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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의 말씀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연중 제27주일 : 10월 7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이사5,1-7):이사야예언서의 유명한 ...

제 2권 제 2편 제 2부 개별 교회와 그 연합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제1절 개별 교회 3. 성직자치구와 자치수도원구 제370조 : 성직자치구와 자치수도원구는 특수한 ...

주간 부활 축일인 주일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기뻐하며 즐거워하자,(시편 117,24). 그리스도교는 성서와 교회 전승을 바...

성서와 새로운 복음화
1990년 10월호 (제 141호)
*본고의 내용은 제4차 세계성서사도직협회 총회에서 브라질의 기초공동체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

나의 고백
1990년 10월호 (제 141호)
강영훈 국무총리는 평북 창성군 청산면 출신으로 만주 건국대학교와 미국 육군 참모대학을 수료하고 미국...

멕여서 보내자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여중 시절 필독서를 정해준 선생님이 계셨다. 강제성을 띤 건 아니었지만 문학 소녀였던지라 그 기회에 ...

선교사가 본 한국 교회의 실상
1990년 10월호 (제 141호)
대 담 : 반예문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홍콩난민선교) 김정수(사목주간·신부) 일 시 : 1990년 8월 1...

가톨릭의 종교 개혁
1990년 10월호 (제 141호)
I.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의 집중 폭우 프로테스탄트는 종교 개혁이란 개신교의 배타적인 독점물처럼 ...

1980년대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반성 - 성직자, 수도자, 신도의 특성
1990년 10월호 (제 141호)
I. 머리말 역사학은 어느 시대를 연구하는가? 그 연구의 범위 안에 역사 연구자 자신이 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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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90년 10월호 (제 141호)

성서와 새로운 복음화

카를로스 메스터스 (가르멜회 신부)

*본고의 내용은 제4차 세계성서사도직협회 총회에서 브라질의 기초공동체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태리 선교사, 카를로스 메스터스 신부가 한 기조 강연이다. 본 총회는 1990년 6월 27일부터 7월 6일까지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전세계 70여 개국 140여 명 의 회원 대표들과 다수의 초청 옵서버들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복음화와 성서’라는 주 제 하에 개최되었다. 메스터스 신부의 스페인어 강연은 영어와 불어로 동시통역되었고 총회가 끝날 즈음에 회의 참석장들에게 그 스페인어와 영역 강의록이 전달되었다.

역자는 이 협회의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를 대표해서 총회에 참석하여 메스터스 신부의 강연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에게 주어진 강연 시간이 회의 진행 관계로 40여 분뿐이어서 그의 강의 내용 중 신약성서를 다루는 세번째 부분이 생략되었는데 참석자들 대부분이 이를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회원 대표들이 메스터스 신부에게 이 대목을 마저 끝마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자고 제의했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역자는 강연의 영역본을 입수할 수 있었기에 우리말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의 참신한 생각을 나누려 한다. 영역본 강의록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은 역자가 메스터스의 강의 자체를 들으면서 파악했던 전체 흐름에 맞춰 약간의 손질을 가해 번역하였고 잘못된 성서 인용구 표시를 바로잡았다.

그의 강연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언어와 표현을 통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항상 민중 한 가운데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기쁜 소식의 메시지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에 연결시켜 제시하기 때문에 그의 방법론은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현실 분석과 문제 해결의 접근이 한국의 몇몇 특수 상황(예를 들어 분단 겨레의 일치 문제)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방법론 안에서 커다란 영감을 얻어 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역자 주〕

1983년 3월 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2년에 선교 500주년을 맞게 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가톨릭 교회를 새로운 복음화에로 초대하였다. 나중에 교황은 사목적 문헌을 통하여 이 초대를 2천년대에 들어서는 전세계 가톨릭교회로 확장시켰다.

새로운 복음화를 끈기 있게 이루고자 하는 노력은 교회 내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기보다 근본 문제 그 자체이다. 그것은, 요한 23세의 용어를 빌린다면, “야죠르나멘또”(쇄신)의 내적인 반성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시대의 징표들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새로움으로 스스로를 쇄신시키려는 열망에 대한 반성이다. 이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성서는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성서 안에서 “복음화”란 말은 대부분 바빌론 귀양 시절과 신약성서 시대에 등장한다. 이 시대엔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새로운 복음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때였다. 이 필요성은 “새로운 복음화와 성서”라는 주제에 대하여 충분한 반성을 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본고의 제1부에서는 귀양 시절에 당시의 새로움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도전했듯이 오늘의 새로운 상황이 어떻게 새로운 복음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제2부에서는 새로운 복음화가 귀양 시절에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연구할 것이다. 마지막 제3부에서는 신약성서에서 채택한 보충적 자료를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I. 오늘과 어제의 새로움

1. 새로운 복음화에로 우리를 초대하는 오늘의 새로움

1)전세계 차원에서의 새로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20세기 말엽처럼 극도의 새로움이 광범위한 형태로 한꺼번에 나타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새로움은 다소 혼란을 내포한다. 새로움은 그 자체로 위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가공할 위험도 수반한다. 그것은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구세대의 세계관은 새로움을 아직 파악할 능력이 없어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 본다. 이 새로움의 몇 가지 단면들을 아래에 열거한다.

①분석과 지식의 영역에서 거의 무제한적인 가능성 : 과학은 세포들의 가장 미세한 비밀들과 우주의 광대한 비밀들을 탐구해 들어간다.

② 최근까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인류가 자연의 법칙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의 증대.

③인간의 행위와 책임감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을 수정하게 될 심리학적인 발견

④노사 관계를 수정하고 경제적 및 사회적인 제도를 새롭게 조직하도록 촉구하게 될 생산과 교역의 자동화와 국제화.

⑤모든 것을 한꺼번에 멸망시킬 파괴력의 위협 : 원자력과 환경오염에 대한 공포는 생명을 보호하는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양심 형성을 요구하고 있다.

⑥지난 몇 달 동안 동유럽의 철벽같은 전제주의 정치 체제들을 무너뜨렸던 예기치 못한 사건들 : 이들은 미래에 대한 종전의 예측을 수정하도록 촉구한다.

⑦고대 문화들과 다양한 민족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엔 원주민들과 흑인들의 자각이 문화와 조직의 현실적 형태에 의문을 제기한다.

⑧제3세계 안에서 각성되고 증대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조직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수정시키고 있다.

⑨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여성들의 자각 : 여성의 권리와 존엄과 평등에 대한 자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할 사태를 준비시키고 있다.

⑩그리스도교의 선교 활동보다 더 강한 전도열을 보이는 고대 종교들의 자각.

⑪거의 모든 종교들 안에서 급속도로 성장하는 근본주의 (fundamentalism) : 이 근본주의는 기성의 종교 체계를 위협하는 비이성적인 세력을 태동시킨다.

⑫세계를 거대한 마을로 변화시키고 인간의 행위와 사고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 하는 통신 수단의 발달.

인류 전체는 지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있는가? 우리는 시대의 징표들을 어떻게 읽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파악하고 그 부르심을 어떻게 사람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바꿀 것인가?

2)각 대륙들이 안고 있는 새로움

이 새로움은 대륙별로 상이하게 드러나고 있고 예전에 전혀 몰랐던 특수한 문제들을 복음화 과정에 제기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 그리스도교 대륙. 전세계 가톨릭 인구의 거의 절반이 여기에 모여 산다. 대다수 민중의 나날이 피폐되어 가는 상황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문명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제도에 의해서 가속화되어 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가공할 불의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책임이 있다. 한편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몸소 겪은 체험의 도움으로, 그리고 성서를 읽음으로써 복음의 해방적 차원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해방의 신학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 생겨났다. 과거와 성서에 대한 새로운 독서는 많은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성서의 해방적 독서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아프리카 :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폐기되고 불신된 토속적 문화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유럽 문화권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의 표현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민중의 새로운 문화에 어떻게 육화될 수 있을까?

아시아 : 대부분의 고대 종교들이 다시 부흥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경배하지 않는 이 종교들과 어떻게 대화해 나갈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태동기에 이방인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에 참여하기 위하여 유다인이 될 필요가 없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충실한 불교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구원에 참여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든 관습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 기술의 발전과 자동화의 증대는 생활을 세속화시키면서 인생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의미에 의문을 제기한다. 믿음을 인생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지도 체험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것 인가?

3)잘못과 죄악의 그림자

이 모든 도전들과는 별도로 과거와 현재를 망라하여 저질러지고 있는 우리의 잘못과 죄악의 열매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 원주민들의 멸종, 노예 판매, 식민 정책들, 수백만의 유대인들에게 자행된 대학살,팔레스티나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유발시킨 정책들,외채를 통한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등.

이와 비슷한 수많은 오류들은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이름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인식되기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착취와 말살 정책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백인들의 하느님”으로 모독되고 있는지를 밝혀 준다(로마2,24 참조), 한마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낼 수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러 대륙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까? 새로움의 도전이 이처럼 강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던가! 믿음은 우리에게 이 새로움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현존은 너무 새롭고 감춰진 것이어서 우리로서는 지금 이 순간에 아직 그것을 파악하거나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구세대의 복음화는 그 현존을 드러낼 능력이 없다.

2. 귀양 시절의 백성에게 도전하여 새로운 복음화로 초대했던 새로움

바빌론 포로 시절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위기였다. 그들은 그때 까지 그네들의 신앙을 떠받쳐 주고 있었던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충실성을 표현해 주었던 땅의 소유도, 하느님아 당신 백성 한가운데 거처하셨던 장소인 성전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다스렸던 왕들도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한 백성으로서의 그들 자신의 신분도 땅바닥에 떨어지는 접시처럼 깨져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권력도, 특권도, 방향도 없이, 거대한 제국 안에 흡수되었다. '포로 시절은 암흑(애가3,2.6)이었고 무의 체험이었으며,어둠과 물과 사막으로 뒤범벅이 된 혼돈(창세 1,2) 그 자체였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영원히 배척하신 것처럼 보였다(애가3,43-45).

백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의 선포는 전혀 없었다. 구세대의 복음화는 그네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해석할 능력이 없었다. 하느님은 세상을 지배할 힘을 상실하신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지배자는 “내가 최상의 지배자로 언제나 군림하리라.·····내 아닌 누구도 그렇게 못하리라(이사47,7.8)고 말하는 바빌론이었다. 과거와의 단절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서 백성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였노라, 나의 장래가,주님으로부터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졌노라고”(애가3,18); “나는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노라”(애가3,1?);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셨도다”(이사49,14); “시온의 딸이 이제 과부가 되었도다”(애가 1,1 참조),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잃었고 하느님이 없이 홀로 버려졌다(이사40,27; 시편 22,2).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애가3,31). 그분은 전에 보여 주었던 것과 똑같은 사랑을 가지고 현존을 계속하신다(이사49,IS). 그리고 그분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 안에서뿐만 아니라페르샤의 고레스 대왕의 출현으로(이사41,2-5,25; 45,1-7)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주변 세계와의 관계 안에서도 현존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눈은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했다(이사42,l8-20; 43,8). 어떻게 이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기쁜 소식을 발견하게 해줄 수 있는 가? 그 현존은 너무 새롭고 감추어져 있어서 쉽게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참조 : 이사 52,14-15; 53,1; 45,15). 여기에 새로운 복음화의 도전이 있다.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구체적으로 그 도전이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움을 파악하고 체험하는 “새로운 열정”,그 새로움을 언어로 바꾸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만드는 “새로운 방법” 그리고 그 새로움을 새로운 삶의 형태로 육화시키고 표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자신들의 삶 안에서 느끼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만드는 “새로운 표현”들이다.

이 도전은 “새로운 복음화와 성서”에 대한 우리의 반성에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는 귀양 시절에 새로운 복음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다시 말해서 그 복음화가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분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분석 방법은 성서가 교황의 말씀대로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표현”에 입각한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본고에 주요 결론을 제공해 줄 것이다.

II. 귀양 시절에 기쁜 소식의 선포가 어떻게 쇄신되었는가

1. 새로운 복음화의 씨앗 : “새로운 열정”

1)새로운 하느님 체험

이사야의 제자들은 이렇듯 박살나고 분열된 백성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자기네 전통적 신앙의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위기는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잃어버리도록 하는 대신 오히려 정화와 재생의 기회가 되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감춰진 현존의 새로움을 발견하고 그 새로움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이사 49,9-11; 52,7-10; 61,1).

이 하느님 체험은 무엇보다 그들이 만들어 낸 표상들 안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들 중에는 한편으로 하느님과의 새로운 인격 관계를 드러내는 친밀한 표상들이 있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이사63,64,7) ; 그분은 어머니와 같으신 분이다 (이사49,15; 46,3; 66,12-13) ; 그분은 보호자 고엘이시요 속량자시요 구원자이시다(이사41,14; 43,14; 44,6) ; 하느님은 백성의 남편이시다(이사 14,5; 62,5).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 백성의 역사 안에서,그리고 정치 안에서 하느님의 위업을 새롭게 자각하도록 해주는 표상들이 있었다.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시요(이사 40,28; 51,13외) 백성의 창조주이시다(이사 43,15 외) ; 그분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다(이사 44,6; 41,4; 48,12) ; 혼돈을 좋아하시지 않고(이사45,l8-19),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 당신 말씀의 창조적인 힘으로 그것을 정복하신다(창세 1,3 이하; 이사40,8); 그분은 백성을 두렵게 하는 힘센 정복자보다 더 강하시다(이사40,12-18) ; 그분은 당신 백성을 창조적인 힘으로 해방시키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신다(이사 40,25_31 외). 한마디로 이 새로운 체험 안에서 이사야의 제자들은 자기네 조상들의 하느님과 다시 만나고 그분이 아직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야훼 하느님이심을 발견한다. 이 하느님 체험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새로운 복음화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2)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하느님 체험은 그분이 과거에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통찰력을 이사야의 제자들에게 주었다. 한편으로 이 체험은 왕정 시대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지배 이념의 하수인으로 묶어 두었던 온갖 오류와 제약들을 지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체험은 과거의 가치들을 하나 하나 재고하여 자신들을 오류와 제약들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 나갈 수 있게 하는 창조력과 빛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움은 한 집안에 새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질적이고 비정상적이며 이단적인 것으로 단죄됨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대한 이 새로운 해석의 몇 가지 구체적인 예들을 아래에 소개하겠다. 이 예들은 새로운 복음화를 일으킨 상황에 우리를 보다 가까이 접근시킬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제 한 종족에 국한되지 않고 외국인들도 포함하게 되었다(이사 56,3.6-7).

은 외국인 거주자들에게도 분배될 것이다(에제 47,22-23),

성전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존재할 것이다(이사56,7),

예배는 보편적인 것이 되고 외국인들도 거기에 참석한다(이사57,7).

사제직은 레위나 사독 가문에서만 나오지 않고 외국인들 가운데에서도 나온다 (이사 66,21).

왕국은 이제 일정한 영토에 국한된 다윗 왕국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보편적 왕국이다. 하느님은 능력을 발휘하시어 다스리기 시작하신다(이사45,1; 44;28).

도유된 자(메시아)와 목자는 이제 다윗 왕이 아니라 페르샤의 왕 고레스이다(이사 45,1; 44,28).

선택은 더 이상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는 봉사이다. 그것은 “백성들의 빛”이 되기 위한 정의의 사명이다(이사42,1-9; 41,8; 49,6),

하느님의 법은 그 안에서 인생 여로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추구되고 준수된다(이사 2,1-5).

순수성은 이제 인간의 율법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받아들이심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이방인들의 제사들까지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이사 66,20; 말라 1,11),

예루살렘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의 수도가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중심 장소이다(이사 60,1-7).

이 성서 본문들 안에는 새로운 사고를 가능케 하는 대단한 용기와 보편적 개방성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이사야의 제자들은 창조주를 본받았다. 그들은 창조적이 되는 방법을 알았다. 그들은 전통의 경계를 넘어서서 참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으니 이제 나는 새로운 것들을 선포하노라”(이 사42,9), 그들은 모든 것이 새로워지기를 바랐다. “새 하늘과 새 땅“(이사65,17) ; 새로운 출애굽(이사41,18-20; 43,16-20); 새 계약(이사54,10; 55,3; 61,8); 새 백성(이사43,21), 새 마음과 새 정신(에제 36,26) ; 마음에 새겨질 새로운 법(예레 31,33); “나는 모든 것들 을 새롭게 하겠노라”(묵시 21,5), 자유와 충실함이 과거에 대한 이 새로운 해석을 특징 짓는다.

그러나 목하 진행 중인 새로운 상황에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재해석을 올바로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다 사건들을 겪었으나 그 안에서 새로움의 가능성들을 식별하지는 못했다(이사 42,20).그들은 장님이었다(이사42,18-19), 그들은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역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의 새로움을 볼 수 없었다. “과거의 사건에 매달려 살고 지나간 날들에 마음을 뺏기는 일을 그만두어라· 나는 곧 새로운 일을 이루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에 그 일을 펼칠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느냐(이사43,18-19).“

3)현실의 새로운 해석

새로운 하느님 체험은 과거를 재해석하는 안목을 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비참한 사건들의 진상을 비판적인 감각과 사명 의식을 가지고 대면하도록 해주며 동시에 그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있다. 성벽은 무너져 내렸고 성문도 없다. 열려진 도시는 더 이상 방어 기능을 상실하였다. 토지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되고 점령되었다(예레 39,10), 다른 사람들은 옛 성전 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예레 41.5).귀양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이제 왕도 없었다. 그들은 이 상황을 변화시킬 아무런 정치적 또는 군사적 힘도 없었다. 그들은 거대한 페르샤 제국에 흡수되어 버린 보잘것 없는 한 종교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예배도, 땅도, 도시도,왕도…··· 자기네들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다른 백성들과 어울려 살도록 강요되는 상황에 처해졌다. 그들에게 아무런 대안 책도 마련되지 않았다. 흩어져 버린 상황, 이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이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현실을 무시해 버릴까? 아니면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할까? 그도 아니면 현실에 순응해서 살아갈까?

왕국 시대의 옛 안목을 바라볼 때 이 같은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재앙이다. 이 때문에 즈루바벨과 하깨와 즈가리야 같은 몇몇 지도자들은 왕국의 재건을 원했다. 그러나 이사야의 제자들은 자기네들의 잃어버린 과거를 애도하기보다는 이렇듯 극심한 진통을 겪으면서 이제 막 태동한 미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즈루바벨이 원했던 왕국의 재건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세상 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사명을 상기시켰다.

폭풍우의 세찬 바람은 꽃을 흔들어 씨를 홑날리게 함으로써 새로운 개화를 준비시킨다. 같은 이치로 귀양의 잔혹한 사건은 백성을 뒤흔들어 그들을 세상 곳곳에 퍼져 나가는 씨앗이 되게 함으로써 모든 백성들의 빛이 될 새로운 사명의 길로 그들을 준비시켰다. 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을 팔레스티나의 비옥한 정원에서 뽑아(이사5,1-2; 시편80,9-17), 만민을 위한 “하느님의 종”(이사42,1; 43,10; 49,6), “만민을 위한 축복의 원천“(창세 12,3)이 되도록 세상에 심으셨다. 이리하여 귀양살이는 새로운 하느님 체험의 빛과 과거의 예언들에 의해서 그 뜻이 밝혀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명적 타격으로 보였던 귀양이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바뀌면서 희망과 생명의 메시지가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하느님 체험과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이 세 가지는 상호간에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복음화”를 촉진시켰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촉진시켜 나갈 것이다.

2. 새로운 복음화와 그 방법들 : “새로운 방법”

어떤 메시지의 선포가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되려면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분은 계시되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이 드러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만하시지 않았다 : 그 분은 당신 삶의 자세와 방식을 통하여 아버지를 드러내시기도 하였다. 이사야 제자들의 자세는 무엇이었는가? 모든 것을 백성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바꾸기 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묘사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믿음과 용기를 잃어버린 백성에게 무엇을 전달했는가? 다시 말해서 이사40?66장의 본문 안에 기록 된, 그들이 사용했던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1)새로운 비전을 전달하는 자세와 증언

복음화를 시도하는 제자들의 자세에는 세 특징이 있다.듣기와 대화, 친절과 영접, 그리고 단순하고 참신한 언어. 그들은 모든 것을 잘 아는 교수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은 대화하고 간청하고 질문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건들에 대해 반성하도록 도와주었다(참조:이사 40,12-14; 41,25-27; 41,8-16 외)

그들은 친절과 위로를 다하여 대화를 신중하게 끌어나갔다. 실제로 고통받고 절망 에 빠진 사람을 돕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경청하는 일이다. 제자들의 대화는 단순하고 구체적이다. 그들의 새로운 언어는 친숙한 표상들로 가득하다. 하느님은 아버지, 어머니,남편,보호자이시다. 이런 식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실제로 체험한 것을 전달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 야훼께서 예전에 보여 주신 새로움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이러한 대화의 자세 안에서 당신의 친절과 환대를 드러내신다. 제자들의 몸짓과 태도를 통하여 백성은 제자들의 하느님이 바빌론 왕의 신과 다르다는 것을,심지어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하느님과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백성의 눈은 조금씩 열리고 새로운 상황의 발생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2)옛 비전을 폐기시키는 논거들

백성의 좌절은 외부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억압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저항을 내부에서부터 무력하게 만든 지배 이념의 잘못된 발상들 때문에 생겨났다. 이로 인하여 백성은 현실에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다(이사 43,8; 42,9). 따라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일상적 삶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불의하고 거짓된 원인들을 고발하는 일도 새로운 복음화의 한 몫이다.

제자들은 백성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세력을 하나하나 폭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군주들과 판관들(이사 40,23),예언자들과 현자들(44,25), 통치자들(41,25), 세상의 민족들과 주민들(40,,15.17.22), 가장 강력한 민족이 되었다고 뽐내는 바빌론(47,1-15),억압을 정당화하고 하느님의 참 모습을 왜곡시키는 우상과 그 숭배자들과 거짓 신들 (40,18-20; 41,6ㅡ7.21-29; 44,9-20 외)이다. 이 모든 세력을 제자들은 매우 정교하고 조소적인 논거들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이외에 제자들은 그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건들을 깊이 분석한다. 땅의 얼굴을 바꾸고 국제적인 정치 판도를 혁신한 고레스, 그는 야훼께서 일으키시고 인도 하시는 인물이다(이사41,1_5; 45,1-7). 역사의 사건들을 통하여 야훼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수행하신다(43,8_12), 이스라엘 백성을 박살낸 귀양 그 자체는 야훼의 분노의 결과였다. 그분은 그네들의 불충실함 때문에 백성을 벌하셨지만 자비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다시 돌아오셨다(14,7-8; 47,6; 42,24-25).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억압적 제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이성과 상식을 사용한다. 이성과 상식은 지배 이념의 거짓된 위선과 설명을 폭로할 것이고 백성을 의식화시키며 기존의 사고 방식을 고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백성으로 하여금 삶의 사건들 가운데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을 발견할 수 있도록 백성에게 영감을 불어 넣었다.

3)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새로운 내용

이사 40-66장 전체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얼굴은 네 가지 특성을 지닌다. 무조건적인 사랑, 창조적인 힘, 성실한 현존,거룩함의 요구.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사랑하는 신이시다. 그분은 백성에게 유익한 것을 주시고 백성을 억 압에서 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강한 신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 손 안에 쥐고 계시며 창조적인 힘으로써 해방시킨다. 그분은 성실한 신이시다. 그분의 우정어린 현존은 결코 쇠잔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거룩한 신이시다. 그분은 정의를 찾으시고 성실함을 요구하시며 사명을 부여하신다.

하느님의 얼굴은 인생살이를 비추는 하늘의 빛이요, 해방과 부활의 뿌리이다. 그 분은 억압된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기쁜 소식이다. 그분의 얼굴 없이는 모든 것이 암흑이다.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등불이나 촛불은 없다. 그분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얼굴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그것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삶을 혁신시키고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발견하도록 요구하며, 투쟁을 야 기시키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이들의 잘못과 자신의 잘못으로 합당한 자격을 잃어버린 신부와 같다. 사랑하는 임의 부재는 그녀를 실망시킨다. 제자들이 시도하는 복음화의 목적은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네 삶 안에서 사랑하는 님의 다정하고 강하며 성실하고 간청하는 현존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너의 창조주가 바로 네 남편이다”(이사54,5).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용기 있는 백성이 창출되어 순례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고 자신들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새로운 복음화와 그 실천 : “새로운 표현”

이 모든 것은 기쁜 소식을 새로운 삶의 자세에 정착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에로 초대한다. 이 실천적 노력은 분명 새로운 복음화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1)현실을 직시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일

이사야의 제자들은 백성의 주의를 자연과 역사와 정치에 집중시켰다. 한밤중에 그들은 백성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너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 누가 이 모든 별들을 만들었는가?”(이사40,26), 그들은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억하라” 고 외치면서 출애굽의 역사를 다시 끌어들여(43,16-17) 백성의 기억을 새롭게 상기시킨다(43,26). 그들은 고레스가 느부갓네살을 패배시키고 있는 정치적 상황들을 지적 하면서 “이 모든 일을 하신 분이 누구인가?“(41,2) 하고 묻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그분은 바로 백성의 하느님 야훼, 곧 우리의 하느님이시다“이다.

이리하여 자연은 이제 더 이상 거짓 신들의 거처가 아니고, 역사는 더 이상 백성의 압제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으며,정치 판도도 더 이상 느부갓네살의 지배 하에 있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의 변화들 뒤에 백성의 하느님 야훼의 얼굴이 선명하게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자연과 역사와 정치는 더 이상 백성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그네들의 순례길을 인도한다.

그러나 하느님이 선택하신 거처는 압제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그분의 백성 한가운데 있다. “나는 너와 함께 있다”(이사41,10). “너는 내게 몹시 귀중하기에, 나는 너를 경애하고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바꾸노라“(43,4). “하느님은 너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찾지 못하리라”(45,14). 그분이 발견되는 곳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 한가운데이다(45, 15). 그곳이 바로 그분이 발견되어야 할 곳이다(55,6). 그곳이야말로 그분의 얼굴이 “백성의 빛”으로(42,6) 자연· 역사· 정치 안에서 다시 찬란하게 떠올라야 할 장소이다.

삶과 세상과 정치와 그리고 백성 자체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이렇듯 위대하고 압도적인 현존 앞에서 제자들은 백성을 한데 불러 모아놓고 “눈먼 이들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를 열어라!“(이사42,18)고 외친다. 백성은 눈을 뜨고 승리를 가지고 다가오시는 그들의 하느님을 알아 모셔야 한다. “여기 주 야훼께서 계신다! 그분이 권세와 함께 오시는데”(4(),9-10) “너는 그것을 못 본단 말이냐?”(43,19). “너의 하느님이 다스리신다”(52,7)는 사실이야말로 제자들이 백성에게 선포한 기쁜 소식이다.

2)백성의 삶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의 목적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주입되어야 할 교조도 아니요 강제성을 띤 규칙도 아니다. 그것은 암기해야 할 교리도 아니요 전수되어야 할 이념도 아니다. 왕국의 기쁜 소식은 “삶의 사건”으로서 그 안에서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곧바로 행동 하시며,당신의 백성을 권능으로 해방시키시고 당신 구원의 계획을 실현시키신다. 그것은 사건 안에서 알려지지 않은 실재와 하느님의 은혜로운 현존을 드러내시는 말씀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시켜 주는 태도요, 증언이요 실천이다. 왕국의 기쁜 소식은 그 소식을 증언하고 인준하는 백성의 지난 역사 전체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랫동안 희망해 왔던 것이다!”

왕국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왕국이 그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구체적 사건들을 지적하고,하느님 승리의 알려지지 않고 감추어진 차원을 보여 주는 것을 말한다. 제자들이 왕국을 드러내는 사건들로 지적한 사건들은 무엇 무엇인가? 많은 사건들을 지적했지만 몇 가지만 소개한다. 고레스가 느부갓네살을 정복하고 억압받는 백성에게 희망을 준다(이사41,25_27). 백성 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또 다른 출애굽을 체험한다(52,7-12). 백성이 목자 주변에 모여드는 양떼처럼 스스로 결집되기 시작한다(40,9-11). 백성이 평화의 도래를 기뻐한다 (52,7-9). 백성이 압제자에게 강력하게 저항한다(50,4-10). 백성이 자신들의 형제 자매들의 구원을 위하여 투쟁과 고통을 의식적으로 감수한다(53,1-12). 백성이 자신들의 뿌리로 돌아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다(51,1-3), 이외에 다른 구체적이고 널리 알려 진 사건들이 하느님 나라,곧 “네 하느님이 다스리시게 되는”(52,7) 상황의 표징들이 된다. 그것들은 하느님이 권능을 가지고 도래하시는 표징들이다.(40,10). “기쁜 소식 을 가지고 산 위에 오른 사자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고! “(52,7). “전에는 네가 몰랐던 새로운 일들을 이제부터 보여 주겠노라!”(48,6).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본다. 오늘날 각 대륙 안에서 왕국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일들, 곧 하느님이 권능으로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다는 표징들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3)기쁜 소식을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의 형태로 육화시키는 일

사건들을 지적하고 해석하는 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백성의 희망에 응답하는 것으로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의 증언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공동체의 증언이 필요하다. 새로운 하느님 체험은,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의 형태로 구체화될 수 있을 때만이 진실되고 신뢰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의 사랑으로 옮겨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결정적인 도전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바빌론 귀양 이후,기쁜 소식의 아름다운 선포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사는 삶의 현실은 썩 좋은 것이 못되었다.“의인들이 망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구나“(이사57,1), 지도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56,10-12). 착취와 빈곤이 만연했다(S8,3-4), 이 때문에 제자들은 “진정한 단식“을 호소했을 것이다. “불의한 사슬을 끊고 멍에의 매듭을 풀어라, 그리 고 모든 멍에를 벗겨내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어라, 진정한 단식은 너의 음식을 굶주린 이들과 함께 나누고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너의 집에 받아들이며, 헐벗은 이를 만났을 때 입혀 주고 너의 동족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더냐?”(58,6-7).그들은 백성이 하느님이 하신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겸손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도록 요청한다(57,15; 66,2).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가난을 야기시키는 제도를 바꿀 목적으로 정직과 정의의 실천도 요청하였다(56,1).

그들을 이끌어 주는 이상향은 오랜 옛날부터 더불어 사는 삶에 포함된 저주가 그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참조:창세 3,14-19) “새 하늘과 새 땅”(이사65,1?)이었다. 그들은 눈물도 유아 사망도 없는 땅, 그리하여 어머니들이 자식을 낳아 결국은 고생의 늪에서 헤매이도록 만드는 일이 없는(65,23) 땅을 원했다. 나눔의 땅s 그곳에선 가난 한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일이 없고 노동자가 제 품앗이의 주인이 될 그런 땅을 원했다(65,12-22), 그곳은 외국인들의 착취로부터 해방된 땅(私8-9),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무죄한 땅(65,25)이다. “나는 평화를 내세워 너를 다스리게 하고 정의로 하여금 너를 거느리게 하리라”(이사 60,17).

이스라엘 민족의 부흥을 주도했던 구체적인 계획은 과거 판관 시대의 사건들에서 영감을 받는다. “너의 하느님이 다스리신다”(이사 7)는 기쁜 소식은 12부족시대를 상기시킨다. 그 당시 백성이 왕을 요구했을 때, 답변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언제나 “우리의 왕은 야훼이시다”(판관8,23; 1사무12,12; 8,7)였다. 그런데 이제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 의해서 패배당하자 부족 제도를 부활시켜(이사49,6) 땅을 새롭게 분배하자는 요구가 생겨났다(49,8). 출애굽과 판관 시대는 이상적인 약혼 시기였다(예레 2,2; 호세 11,1-4; 2,16). 그런데 예언자들은 백성이 그 이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실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호세 12,10), 이 때문에 귀양살이가 끝난 지금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신랑이 되신다(이사54,5; 62,4-5).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복음화는 하느님 백성 안에서 불유쾌한 기억을 일깨웠다. 백성의 하느님인 야훼께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참여와 평등과 힘의 탈(脫) 중앙화에 바탕을 둔, 더불어 사는 인간다운 삶의 새로운 형태 안에 육화된 때는 출애굽과 판관 시대 동안이었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에 표현된 삶이다.

새로운 복음화를 위협하는 가장 커다란 유혹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그 실천에 있어서 언제나 서로 분리시키는 일이다. 많은 단식을 하면서 불의를 계속해서 자행하는 일(이사 58,1_2) ; 아름다운 성전들을 짓고 그 안에서 장엄한 전례를 거행 하면서 주변의 가난에 무관심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우상 숭배와 똑같은 짓이다(66,1-4)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지 않는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처하면서도 마음이 부서지고 낮추어진 자와 함께 있다''(57,15),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이 차원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결정적인 도전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화가 공동체의 삶 안에 육화되지 않고서 새로운 복음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으로 그쳐 버릴 것이다. 그것은 복음 선포자에게 거짓된 양심을 형성해 줄 따름 이다. 그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요청한 “새로운 표현”이 되지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공급하는 바탕이 된다. 공동체로부터 열매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면 복음화의 위대한 운동은 긴 안목으로 볼 때 별다른 결실을 산출해 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4) 새로운 복음화 안에서의 제자들의 사명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이 모든 방법들은 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복음화를 수행해 나가야 할 자신들의 사명을 보다 깊이 인식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어야 하고 이 백성은 민족들 가운데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야훼의 종에 관한 노래 네 곡(이사42,1-9; 49,1-6; 50,4-9; 52,13ㅣ53,12)은 백성의 사명과 제자들의 사명을 동시에 밝혀 주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점들만 지적하고 싶다.

충실한 제자가 되려면 우선 자기를 잘 다스려야 한다. 매일 아침 하느님이 자신에 게 들려주시고 자신 편에서도 좌절된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씀을 경청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이사50,4_5). 그의 사명은 자신을 실망시킬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그는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힘을 발견해야 한다(50,9), 그는 박해받고 모욕을 당하며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살해될 것이다(50,3-8). 그러나 그의 수난과 죽음은 백성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변화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참회하러 일으킬 것이다(52,13-15; 53,10-12).

이사야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은 자신의 성소와 사명에 대한 스스로의 소신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이 증언은 우리가 왕국의 기쁜 소식에 대하여 방금 설명한 바를 종합한다. 똑같은 증언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 소명의 청사진을 밝히신다(루가4,18-19).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섰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로다.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주며,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알리고,

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 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와,

우리 하느님이 복수하실 날을 선포하기 위함이로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시온에서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의 재계를 월계관으로,

울음을 기쁨의 기름으로,

무거운 마음을 찬란한 옷으로 바꾸기 위함이로다(이사 61,1-3).

5)새로운 복음화를 가로막은 오류와 실수들

이사야의 제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던 새로운 복음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복음화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물론 하느님의 계획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이 성실하기만 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이긴 하였다.

귀양 시절 동안에 추진되었던 복음화 운동은 B. C. 520년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으로 현실화되었다. 이사야 40ㅡ66장의 기록들은 아름다운 이상과 진지한 노력, 그리고 다양한 문제점들을 노출시킨다. 성전 재건으로부터 75년 뒤인 445년 느헤미야서의 기록에 의하면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착취라는 심각한 상황이 대두된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강요하여 그의 토지를 팔고 그의 집을 저당 잡히게 만들며 그의 딸들을 노예로 넘겨 주게 한다(느헤 5,1-5).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하나로 모아 실천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처음서부터 자기네들을 갈라놓는 요소들을 거슬러 효과적으로 투쟁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 요소들이란 불의와 착취,돈에 대한 욕심과 재산 축재욕들이었다. 이것들은 몸 전체에 퍼지면 안에서부터 몸 자체를 파괴시키는 암세포처럼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이사야의 제자들은 경제-사회적 상황까지 충분히 고려할 정도의 보다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리하여 현실 상황의 요구에 따라 느헤미야와 그의 뒤를 이어 에즈라는 또다시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 주변에 세 가지 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 경신례의 벽, 율법의 벽, 선택된 민족의 벽, 그들은 백성에게 400년 이상 지속 되어온 “위대한 규율“을 지키도록 요구하였다. 하느님이 세상에 심으시려고 포도밭에서 빼내 오신 씨앗은 세상에서 도로 옮겨져 세상과는 동떨어진 잘 보호된 정원에 다시 심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씨앗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리하여 인간적인 오류와 약점들 때문에 이 75년간의 아름다운 체험은 무위로 끝나고 인류 역사와 인간의 삶 안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육화되는 시간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이 체험은 결코 완전한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반대로,

① 이 체험은 충실한자세로 임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실현하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을 낳았고,

② 이 체험의 청사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실현된 새로운 복음화를 추진시켰던 모델이 드러났으며,

③ 이 체험이 신약성서의 메시지로 이어지는데, 복음화과정의 기본골격은 이사야서에서나 신약성서에서나 같다. 더 나아가 이 체험은 20세기 후반기에 우리가 실현 하고자 하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전형적인 모델로 소용될 수 있다. “그들에게 닥친 이 사건들은 하나의 예로 기록되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1고린 10,11).

III. 예수께서는 새로운 복음화를 실현하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새로운 복음화 과정이 어떻게 이사야의 제자들에 의해서 시작 되었는지 예수에 의해서 어떻게 채택되고 어떻게 완전한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예수께서는 야훼의 종에 관한 네 곡의 노래에서 이사야의 제자들이 제시한 이상적 복음화를 완성하셨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 입니다. 그 후부터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루가 16, 16), 예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 안에서 새롭고 결정적인 단계의 시작을 이룬다.

1.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개요

마르코 복음은 기쁜 소식을 네 가지 요소로 집약한다.

1)때가 이르렀다.

2)하느님 나라가 여기에 있다.

3)너희의 삶을 바꾸라.

4)기쁜 소식을 믿어라(마르 1,15),

이 네 가지 요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1)“때가 이르렀다” : 사건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라.

예수께서는 사건들과 때에 민감하셨다. “그들이 요한을 감옥에 가둔 후”(마르 1, 14) 예수께서는 결론짓기를 “때가 이르렀다! “고 하셨다. 헤로데에 의한 요한의 수감은 때가 찼음을, 하느님의 시간(KAIROS) 이 이르렀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사건들을 색다른 관점에서 분석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알아차리셨다. “아직 넉달이 있어야 추수 때가 온다고 여러분은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시오,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여러분의 눈을 들어 들녘을 보십시오, 추수할 만큼 희게 무르익어 있습니다”(요한4,35), 그분은 온 지역을 돌아다니시며 사람을 불러 모으셨다. 왜냐하면 농사가 풍년인데도 추수꾼들이 적었기 때문이다(마태 9,35-38). 시간은 우리를 지금 재촉하고 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12 제자를,그리고 나중에는 72제자들을 보내신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였다”(루가10’9).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건들을 다른 눈으로 보도록 도와주셨다. 그분은 사건의 발생의 시초부터 사건의 깊은 의미를 숙고하도록 유도하셨고(루가13,1-5),사건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비판하셨다(요한 9,2-3). 그분은 비유들을 사용하여 현실과 종교적 관습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셨다(루가18,9_14; 마태 21, 28-32: 루가10,29-37 외). 이런 식으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건들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차리도록 도와주셨다. 이 일은 예수의 삶 안에서 이중적 체험을 전제로 한다. 이중적 체험이란 한편으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 자신의 신분과 당신의 기도로부터 얻어지는 심오한 하느님 체험,다른 한편으로 육화와 개입으로부터 얻어지는 민중의 삶에 동참하는 심오한 체험,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사건들에 대하여 예수께서 내리신 해석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몰랐다(마태 16, 1-4). 예루살렘과 갈릴래아의 도시들은 예수와 새로운 해석 앞에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했다(루가 I3,3-35; 10,13-15; 19,42).

2)“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였다” : 감탄을 일으킨 새로움

모든 이가 각자 나름대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고 있었다. 바리사이파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나라는 율법이 완전하게 준수될 때 도래할 것이고 에쎈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유대아가 정화될 때 그 나라가 임할 것이다. 일반 민중은 영광스러운 메시아가 오기를 대망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지 않으셨다. 그분에게 있어서 그 나라는 이미 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소식이었다.

예수께서 사건들을 분석하시면서 도달하신 결론은 무엇인가? 율법의 준수는 아직 완전하지 못했고 유대아도 정화되지 못했으며,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징표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나라의 표징들은 무엇인가?(루가17,20),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알아채게 오 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이미 와 있습니다“(루가17,20-21). 이 선언은 그 나라와 현실을 대면시키기 위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그 나 라가 무엇인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단지 그 나라가 와 있다고 말씀하실 뿐이 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면 예수의 행동과 말씀들 안에서 이 나라를 구하고 찾아야 한다.“여러분이 보고 들은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병자들이 낫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마태 11,5-6;루가7,22),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 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실로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와 있습니다”(루가 11,20),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알아차리도록 예수께서는 과거,곧 구약성서를 새롭게 읽으시고 성서의 빛으로 사건들을 해석하신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께서는 이사야서 의 본문을 이용하여 당신 자신의 선교 활동의 청사진을 제시하신다(루가4,is-w; 이사 61,1-2; 58,6). 읽기를 마치시면서 그분은 “이 성서의 말씀은 오늘 여러분 모두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루가4,21)라고 결론지으신다. 예수께서 세례자요한에게 보내신 메시지도 이사야서에서 인용하신 것이다(이사 29,18-19; 35,5-6).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라는 표현 자체도 이사야서에서 비롯된다(이사52,7),

다른 한편 예수께서는 백성들이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스러운 현존을 알아차리도록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유적 표상들을 이용하신다. 씨, 누룩, 소금, 보물, 겨자씨, 잃어버린 은전 등· 가난한 대중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그들을 위한 것이기에(마태 5,3-10) 이런 언어를 이해한다(마태 11,25). 그러나 가난한 대중의 밖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마르4,11-12)

3)“삶을 바꾸어라” : 어려운 요구

우선 예수께서는 “율법과 전통의 준수”를 요구하시지 않고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메타노이아(metanoia : 回頭)를 요구하신다. 백성은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 중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왜 바꾸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때까지 가치들이 온통 뒤바꿔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로서의 종교는 더 이상 백성에게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지 못했고, 인간이 율법을 섬겨야 했다(마르2,27). 하느님의 명령은 전통에 의해서 폐기되었고(마르7,8), 성전은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마르 7,10-13). 자비가 율법 준수로 대치되었고(마태 9,13), 바리사이들이 실천하는 의덕은 하느님 나라를 더 이상 드러내지 못했다(마태 5,20). 백성의 요구는 망각되었고(루가 Ι??7),종교 지도자들은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한편(마태 23,4), 하느님 나라로 통하는 입구를 가로막았다(마태 23,13).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너희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실천을 시도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의 사랑과 동등하고(마태 22,39), 율법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 위에 골고루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다(마태 S, 43-48).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인 너희는 특권을 받은 백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 하고,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도 쓸모없는 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루가I7,10). 그것은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가동등하고 공동체 안에서 권위는 봉사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마태 10,27), 안식일이 인류를 위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마르2,27),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을 부정하는 갖가지 분열을 거슬러 투쟁하기 위하여 필요한 태도이다. 한마디로 아무도 하느님이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신 사람들을 “죄인”, “부정한 자”,“이방인”, “저주받은 자”, “소외된 자”로 낙인찍을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죽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거슬러 저항했고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요한12,37-41 ; 11,45-54).

4)“기쁜 소식을 믿어라“: 백성의 희망이 실현되다

당신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새로움을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수세기에 걸쳐 품어 왔던 갈망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사야의 제자들이 했던 바 그대로였다. 곧 그 분은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지적하셨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사건들을 하느님의 계획의 틀 안에 안치시켜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도록 하셨다.

기쁜 소식은 박사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에게는 기막히게 좋은 것이었다(루가4,18; 이사61,1), 따라서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무식쟁이”, “저주받은 자”, “부정한 자” 그리고 “죄인”으로 그늘에서 살아가던 가난한 사람들이(요한7,49; 9,34) 다시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입구를 개방하셨다. 이제 모든 이가 오랜 세기 동안 그들을 묶어 놓았던 족쇄에서 풀려 하느님의 자애로운 현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그분의 현존은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기쁜 소식에로의 접근은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기쁜 소식을 믿어라!” 즉 예수의 메시지를 믿어라, 그러나 그분의 메시지를 믿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다 ! 무엇보다 그분을, 곧 그분의 인격을 믿고 그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요한 14,1).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분은 “길이요,진리요,생명이시다”(요한 14,6). 하느님은 그분의 태도 안에서 현존하신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도 본다”(요한 14,9).

2. 예수의 해방적 태도는 아버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신다

예수께서는 깊은 갈등의 시대에 극도로 분열된 나라에서 사셨다. 갖가지 분야에서 갈등의 골이 깊었다. 경제,사회,정치, 이념, 종교 등. 백성은 통합을 다시 추진하거나 이룰 아무런 동기도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이런 갈등들 속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셨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옛 새로움을 드러내시는 일이었다. 예수의 이 해방적 태도를 모두 기록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우리는 단지 이사야 제자들의 새로운 복음화를 상기시키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만을 열거할 것이다.

1)예수께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을 껴안으시다

예수께서는 삼 년 등압의 떠돌이 생활 중 대부분을 당시의 사회와 종교의 제도 안에서 자기네 자리를 할애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U9)로 알려지시게 되었다. 그분은 배척받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신다. 창녀와 죄인과 같은 부도덕한 사람들,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과 같은 이단자들, 나병환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과 같이 부정탄 사람들, 여인들과 병자들과 어린 이들과 같이 소외된 자들,세리들과 같은 배신자들, 빽 없는 가난한 자들과 같이 약한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신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고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는데, 그분은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입장에서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런 복음적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명백하다. 예수의 친구로 자처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제도를 계속 지원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예수께서 사람들에 의해서 조성된 갖가지 분열들을 배척하시고 그 분열들과 맞 서 싸우시다

백성 안에는 아버지의 뜻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수많은 분열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는 이웃과 남의 구분(루가10,29-37ㄴ 거룩한 자와 죄인의 구분(마르2,15-17),정한자와 부정한 자의 구분(마르7,1-23),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마태 15,21-28)들을 비판하셨다. 그분은 새로운 분리를 끌어들이시는데(마태 10,34-36),그분 자신이 인간적 삶의 근본 적인 가치들과 하느님의 뜻인 정의와 형제애와 사랑과 정직을 추구하시는 가운데 백성들 사이에 배척당하는 표징이 되신다(루가2,34), 이 해방적 태도는 당시의 종교 제 도를 떠받치는 기둥들인 성전과 안식일, 각종 경신례와 정결 예식들을 상대화시키고 뿌리째 뒤흔든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권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분노케 하셨던 것이다.

3)예수께서 권세 있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시다

예수께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공공연하게 고발하셨다(마태 23,1-36; 루가 11,37-52; 마르 12,38-40), 그분은 부자들의 거드름을 비판하시고 단죄하시며, 그들의 회심에 매우 회의적이셨다(루가 16,31; 마태 6,24;· 마르10,25; 루가 18,24?27; 12,13-21). 유대인이거나 로마인이거나 간에 정치권력을 대 표하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께서는 두려움을 갖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행동하셨다(루가 13,32; 23,9; 요한 19,11; 18,23).

4)예수께서 인간의 생명을 파괴시키는 악들과 투쟁하시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충만히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다.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셨다(창세 1,28), 그러나 생명은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저주를 받게 되었다(창세 3,14-19), 하느님은 잃어버린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창세 피3), 예수께서는 창조주의 계획을 떠맡으시어 인간의 생명을 억압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그 생명을 해방시키신다. 굶주림, 슬픔,무지, 포기, 외로움, 생명을 죽이는 글자, 억압적 율법, 불의, 공포, 고통, 죄, 죽음 등이 생명을 거스르는 악들이다. 예수께서는 악의 군주인 악마를 거슬러 투쟁하시고 악마를 내쫓으신다(마르 3,22-27).

5)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공동체 안에서 육화되다

예수의 태도와 몸짓과 말씀들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안목과 새로운 출발점과 새로운 질서를 보여 준다. 이 새로운 질서의 근본적인 가치들은 그분 주위에 형성된 제자들의 작은 공동체 안에 육화된다. 돈주머니와 재물의 공동 소유(13,29),하느님 앞에 서 모든 이가 근본적으로 똑같다는 평등 의식(마태 23,8-10), 봉사로서의 권위(마태 20, 24-28; 루가 22,26; 요한13,14; 마태 23,11)5 친구로서 함께 사는 일(요한15,15)들은 제자들 가운데 “한마음과 한 정신”의 공동체 의식을 불러일으켰다(사도4,32), 예수께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도 새롭게 정립하신다(마태 19,1-12).

6)예수께서 사람들의 성장을 돕는 새로운 교육 방법론을 이용하시다

하나의 씨앗과 같은 이 새 질서는 예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방법과 형태 안에 담겨져 있다. 비유의 형식을 빌린 단순한 언어, 일상 생활에 얽힌 사건들과 사 물들에 대한 반성(루가21,1-4; 13,1-5; 마태 6,26)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분은 제자들을 민중의 삶에 얽힌 문제들과 직접 만나게 하시고(마르 6,37), 어떤 외부의 권위에 도 의존하지 않으시면서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마르 1,22),신분에 구애됨 없이 모든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시며(마태 22,16),어느 장소에서나 가르치시고 여인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받아들이신다(루가8,1-3; 마르15,41). 그분은 어린이들을·어른들의 교사로 소개하시고(마태 18,3),스스로 자유로우실 뿐 아니라 당신과 함께 사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구태의연한 전통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 위하여 자유를 전달하신다(마태 12,1-8). 그분은 당신이 가르치신 바를 사시고 기도로 밤을 지새우시며 다른 사람들 안에 기도하고 싶은 원의를 불러일으키신다(루가 11,1; 5,16; 6,12; 9,18.28; 22,41).

7)예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 아버지를 드러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 선언은 아버지와의 관계와 그분 자신의 인격 형성에 연관된 문제이다. 이 사실을 증명할 길은 없으니 단지 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서서히 깨우쳐 가는 진리로 받아들였다. 예수께서 는 메시아이시다. 이 선언은 예수와 사람들과의 관계와,하느님의 계획 안에서의 그 분의 사명에 연관된 문제이다. 그분은 메시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아무나 보내시지 않고 당신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온전한 선물이다.

“그분은 부유하시면서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드셨다”(2고린 8,9). 그것은 갖가지 이유로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근본적인 선택이다. 예수께서는 로마 시민이 아니 셨고 아무런 사회적 칭호도 안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당대의 바리사이파의 석학 가말리엘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신 바 없고 예루살렘에서 공부하시지 않았으며 박사 학 위도 얻지 못하셨다. 그분의 부모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아들을 봉헌하실 때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쌍을 바치셨다(루가2,24), 그분은 사제 계급 출신이 아니었고 레위나 바리사이도,율법학자나 세리도,사두가이나 에쎈파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평신도요 단순 노동자요 시골뜨기로서 사회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갈릴래아 출신이었다. 지역 사회 안에서 그분의 위치는 원로나 대표자가 아니 있고 어떤 사회적 신분의 보호도 받지 못하셨다. 그분은 목수(마르 6,3) 또는 목수의 아들(마태 13,55)로 알려지셨다. 그분은 나자렛에서 삼십 년 동안 사셨고(루가3,23) 결혼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기 집안에서가 아니라 집 밖의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으니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로마의 억압적 제도 밑에서 고통을 당하신 셈이다. 하느 님의 아들이 나자렛에서 보내신 삼십 년의 세월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당시의 나자렛 사람들 중 아무나 붙잡고 그의 삼십 년 세월을 물어 기록에 남긴 후 거기에 나자렛 예수의 자서전이라고 붙이면 될 것이다. 진실로 “그분은 부유하시면서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드셨다”(2고린 8,9).

어떤 사람들에게는 숙명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단죄된 삶이 예수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 삶이 되었다.. 이 삶을 통하여 하느님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당신의 편애를 드러내셨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에 충실하심으로써 당신의 아버지께 충실하게 남아 계신다.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가난한 사람들 편에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충실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편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것과 똑같다. “여기 제가 있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와 있습니다'’(히브 10,7.9). 아버지와 가난한 자들에게 매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고통을 당하셨고 다른 길을 따를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11; 마르8, 33). 그분은 순명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했는데(히브5,8), 기도를 통하여 극복하셨다 (히브 5,7; 루가 22,41-45), 가난한 자가 그로 인해 단죄를 받는 연약함을 자신의 몸 안에 서 발견했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예수께서는 자기 개인을 위한 길을 찾아 나서신 적이 없고 자신을 위한 특권을 주장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분이 가난한 자로 태어나신 것도 하느님의 뜻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가난한 사람들 편에 충실하게 머무르는 길을 선택하신 것은 죽기까지,“십자가에 달려 죽기 까지”(필립 2,8) 아버지께 순종하시고자 했던 아들로서의 결정이었다.

이상 예수의 행적들이 새로운 복음화의 내용이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요 사람들의 삶 안에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옛 새로움이다. 바로 이 사실에 예수의 말씀이 적용된다.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봅니다”(요한 14,9) ; “나를 믿으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습니다. 나를 못 믿겠거든 적어도 내가 하는 일이라도 믿으시오“(요한 14,11). 이 복음화의 태도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기존의 종교 제도가 가르치는 하느님과 다른 하느님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하느님의 표징들을 삶 안에서 발견하기 위하여 새로운 안목을 전달하는 새로운 태도이다.

3.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내용들(마르 1,16-45)

마르코 복음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짧은 지침서이다. 이 말을 설명할 자리는 아니기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겠다. 다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마르코 1, 16-45의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 대목은 마르코복음의 골격 전체 안에 드러난 기쁜 소식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성취시키고자 하는 목적을,아니면 새로운 복음화 안에 마땅히 드러나야 할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기쁜 소식은 자체의 기원과 근본 내용을 지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마르1,1). 이 기쁜 소식의 선포는 사람들의 삶에 갑자기 낙하산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갈망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다(1,2-3)? 그 것은 구체적인 인물들의 갈망을 통하여 표명되었다(1,4-8). 기쁜 소식의 선포는 시작 (1,9-11)과, 동의 (1,12-13) 와 선포 (1,14-15) 의 순간들이 있었다. 마르코는 자료들을 잘 정리하여 기쁜 소식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성취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7가지로 묘사한다. 아래에 소개되는 7가지 요소들은 오늘 우리가 실현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성격을 보다 면밀하게 고찰하기 위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①마르 1,16-20: 첫번째 제자들의 부르심. 기쁜 소식의 제일 목적은 사람들을 예수 주변에 모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②마르 1,21-22 : 예수의 가르침에 접한 사람들의 탄복, 기쁜 소식은 율법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하여 비판 의식을 사람들 안에 낳아 준다.

③ 마르 1,23-28 : 악마의 추방, 기쁜 소식은 인간의 삶을 파괴시키고 사람들을 자신들 안에서 분열시키는 악의 세력을 거슬러 싸우고 그 세력을 추방한다.

④ 마르 1,29-34: 베드로의 장모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치유. 기쁜 소식은 병든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을 돌보며 그들의 생명을 치유하여 그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해준다.

⑤마르1,35 : 예수께서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다. 기쁜 소식은 기도를 통하여 그 소식의 원천이신 아버지와의 항구적인 일치를 언제나 도모한다.

⑥ 마르 1,36-39 : 갈릴래아의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다. 기쁜 소식은 선교사로 하여금 자신의 선교 사명을 항상 생생하게 의식하고 이미 얻은 결실에 만족하여 거기에 정착하지 말기를 요구한다.

⑦마르 1,40-45 : 한 나병환자가 치유를 받고 사제들에게 파견된다. 기쁜 소식은 소외된 자들을 품어 주고 그들을 인간 공동체의 품안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 7가지 요소들은 예수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실현된 기쁜 소식의 선포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들은 오늘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복음화 과정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가?

기쁜 소식이 역사 안으로 들어올 때 그에 대한 저항과 갈등이 일어난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도 기쁜 소식을 선포한 예수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난 5가지 갈등을 통하여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마르 2,1-3,6).

4.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의 선포

부활의 선포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에 있어서 중심이 된다. 부활은 생명을 파괴하고 말살하는 악의 세력을 정복하신 하느님의 승리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다.

부활 사건이 성령강림 날에(사도2,1-41) 그리고 절름발이의 치유를 통하여(사도3,1-26) 어떻게 선포되었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부활 선포의 기본적 틀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사야에서 이미 살펴본 기본 틀과 똑같다.

탄복을 자아내게 하고 설명을 요구하는 사건 . 성령강림 날’ 사도들 위에 세찬 바람과 혀 모양의 불이 나타나고,사도들이 여러 나라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사도2,1-12). 두번째 사건은 성전 문에 앉아 있는 절름발이가 베드로의 행위를 통하여 치유된 사실이다. 이 사실에 도 사람들은 놀라 설명을 요구한다(3,1-10), 이 두 경우 모두,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이미 해석을 내렸다. “저 열두 사람은 취했군 ! “(2,13), “베드로가 틀림없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3,12).

사건의 진상에 대한 곡해를 반박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다. 성령강림 날,베드로는 자신의 상식을 이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아침 아홉시이니까요”(사도2,15). 두번째 사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묻는다. “여러분은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왜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권능으로 이 사람을 걸어다니게 한 줄로 생각하십니까?”(3,12). 베드로의 이성적 증언은 올바르지 않은 해석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건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일까?

③부활 사건으로 시작되는 올바른 해석, 바로 이 시점에서 본격적인 복음 선포가 시작된다. 사건에 대한 올바른 설명은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고 믿는 데서부터 가능해진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높이 올려져 아버지로부터 약속된 성령을 받으신 다음,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 성령을 쏟아 주셨습니다” (사도2,33), “하느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예수의 이름이 튼튼하게 했습니다. 이는 그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3,15-16).

새로운 해석은 성서로 입증된다. 성서로부터 시작하여 베드로는 사건을 하느님의 보다 넓은 계획 안에로 끌어들이고(사도2,16-21; 3,13), 예수의 부활그자체가구약 성서 안에서 이미 선포된 것임을 보여 준다(2,25-28.34-35; 3,22-25). 동일한 예수께 “그리스도”, “예수”s “예언자”; “종”과 같은 구약성서에서 끌어낸 여러 가지 칭호와 역할이 주어진다(2,36; 3,22.26). 저 두 사건은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의 빛으로 조명되면서 구약성서라는 역사의 강물이 흘러들어 오는 바다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신경 조목을 외울 때 “그분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새로운 해석은 사도들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우리는 그 증인들입니다”(사도 2,32; 3,15). 이 구절은계속해서 반복된다. 개인적 증언은 부활소식의 한부분이다. 사도들의 중언은 공동체의 신앙의 기초가 된다. 사도들의 증언하는 태도는 말씀의 진리를 확인하게 한다.

새로운 해석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 준다. 이렇게 해석된 사건은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예의 사건들은 예수를 살해한 사람들로 하여금 중립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하느님의 도전과 마주치게 해준다. 이같은 해석은 사건들 자체에서 나온다. 사건 자체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러분은 그분을 죽였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의 행위에 찬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예수를 살리시고 모든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권능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2,23-24; 3,13-15).

기쁜 소식은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사도들의 말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 주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도전을 알리고 그 도전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바꿔 주었다. 이리하여 기쁜 소식은 이제 변화, 곧 메타노이아(회두)(사도2,38-40; 3,19-21.26)에 대한 부르심으로 나타난다. 도전은 사도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밝혀진 사건의 진상 그 자체에서 나온다.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의 선포는 교리 의 전달이나 윤리 도덕의 강요가 아니라 예수 부활의 권능이 그 안에서 실현되는 사 건들을 지적하고 그 사건들을 올바로 해석하여 청중들을 위한 양심의 도전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오늘날 여러 대륙 안에서 교회 안팎으로 예수의 부활을 드러내는 사건들은 무엇이며,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도전으로 해석해야 하는 사건들은 무엇인가?

결 론

시간 관계상 신약성서 안에서의 새로운 복음화 과정을 전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복음화 과정의 기본 구조는 살펴본 셈이다. 이 기본 구조는 이사야의 제자들이 시도한 복음화 과정의 구조와 똑같다. 그리고 이 구조는 20세기 마지막에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기본 구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온 작업을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으로 종합하고자 한다. 교황은 새로운 복음화가 “새로운 열정,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으로” 이루어지기를 요청한다.

새로운 복음화는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시작하여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현실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분석할 때, “새로운 열정으로”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새로운 복음화는 그것이 삶의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를 전달하려는 태도 안에 정착될 때, 다시 말해서 새로운 내용을 선포하는 것 이외에 하느님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고,사람들의 생명을 파괴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삶에 관여하시 는 하느님의 활동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모든 악을 고발할 수 있을 때 “새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새로운 복음화는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 안에 육화되고, 사건들의 진상을 밝히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이 권능을 가지고 오시어 당신의 백성을 해방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때,다서 말해서 그것이 공동체의 삶 안에 육화되어 더불어 사는,보다 정의롭고,보다 형제적이고,보다 인간적인 새로운 삶의 형태로 발전할 수 있을 때,“새로운 표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공동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실 효과적인 표징이 될 것이다. 이런 공동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읽혀질 그리스도의 소개장이 될 것이다(2고린 3,2-3). 이 공동체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신 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찢긴 마음을 싸매주며,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알리고, 옥에 갇힌 이들에게는 빛올 던져 주리라.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울음을 기쁨으로 바꿔 주리라·

(원문 : Carlos Mesters, The Bible and the New Evangelization, 정태현 신부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