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전례 주년의 의미와 발전 역사
1990년 7월호 (제 138호)
사목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부산가톨릭대학장이신 이홍기 신부님의 '전례주년'을 이번 호부터 앞으...

고린토 후서 해제
1990년 7월호 (제 138호)
I. 고린토 옛 고린토는 그리이스 본토와 펠로포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지협 이스무스 (지금은 이스미...

사치 향락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1990년 7월호 (제 138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

나의 고백
1990년 7월호 (제 138호)
조선희 (PiuHp Crosbie) 필립보 신부님은 1915년 11월 10일 호주 빅토리아주 태생으로 아일랜드 성 골롬...

사라져가는 공경심
1990년 7월호 (제 138호)
1. 유년기의 공경심 교육 어린 시절 나는 공경심에 대한 교육을 받았는데 정말이지 나의 첫번째 기억은...

광주 민주화 운동과 문규현 신부에 대한 증언
1990년 7월호 (제 138호)
대 담 : 배종섭(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 김정수(사목 주간·신부) 일 시 : 1990년 5월 23일(수) 오후...

사치 낭비 향락 풍조와 신앙인
1990년 7월호 (제 138호)
I. 머리말 우리가 헐벗고 굶주리던 얼마 전까지도 사치나 낭비 향락 등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

과소비, 향락의 현황과 문제점
1990년 7월호 (제 138호)
I. 머리말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과소비?향락 풍조의 만연에 대한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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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회 1990년 7월호 (제 138호)

사라져가는 공경심

P. 크로니 (도마니코회 신부)

1. 유년기의 공경심 교육


어린 시절 나는 공경심에 대한 교육을 받았는데 정말이지 나의 첫번째 기억은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십자성호를 긋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시면서 매우 느리고 또박또박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발음하셨다、그분은 나에게 무릎 끓고 기도하는 법과 머리 숙여 인사하는 법과 감실의 성체께 경건한 마음으로 천천히 인사하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저녁 묵주의 기도를 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 야생화로 장식한 아름다운 성모상 앞에 반원 형 대로 모여 깜빡이는 푸른 불빛 아래서 함께 기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갔을 때 운동장에서 뛰어 놀기 전에 학교 건물 가까이 붙어 있는 성당에 가서 찬미의 기도와 축복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도 똑같이 하도록 배웠다. 또 성체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 그리고 축복을 청하는 기도를 다시 교육 받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성격 형성 초기부터 하느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어머니는 인내심이 많았고 매우 상냥하셨으며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잘못을 고쳐주실 때에는 엄격하고 공정하셨다. "성당 입구에서 성수를 찍을 때 네가 지금 들어가는 곳이 거룩한 장소임을 생각하여라”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2. 유다교와 이슬람교의 공경 의식


유다인들은 입장이 허용된 성전에 들어갈 때에도 그 입구에 예배 참석자들을 깨끗이 정화하는 물탱크를  마련해 놓았다. 성전에는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즉 사제들에게만 허용된 장소들이 있었으며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성전에서 모시고 있는 오직 한분 하느님께만 봉헌된 곳이 있었다. 그곳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께 바쳐진, 그분 홀로 거하시는 지성소였다. 문득 내가 부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장엄 미사의 부제 복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내가 제의실로 막 들어가려 할 때 미사를집전하시던 신부님께서 꾸짖는 말투로 "자네는 제단의 가장 윗 부분을 지나갈 자격이 없네. 연말에 사제 서품을 받은 후에 그렇게 하게”라고 말씀하셨다.


유다인들은 종교 의식과 관련된 모든 율법들을 철저히 준수하였다. 성전에 각자에게 합당한 자리가 정해져 있었으며 그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배정된 것도 아니었다. 여성들의 구역이 정해져 있어서 그들은 그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남자평신도의 구역이 있는가 하면 사제들의 구역이 있었고 또 특별히 축성된 사람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는 성소가 있었으며 일 년에 한 번 대사제가 속죄의 피를 봉헌하러 들어가는 것 외에는 절대로 금지돼 있는 지성소가 있었다.


나는 최근에 영국 남서부의 어느 도시에 있는 유다교 회당( synagogue )을 발견 했는데 그곳에서는 오직 남자들만이 기도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지역은 이슬람교인들의 것이었는데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예부 살렘에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그 곳을 성전(atemple) 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하람(Harani)으로 부른다네, 하렘 (harem)으로 불리우는 모슬렘들의 집이나 천막을 상기한다면 이 명칭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이 두 가지는 같은 말인데 특별히 가족 중 여자들과 가장에게만 거주가 허용된 장소를 의미한다네. 만약 다른 사람이 하렘에 들어간다면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 되는 셈이지.” 그 친구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람을 방문하도록 허락받았다고 몇 차례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특별 인가를 받아야 했고 몇 가지 종교적 의식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선 그 나에게 하람 입장용으로 배치되어 있는 신발이나 슬리퍼를 신도록 요구했다네. 일상용 신발은 속되기 때문에 거룩한 곳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거야. 그것은 불타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내리신 명령을 상기시키기도 했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애 3.6) 나는 고대 유다교의 사제들이 성전에서 일할 때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특별한 의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네”라고 친구는·말했었다. 만약 천주교 사제가 제의를 입고 상가를 배회 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사제의 미사 의복은 신성한 용도로만 쓰여지고 있으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 정상적인 사람은 아무도 성작을 아침 식사 때 컵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은 ‘모든 것이 제멋대로’이다. 몇 년 전 나는 친구 신부와 함께 한 순례지에서 아홉 명의 그 곳 교구신부들과 미사를 봉헌했는데 나와 친구를 제외하고 두 명은 다른 동료 사제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지에서 물장수를 하는 가난한 이슬람교도의 행동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마치 관상가나 신비주의자처럼 점잖고 조용했으며 하루에 다섯 번씩 있는 기도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히 의식을 거행했다. 그는 기도 시 간을 알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기도용 천조각을 펼치고는 무릎을 꿇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였으며 머리를 땅까지 숙이기도 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고개를 돌리기도 하면서 기도를 올렸다. 이슬람교인들은 외적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은 더욱 깊이 느끼고 완전히 몰입하는 것 같다.


3. 공경심의 의미


나는 위에서 공경심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보기들을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공경심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공경심은 신심(pietas)의 한 부분이다. 고대 라틴어에서 신심 혹은 효심은 부모, 연장자,스승 그리고 조국에 대하여 당연히 지녀야할 존경심이다. 공경심은 '두려워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레베레오르' (revereor)에서 유래한다. 두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말할 때는 자식으로서의 두려움 또는 사랑해 드려야 할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의미한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즐겨 읽었던 캐년 쉬안( Canon Sheehan )의 소설들 중에서「룩 델메즈」( Luke Delmege )에 는 매우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다. "공경심은 모든 종교와 행복의 비밀이다: 공경심이 없다면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경심은 시나이의 각 계명들, 즉 하느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경 내지는 존경의 내적 동기이다. 겸손은 그것에 토대를 두고 있고,경건함은 그것에 의해 유지되며, 정결은 그 안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 종교는 하느님께 대한 공경 그리고 그분과 연관 된 모든 것,즉 당신을 섬기는 이들과 예배 의식과 성전에 대한 공경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정직이란 당신의 이웃과 그의 재산에 대한 공경이며, 순결이란 우리 자신의 깨끗한 몸과 마음에 대한 공경인 것이다. 사탄이 사탄인 이유는 그가 불경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불경했고 조소하는 자였다. 농담하는 자와 흉내내는 자와 크게 웃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 글은 오늘날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일에 열심하고 재빠른 사람들에게 아주 적절한 충고이다. 근원적이고 올바른 의미에서 볼 때는 속된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께서 채찍을 휘두르시며 장사꾼들을 성전 밖으로 내쫓으신 근본적 이유는 그들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 맺음 말 - 외적 형식의 중요성


지금까지 한 말들이 어떤 현대인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더 나아가 종교와 문명에 필수적인 공경의 정신을 상실하여 조상들의 전통을 멸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선조의 유산을 쉽게 내동댕이치는 사람들의 이해 부족을 드러낸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식사의 신성한 측면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음식과 음료를 인간들과의 친교의 수단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분은 세례에서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물을 선택하셨으며 영적 활동을 견고히 해주는 수단으로 육체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기름을 택하셨다. 빵, 포도주,물 그리고 기름은 모두 속된 것이지만 거룩해져서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의 세대가 신성한 것으로 공경했던 것을 탈신성화하는 성급하고도 광적인 움직임은 현대의 이해 부족 때문에 현대인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끝으로 도미니코회 신부인 빈센트 맥냅 (Vincent McNabb) 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진리의 위대한 성전 ㅡ 하느님의 교회ㅡ으로 들어가는 문이 두 개가 있는 데 그것은 지혜(wisdom)의 문과 아름다움(beauty)의 문이다. 내 생각에는 좁은 문은 지혜의 문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넓은 문은 아름다움의 문인 것 같다. 교회는 때때로 일생을 생각하는 일에 바친 소수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을 환대하지만, 교회의 색깔과 노래와 미소를 좇는 ㅡ마치 봄철 태양의 따스함과-빛을 받으러 가는 듯이ㅡ 무수한 신자들을 항상 환영한다. 나는 아름다움의 길이 더 넓을 뿐 아니라 더욱 현명한 길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하느님께 이르는 가장 완전한 통로이며 하느님 자신의 방법이다. 이 말은 특히 미사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미소와 따스함과 밝은 빛을 간직한 오랜 전통의 미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고,진리가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원문: Placid Croney’ “Reverence,', in 1 Christian Order, Vol. 28(1987.3), pp. 165?176,노회성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