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8월호 (제 139호)
제 5절 교황 사절 4. 사결의 특전 제 366조 : 사절의 임무의 특별한 성격을 유의하여 1. 교황사...

주일의 말씀
1990년 8월호 (제 139호)
연중 제 18주일 : 8월 5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이사 55,1-3) :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에...

현행 전례주년의 특징과 구조
1990년 8월호 (제 139호)
1. 특징 현행 전례주년과 전례력은 1969년 3월 21일에 ‘로마 전례력’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되었으며 그...

복음 선교의 토착화
1990년 8월호 (제 139호)
일 시 : 1990년 6월 25일(월) 오후 2시~5시 장 소: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희 사 회 : 조광 (고려대학...

나의 고백
1990년 8월호 (제 139호)
지인수( Ernestus Siebertz ) 신부님은 1907년 4월 24일 서독 니델 카슬 태생으로 1928년 5월 9일 성 오틸...

교회와 국가
1990년 8월호 (제 139호)
1. '신앙과 사회'라는 주제 안에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선뜻 응답은 하였으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

주부가 보는 가정, 사회, 교회
1990년 8월호 (제 139호)
대 담 : 김견지 (양동천주교회 신자, 50대), 장윤희 (면목동천주교회 신자, 50대), 탁정숙 (면목동천주교회...

환경 오염과 정책 부재
1990년 8월호 (제 139호)
한국에서도 환경 보전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말부터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

환경 오염과 국민 건강
1990년 8월호 (제 139호)
I. 건강과 질뺑 그리고 환경 인류사를 돌아볼 때 어느 정도의 기복은 있지만 크게 보아 인간의 건강은 ...

환경 오염, 무엇이 왜 문제인가 - 환경 오염의 경제적 시각
1990년 8월호 (제 139호)
I. 머리말 인간의 역사는 자연과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로서 그 관계는 계속적으로 진보되어 왔다고 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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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회 1990년 8월호 (제 139호)

교회와 국가

여형구 (서울대교구 오금동천주교회 신부)

1. '신앙과 사회'라는 주제 안에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선뜻 응답은 하였으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렇게 간단한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사제들이 이십 년이 넘게 정치 운동을 하여 온 것에 대해 교회 안에서도 찬반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이유이다. 둘째, 공교롭게도 근간에 천주교 신자들이 여러 정치 문제에 깊이 관여되어 사건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평민당 국회의원 서경원 씨의 비밀 평양 방문 사건과 천주교 신자인 임수경 양이 평양 축전에 참가하고 문규현 신부와 함께 휴전선을 통과하여 입국한 사건이 그것이다. 또 한 가지는 교황대사 가 모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에서 발언한 내용이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에 모욕 이 되었다 하여 몇몇 사제들이 교황대사를 찾아가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나아가 교황청에 대사의 소환을 요청하고 교황대사직 그 자체마저도 비난을 가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이미 주어진 주제 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나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여 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교회와 국가라는 소주제로 몇 가지 생각들을 펼쳐 보기로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따라 세상에 대해 가르쳐야 할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당신이 가르쳐 주신 복음을 가르쳐야 할 사명을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라는 말씀과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라는 두 성경 말씀에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 예수는 당신의 표양을 통해 가난하고 억눌리고 자신의 권익을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 편에 서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교회 헌장 8항).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잉카 제국의 후손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었다. 15세기 말 남미에 처음 상륙한 스페인 군인들은 그들을 환대하던 원주민들과는 대조적으로 청동기 시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창과 칼로밖에 무장되어 있지 않던 그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제국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정복당한 원 주민들은 그 후 400여년을 노예 상태로 지내 왔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백인 소유의 양 한 마리만 죽여도 일생을 통해 보상하여야 할 만큼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왔다고 한다. 또 이 원주민들의 후손들은 처녀이건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건 간에 백인들로부터 강간을 당해도 법에 호소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좌익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들에게 자유 해방이 주어졌고 농지 개혁으로 자신의 땅을 소유할 수 있는 현실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스페인이라는 가톨릭 국가가 나라를 지키려는 양민들을 죽이면서까지 무력으로 남미 대륙을 빼앗았다는 행위에 대해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던가?

둘째, 나라를 빼앗기고 400년 이상이나 노예 상태로 지내온 원주민들을 위해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였을까?

셋째, 국민 전체가 가톨릭 신자라는 나라에서 좌익 정권이 생겨나게 된 것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400년 전 당시의 상황이나 그 후 400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 할 뿐 아니라 현재의 교회 실정이나 활동, 또 그 국가들에 대해서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이나 교회의 본분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이러 한 질문들은 분명 성립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교회가 그들 원주민들을 위해 하느님을 전하고 그들의 가난과 질병을 물리치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학문과 예술 등을 가르쳤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의 그 처참한 400여 년의 생활을 참고 견디라고만 하여야 했을까? 참고 견디면 천국이 기다린다는 말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데 그쳐야만 했고 좌익 정권이 생겨나도록 방관자 노릇밖에 할 수 없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교회의 진정한 역할 이 무엇이며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상영된 ‘미션’이 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이것은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이 원주민들과 정치적 종교적으로 복잡하계 얽힌 상황 아래서 그들에게 전교의 사명을 띠고 도착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처참한 원주민의 생활상을 보다 못한 젊은 선교사들은 마침내 그들을 위해 총올 들고 만다. 그러나 총을 드는 일은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노 선교사는 대신 성체를 들고 무저항의 저항을 한다. 물론 이들은 성체와 십자가를 든 채 군인들의 총에 의해 무참히 죽고 만다. 여기서 이들 선교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처참한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알면서도 총독부 고위 관리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는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비복음적 태도였다.


2. 역사를 더듬어 볼 때 교회는 고통 받고 억압받는 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대 명제를 수없이 외치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때가 많았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철저히 반성하고 그리스도께서 지상 교회에 주신 이 대명제를 온 힘을 기울여 실천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대명제를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첫째,교회와 국가는 서로 예속되지 않고 각기 자율성을 가지면서 서로 상충 되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마태오 복음 22장에서 예수께서는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는 대답으로 국가라는 실체를 인정하셨다. 더구나 유다는 로마 의 식민지로 로마에 대한 유다인들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다시 말해 유다인들에게는 로마가 결코 옳은 정권이 아니었지만 예수께서는 국가의 실체를 인정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국민의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국가라는 질서가 있다. 교회는 그 직무로 보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는 것이며 고유 분야에서 서로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것이다. 때문에 같은 목적을 가진 두 질서가 서로 상충되지 않고 같은 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한계와 매우 큰 지혜가 요구된다. 예수께서도 당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세상과 교회의 양립성을 드러내시고 있다.


사무엘서 하권에 다음과 같이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다. 다윗 왕은 요압 장군에게 부하 장교들과 전군을 맡겨 전쟁을 치르게 하고 그 자신은 예루살렘에 남아 부하 장교의 아내인 바쎄바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간통을 저지르고 그 남편 우리야룰 죽이기 위해 여러 번을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출중한 군인 정신의 소유자였던 우리야는 아무리 술에 취해도 그 음모에 말려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다윗 왕은 자신의 심복 요압 장군을 시켜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전쟁터로 출정 시키고 다른 군인들은 모두 후퇴케 하여 전사하도록 만든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나단이라는 예언자를 시켜 다윗 왕에게 충고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의 범죄와 예언자 나단의 충고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윗 왕의 죄상은 인간으로서 추악할 대로 추악한 범죄였다. 그러나 나단은 매우 조용한 비유로 다윗 왕을 옛날의 그 신심 깊은 왕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일깨운다. 나단은 하느님 야훼를 빙자하여 다윗의 죄를 헐하기보다는 깨닫도록 하 는 데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국가를 형성하는 그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교회와 국가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서로 같은 노력을 펴나가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둘째, 교회는 권위를 빙자하여 배타적으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사목 헌장 43항)


사목 헌장의 정신은 이러하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일하면서도 불안한 이유들이 생겨날 수 있다. 경제의 불균형, 경제 만능주의의 만연, 사회 계층간의 격차, 빈부의 격차 등이 시행 착오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문제들 때문에 바른 이성을 요구하는 개인, 사회 정의를 위한 정의 평등의 원리를 복음의 빛으로 밝혀야 된다고 말한다(사목 헌장63항)


교회도 2000년을 내려오면서 하느님의 법으로 국가까지 다스리려 하던 데서 많은 시행 착오를 저질렀다. 교회가 하느님의 법을 통해 이 세상을 하나의 홈집도 없는 세상으로 만들려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교만이며 모순이다. 중세 교회를 반성해 보아도 국가 위에 교회가 있었다고 해서 완전한 정치를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타락을 가져왔을 뿐이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질서와 할 일이 있다.


국가도 국가만을 주장했던 잘못들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과거의 파시즘은 행동으로하느님을부인하고국가지상주의를믿었다. 뭇솔리니는 말하기를 "국가 위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런 사고는 결국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어갔다. 과거 미국의 몬로주의는 미국으로 하여금 미대륙에만 관심을 가지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그와 같은 생각은 결국 독일과 영국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여 마침내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야 말았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서로 돕는 역할에 힘을 써야 한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는 매우 쉽지만 개선의 방법을 제시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다른 독립된 개체임을 깨닫고 그 개체로 하여금 올바르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데 함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빵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이다”라고 하신 그 말씀에는 보다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지하철을 타려고 우르르 몰리는 그 무의식 속의 무질서가 모든 사회에 스며들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