회에 여성 위원이 한 사람도 없는 본당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교회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이다. 여신도의 권위 신장에는 의무의 이행과 여신도 자체의 능력 향상이 병행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바야흐로 조국 통일을 향하여 민족적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오늘의 현실에 교회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제시해야 한다.

250만 신도 모두가 변하지 않는 소금이 되고 등경 위의 빛이 되는 것은 7천만 민족 가운데서 더욱 빛나고 가치가 있다. 신도 모두가 개인 신심 생활에 안주하지 말고 선교의 주체 의식을 가지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교회는 그 방안을 제시하고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언제? 바로 지금이다.

40대의 시각

김윤수 (전남대학교 임상가공학과 교수)

1.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주교단을 비롯한 성직자만을 위해서나 교회 자체를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영세받은 사람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 교회가 위해야 할 사람은 특히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 늙고 병든 사람들,사회에서 버림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영세받는 신자 위주였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일단은 교회의 관심 밖의 사람들이 되었다.

교회는 지상의 나그네일 뿐 결코 지상의 주인은 아니다. 언제고 떠나야 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지상의 나그네들이다. 그러나 오늘 지상의 교회는 천년 만년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처럼 높아지고 넓어진다. 국민 소득 5천 달러 시대여서인지. 교회는 겉모습부터 깔끔해지고 화려해지고 기름기가 흐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기에는 어딘가 어색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성가대의 수준 높은 노래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더 이상 따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가난한 교회,겸손한 교회,고난과 함께하는 교회는 순교 시대에서나 있었던 것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교회의 중산층화가 우리 주위의 슬픔과 고통에 눈감아 버리고 개인의 화평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촉진시키지 않을는지 두려워질 정도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 이웃에서 믿지 않는 사람은 제외시키고 있다. 천주교회에 다니는 사람만이 이웃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적아 우리의 벗이라고 배웠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우리와 생각을 달리한 사람 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이 아니라 없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 하게 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 되었고, 신자로서 고려해야 할 대상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가톨릭의 위상의 정립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소서”의 그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 재조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있다. 소금과 빛으로서 말이다. 교회는 따라서 정치권력에 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사회 정의가 무너질 때 예언자적 사명 을 수행한다. 인간의 영신적 세속적 선익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증언하기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력과 권력이 우상화된 이 세상에 대해 "그래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자칫 교회만을 생각하고 인간을 망각하곤 했다. 나치 독일의 횡포 앞에 독일 천주교회는 교회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지 않았다. 가스실에서 숨져 간 6백만 유태인들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가톨릭 신자만을 인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증언해야 할 그 순간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 어디 독일 교회뿐이겠는가? 일본의 식민 통치 시대부터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천주교회가 정치 권력에 보여 주었던 것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라는 지적이 교회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교회가 지배 권력 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된 적도 있었고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정의가 문제시되는 상황인데도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리곤 했다. 가능한 한 '우리신자들’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사태를 조용히 넘겨 보자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순교 시대와 너무도 큰 희생에 대한 자기 보존이라는 반사적 본능 행위 때문에 그리 됐는지 알 수 없지만, 현실 문제에 대한 교회의 침묵은 우리 교회의 앞길을 위해서 곱씹어 볼 수밖에 없다. 현실적 고민과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어린 학생들에게 추상적인 단어로 현실을 문법화시키는 교장 선생님의 훈사 같은 주교회의 메시지가 과연 어떤 의미로 우리 역사에 각인되었는지를 되씹어 보아야 한다.

3. 믿음은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보다 옳고, 보다 아름답고,보다 하느님다운 것을 부단히 선택하는 행위이자 결단이다. 그것이 결단일진대 믿음은 곧 아픔일 수밖에 없다.’그것은 현세에서 가장 사랑했던 것, 아름다웠던 것,가장 따뜻했던 것에서 벗어나 더러는 차가움 속으로, 미움과 질시 세계 속으로, 때로는 죽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선열들은 그 믿음이라는 결단 때문에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실을 역사는 가르쳐 주고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이 믿음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새롭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열린 상태에서만 보수성과 관료주의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지금까지의 태도 역시 이런 점에서 철저한 자기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열린 상태에서만이 교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개인적인 졸견이겠지만 교황 선출에 모든 추기경들이 참여하듯 주교의 선출에도 교구의 모든 신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인지.

30대의 시각

최경욱 (시흥동천주교회 신자)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한국의 현실 상황에서 왜 필요하며, 그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많은 견해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존재 이유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사명과 과연 한국 천주교회가 이에 충실한가에 대한 언급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교회의 사명을 밝히고 있다. "성신 의 도우심을 받아 현대 세계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별하며 해석하고 복음의 빛으로 판단함으로써 계시된 진리가 항상 더욱 깊이 알려지고 더 잘 이해되며 더욱 적절히 표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무이다" (사목헌장44항), 또한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사목 헌장4항)라고 하여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의 사명을 밝힘으로써 그 존재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시대의 요구 속에서 설 자리를 찾아야 하며 시대의 희망을 밝혀 줄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상황 속에서 요청되고 있는 시대의 요구는 무엇이며, 민족과 국민 대다수의 염원은 무엇인가? 이것을 밝혀내고 그 속에서 희망의 빛을 제시 할 때 교회의 참된 존재 이유를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종교가 우리에게 가장 소망스럽게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즉,각각의 시대 상황에서 제기되는 인류의 요구 앞에 참다운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 때 교회의 자기 존재 이유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교회의 존립 이유라 할 수 있다.

필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이 땅, 이 민족에게 요구되는 존재의 근거를 다음의 세 가지로 제시하려 한다.

첫째, 불의한 정치 권력과 사회 구조 속에서 대다수 국민이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위해서 사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의 빛을 제시함이 그 존재 이유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근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증거이며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이것은 모순과 불의, 부조리한 사회 현실의 구조 상황을 압축한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으나 그것은 영원한 생명,부활의 첫 신호였기 때문이다. 둘째, 외세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예속은 민족적 자주권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에집트의 폭정 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시며 마침내 해방시키고,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출애굽’을 염원하고 있으며,출애굽 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해방과 구원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러한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무한한 이상,하느님의 초월적 이상을 추구하며 실현하기 위해 하루하루 결단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셋째,이 나라,이 민족은 분열된 상태를 극복하고 통일에의 길을 간절히 염원 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조국이 분단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은 상호 불신 때문에,형제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다는 신념이 없기 때문에 분열된 세계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우리는 예수의 “아버지,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 하는 간절한 기도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로마9,3) 하신 사도 바오로의 신앙 고백처럼 교회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고 이를 구원하는 데에,다시 말해서 민족의 지상 과제인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의 성취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사 속에 교회가 설 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민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차원으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의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하며 이를 위해 먼저 우리 자신, 우리 교회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 하고 싶다.

우선 우리 교회는 제도적 요소가 공동체적 요소를 압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제도상으로만 이해됨에 따라 기계화되고 소외된 불평등과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이는 교회 조직 자체의 봉건적 요소가 한국에 전파되면서 유교적 사회 질서와 굳게 결합하였기 때문이다. 교계 제도에 의해서 통제되고 그 하위자들은 규범을 잘 지키고 관행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하루하루 쇄신되어야 할 우리의 신앙을 박제화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도로서의 교회를 만드시지 않았다. 교회는 진정 성령이 살아 숨쉬는 열려진 곳이어야 하며 그 안에서 우리의 참 신앙 고백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우리의 삶 자체 그리고 현실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성실히 살려는 노력과 다짐 그리고 둘째로 가난의 영성에 입각한,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우리 교회는 지난 80년 이후 물적 양적으로 엄청난 성장 을 이룩하여 세계 교회로부터도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의 뒷면에 얼마나 우리 신앙의 내용이 풍부해졌는가를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중산층화 되었다고 모두들 걱정한다. 잘살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전체 우리 국민의 중산층화의 영향은 있겠지만 최소한 국민의 평균치에 부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산층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무엇을 말 해주는 것일까? 진정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매일 매일의 결단의 삶이 우리 신도들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이 민족 앞에 거듭나야 한다. 우리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도 어언 200여 년이 흘렀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사를 엄숙히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박해 시대의 우리 선조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러 나 찬란한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뜻은 제대로 우리의 전통 안에 자리잡고 있다 고 보기 힘들 것이다. 일제의 강점기에 실천 신앙의 모범이었던 안중근(도마) 형제를 살인죄로 단죄하고 종부성사마저도 거부한 것이 우리 교회 아니었던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제대로 대항 한번 했던가? 더욱이 일제의 침략 전쟁 말기 황군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성당의 종을 떼어 바친 적은 없는가? 또 해 방 이후는 어떠했던가? 점령군의 밀가루로 신자를 양성하며 그와 결탁한 적은 없는가? 갈라진 내 형제를 증오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는가? 냉정히 반성해야 할 때이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곳, 아픈 곳을 내보여야 한다. 그러한 진실된 용기 없이 거듭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거듭남에의 노력, 매일 매일의 결단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염원에 부응하고 화망의 빛을 제시할 수 있을 때,진정 한국 천주교회는 구원과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온전히 구현할 수 있을 것 이다.

20대의 시각 정민섭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3학년)

1. 가톨릭 학생회를 하면서 겪었던 일을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다.

해마다,그 많은 서클 중에서,가톨릭 학생회를 찾는 신입생들은 대충 두 부류로 나누면 될 듯하다. 하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들어오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신앙에 대한 회의 때문에 참 신앙이란 무엇인가 알고자 들어오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들이 여름 방학만 되면 하나 둘 하는 말이 있다. "저 성당 나가기 싫어요.” "왜?” "나가면 더 답답하기만 해요.” 왜 이런 결과를 빚는 것일까? 가톨릭 학생회가 반(反) 신앙 단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출애굽 이후의 가나안 평등 공동체, 예수 이후의 사도 공동체, 중세의 운동들 곳곳에서 보여진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등의 공동체가 지금은 화려한 건물 이외에는, 찾아볼 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필자가 1학년이었던 1988년 5월 15일에 조성만 요셉 형제가 조국 통일을 외치며 할복자살하였다. 그 사건을 보고 당시 필자에게 고민으로 다가왔던 부분이 있었다. "왜 천주교 신자가 자살을 했을까? 교회법에 자살은 금지되어 있는데" 얼마 안되는 대학 생활을 보낸 필자는 그것에 대해 선배들에게 물어보았고 그 대답은 단지 "너도 지나면 알게 돼”였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장례 행사에 참여했는데 성당에서는 자살이라서 장례미사는 불가하고 장례 예절만 간단히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 한 육군 장성 이 자살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권력의 소외니 하면서 거창하게 소개하였고, 같은 성당에서는 정치적 자살이라는 이유로 장례미사를 드려주었다. 참 이상했다. 교회가 왜 저럴까?

2. 키에르케고르의 유명한「어릿광대와 불타는 마을」의 비유를 생각해 본다. 어느 곡마단에서 공연 중에 불이 났다. 단장은 광대에게 이웃 마을에 지원을 청 하러 보냈다. 광대는 바삐 그 마을로 뛰어가 마을 사람들에게 곡마단의 진화 작 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호소를 구경꾼을 끌어들이려는 기발한 수법으로만 생각하고 손뼉을 치면서 웃어댔고,그러는 사이에 곡마장과 마을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광대 = 교회로 놓는 것은 무례일까? 광대는 중세 이후 남을 웃기는 역할만 맡고 있었다. 만약 광대 옷을 벗고 진화 작업을 청했다면 좀더 나았을지도 모른 다. 우리는 광대(성직자,신학)를 매개로 해서,곡마장(하느님 나라,교회)에 간다. 하지만 그 광대가 하는 말들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 같다.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 믿어! 안 믿으면 지옥 가!"라고 외치기만 하는 사람들과 같이, 교회 내에서만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정의,그리스도의 왕국, 변하는 사회 에 겨우겨우 따라가며 신자들만 나무라는 교회,이런 것이 현재의 모습인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강조하는 유아 신앙을 가진 이들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고, 개인의 평화를 갈망하는 반(反) 평등 신앙인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3.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교회의 권력과 은총」에서 교회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신국(神國)으로서의 교회, 한마디로 성직자들의 교회이다. 어떤 결정도 성직자에 의하지 않고는 내려지지 않는다. 또한 정치는 오염되었다고 본다.

둘째, 어머니와 교사로서의 교회. 여기는 자선 사업을 벌인다. 부유한 이의 떡고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푼다. 하지만 결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는 못한다.

셋째, 구원의 성사로서의 교회, 과학과 세속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교육, 경제 개발, 사회 개혁 등 사회 문제에 뛰어든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을 제시할 뿐이다.

넷째,가난한 사람들로부터의 교회. 그리스도의 해방 사업의 주체인 가난한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 해방을 이루고 기초 공동체를 가꾸며 교회에 대한 인간의 도전을 인정하는 교회이다.

여기서 한국의 교회는 어디에 해당할까. 고향 성당의 신부님은 첫째 유형 같고, 영세 주신 신부님은 셋째 유형 같다. 전교조 가입 교사를 해직시키는 천주교 재단은 둘째 유형이 아닐까. 또 당면 민주 개혁에 일어나는 청년들은 넷째 유형을 지향하는 것 같다.

4. 어찌 보면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 천주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신자도 증가한다. 인간의 자아를 실현하며,복도 구할 것 같고, 나름대로 사랑이 넘치는 장소이기에 당연하리라.

하지만 명백히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말로만 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치는 자여, 가라! 사탄에게, 너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침을 뱉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