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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6월호 (제 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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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6월호 (제 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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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냉담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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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의 선교 역사
1990년 6월호 (제 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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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의 사회 현실 -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1990년 6월호 (제 137호)
I. 머리말 이 글에서 남미(南美)라고 지칭되는 지역은 사실상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중남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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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남아메리카의 교회와 사회 1990년 6월호 (제 137호)

남아메리카의 사회 현실 -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안충영 (중앙대학교교수·경제학)

I. 머리말


이 글에서 남미(南美)라고 지칭되는 지역은 사실상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중남미 국가들을 말한다. 유럽의 라틴 문화를 신대륙에 이식한 후 서반아 말과 포르투갈 말을 사용하고 있는 서반구역 내 국가들을 통칭하여 남미라고 부르기로 하자.


오늘날 남미 국가들은 세계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빚을 가장 많이 지고,원리금을 갚아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이 이 지역에 밀집하여 세계 금융 시장에 커다란 불안의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살인적 물가 오름세가 많은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점점 벌어져 가는 지역이기도 하며 대중의 궁핍화가 심화되어 가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교육 기회가 고르지 못하여 문맹율(文盲率)이 개도국 가운데서 비교적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남미 국가들은 오늘날 대부분이 저성장(低成長), 고물가(高物價)에 시달리며 경제적 좌절을 거듭하고 있다. 지구 표면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남미 국가들은 천연 자원의 부존에 있어서 흔히 세계적 자원의 보고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민구 밀도가 평방 킬로미터당 420명에 비교하여 이곳 남미 지역은 평균 18명 정도에 해당하는 저밀 인구'(低密 人口)를 지니고 있다.


1988년 이곳 국가들의 전체 경제 성장률은 0.6%를 기록하는 데 그쳤으나 인구가 연평균 2.1%로 늘어나기 때문에 1인당 소득 증가율은 -1.5%를 기록하였다. 이른바 저발전만이 ‘발전’되는 지역으로 많은 경제학자들은 분류하고 있다.


개도국 가운데서 농촌은 붕괴되고 도시에는 전인구의 70%의 사람이 밀집되고 있는 대표적 지역이기도 한 남미는 정치적 혼돈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은 군부 쿠데타를 빈번하게 경험하였다. 지난 40년 동안 남미는 무려 100건에 이르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도 했다.


남미의 군부 집권 세력들은 정권 유지를 위하여 특정 이익 집단과 제휴를 하기도 하나 반대 세력에 주로 극단적 물리적 제재를 가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양한 사회적 이익 집단들, 그 가운데서도 노동조합은 본연의 사회적 책무를 벗어나 정치화되는 현상들이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남미 국가들은 독립을 쟁취한 후 20세기 초기에는 한때 세계적 부국으로 떠오른 아르헨티나와 같은 나라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경제는 계속 뒷걸음질치고 있으며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지역이다. 남미가 당면한 저성장,궁핍화,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하는 발전 이데올로기로 종속이론(從屬理論)과 해방신학 등이 이 지역 지식인과 종교인들에 의하여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 글의 기본 목적은 남미 국가들의 공통적 사회 현상 가운데 경제적 측면에 높은 비중을 두면서 그 실체를 조명하여 보는 데 있다.


II. 남미 경제의 역사적 성립


남미 경제는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왜 오늘날의 대공황과 같은 경제적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70년대를 통하여 나타난 석유 파동,1978ㅡ1982년 사이에 진행된 국제 고금리, 1980년 초의 세계적 대불황이 발생하였을 때 남미 국가들은 왜 시의적절한 구조 조정 정책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하였으며 저 성장의 늪에 빠지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서는 중남미 경제 체제의 성립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식민지 시대와 대농장 제도( Latiiundia )


1492년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당시 중상주의 해양 국가로 세계에 군림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미에 존재하던 ‘마야’,‘아스테카’, ‘잉카' 등 원주민 문화를 말살하고 라틴 문화와 가톨릭을 신대륙에 이식함으로써 남미 식민지 경영을 열기 시작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라틴’ 민족의 정복자들은 토지 강점을 통하여 봉건적 대농장 제도(Latiiundm )를 중남미 대륙으로 옮기면서 식민지 경영을 시작하였다. 라틴 민족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식민지 내의 항구 건설과 함께 종주국과 중남미 사이에 자유 무역을 장려하였다. 18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의 물결을 타고 팽창하던 수요에 힘입어 중남미의 ‘라티푼디아'에서는 설탕, 커피, 담배, 카카오, 피혁 등의 생산이 토지 이용의 외연적 확대와 노동력의 증대를 통한 단작 경영(單作 經營) 형태로 크게 발달되었다.


한편 종주국 스페인의 전쟁 비용의 조달과 재정 지원을 위하여 멕시코,페루,브라질 지역에 금은의 생산을 위한 광산 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투자는 토지와 광산으로 몰렸으며,섬유 산업, 포도주 제조, 차이나 웨어 등의 제조업이 부분적으로 일어났으나 유럽 제품과의 가격 경쟁에서 뒤져 18세기 말기에는 완전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이유 때문에 중남미의 제조업은 융성되지 못하고 단일 일차 상품 위주의 생산이 전개되었다. 1980년대에도 중남미 수출의 대종은〈표1〉에서 보듯이 1960ㅡ1980의 기간 동안 중남미 7개국 수출 상품은 구조 고도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1차 상품에 안주하고 있다. 70년대 유가 급등을 제외하고 커피,설탕, 바나나, 쇠고기,코코아, 대두 등의 1차 상품은 공업품에 비교하여 상대 가격이 꾸준히 하락하여 왔다. 이들 1차 상품들은 구조론자들이나 종속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소득 탄력성이 낮고 공산품과의 교환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값으로 팔리기 때문에 교역 조건의 악화로 인하여 남미의 국제 수지를 전통적으로 적자에 허덕이게 하였다.


〈표 1>


정치적으로 미국의 독립(1776)과 프랑스 대혁명(1788)을 계기로 아르헨티나는 1816년, 멕시코는 1821년,브라질은 1822년에 독립 국가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에도 남미 국가들은 근대 국가 형성에 필요한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을 유럽의 기술과 자본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19세기 중엽부터는 미국의 경제적 영향권으로 몰입하게 되었다.


남미 국가들의 독립 이후에도, 식민 종주국의 왕실 측근이나 정복자의 후예들은 농장과 광산의 소유를 계승하여 경제적 지배 세력이 되었다. 공업기반이 없는 이들은 건국 이후 외부 지향 발전 노선을 추구하여 미국과 유럽에 손쉽게 생산할 수 있는 1차 상품을 수출하고 그들로부터 공산품을 수입하는 교역 체계에서 경제 성장과 부를 축적하여 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남미 국가들은 오늘날까지도 1차 상품이 수출의 주종 품목으로 잔류하게 되었고 단작 경제(單作 經濟)의 구조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중남미의 토지 소유 제도는 식민지 시대부터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계층에의 한 대농장 제도(Latiiundia)와 원주민 혹은 경제적 약자들의 소농장 제도 ( Mimfundio )에 의한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대농장 제도와 소농장 제도에 의한 토지 소유 제도는 오늘날까지도 중남미 사회 경제 체제의 중요한 골격이 되고 있다. 대농장 소유주들은 흔히 국가의 사회 간접 투자가 제공하는 외부 경제(外部 經濟)를 최대로 활용하여 그들 토지의 소유와 관리를 강화하여 갔다. 1840년 아르헨티나가 팜파스 평원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갈 때 860만 핵타에 달하는 광활한 토지가 불과 300여 명도 안 되는 지배 계층에 의하여 배분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사회 간접 투자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토지를 매입할 재력이 없는 이주자나 원주민들은 토질과 위치가 좋지 않은 지역에 소농장을 경영하며 생존 경제를 영위하여 갔다.


1950~60년 동안의 중남미 주요국에서 나타난 평균 라티푼디아와 평균 미니푼디오 사이의 토지 소유와 소득의 배수는〈표2>와 같다. 브라질의 경우 평균 라티 푼디아의 면적과 소득은 평균 미니푼디오에 비교하여 무려 546배와 61배의 크기를 각각 시현하였다. 칠레와 과테말라의 경우는 브라질보다 훨씬 격심한 배수를 보여 주고 있으며 여타국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토지 소유와 소득 배분의 격심한 이중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표 2>


2. 소득 배분의 구조적 약화


토지 소유의 원천적 불균등 구조에서 추진된 지역 개발 계획이나 생산성 중대를 위한 일련의 정부 시책들은 소득 분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 했다.


예컨대, 남부·브라질 리오그란데도슬주가 지역 개발을 위하여 소맥 농가들에 저금리 대출과 고가격 수매· 정책을 실시한 결과 지역 소득의 중가는 달성되었으나 성장의 혜택은 결국 라티푼디아의 소유자들에게 거의 독점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지역 전체 농장수에서 0.77%밖에 되지 않는 라티푼디아의 소유주들은 30%의 역내 토지를 소유하면서 지역 개발 정책의 대부분의 이득을 휩쓸어 갔다.


전근대적 중남미 토지 소유 제도가 오늘날까지 잔존하면서 본격적인 토지 개혁이 역사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배 불균등의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정주패턴의 고착성,노동시장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근대제조업 부문에서 고임금,전통 부문과 근대 부문 사이의 기술 진보의 격차는 중남미 국가들의 소득 분배를 더욱 악화시켜 갔다.


<표3〉에 나타난 바와 같이 1970년을 전후하여 중남미 주요 7개국의 최상위 20%의 국민들이 50% 이상의 소득을 점유하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는 무려 66. 60i까지 차지하였다. 최상위 10% 국민들을 기준으로 보면 소득 분배의 양극적 분포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표3>


1970년대 초의 동일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 은행이 발표한 개도국 전체의 소득 분배 기준에 의하더라도 중남미의 경우가 가장 극심한 불균등 구조를 지녔다.


중남미의 소득 분배 문제가 심각한 것은 경제 성장과 함께 악화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표4〉에 나타난 바와 같이 브라질의 경우 1960~70년 사이 최하위 40% 국민들의 국민 소득 점유 비중은 11.2%에서 9.0%로 줄어들었으나 최상위 5%의 국민들은 같은 기간 동안 27.4%에서 36.3%로 소득점유비를 증대시켜갔다. 1인당 소득에서 볼 때 브라질의 경우,하위 80%의 국민들의 경우 정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나 최상위 5%의 국민들의 경우는 1960년의 1,645달러에서 불변 가격 기준으로 1970년에는 무려 2,940달러로 향상되었다.이러한 양상은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등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표4>


중남미의 소득 분배를 도농(都農) 간의 측면에서 볼 때 고소득 계층의 대부분은 도시에 거주하며, 저소득층은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소득 격차는 인구의 향도 이농(向都 離農)을 촉진하여 왔다. 도시 중산층 이상 도시 계층들이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경제 개발 정책이 도시 고소득 계층 편향을 크게 띠고 있다.


3. 미국 의존의 심화


19세기 초기에 독립을 쟁취한 중남미 국가들은 19세기 중엽부터 서반구 결속 (西半歐 結束)을 주도한 미국의 범미주의(pan-Americamsm) 영향권으로 급속히 편입하게 된다. 특히 1889ㅡ90년 미국이 주최한 범미 대륙회의(?美 大陸會議) 이후 중남미는 정치 · 경제력으로 미국의 뒤뜰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 미국은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던 1930년대까지 중남미 국가로 하여금 1차 상품과 원자재를 수출케 하고 미국의 공산품을 수입하여 가는 국제 분업을 조장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중남미의 지배 세력들은 수동적 외부 지향 발전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도 적합한 것이었다.


중남미 국가들의 수출입 대상 지역을〈표5>에서 살펴보면 중남미 국가와 미국과의 상호 의존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중남미 지역은 1960년 이래로 총수출과 총수입의 3분의 1 이상을 미국과 거래하였다. 1950년대와 그 이전에는 중남미의 대미 수출입 의존도는 50% 이상까지도 나타났었다.


<표5>


1950년대 말기부터 중남미 국가들이 본격적인 대내 지향 공업화 정책을 시작 하면서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중남미 진출을 가속화하였다. 수입 대체 공업화를 기본 정책 노선으로 설정한 후 소비재 산업과 부품 산업의 육성을 위하여 중남미 국가들은 선진 공업국 특히 미국으로부터 기술,자본,경영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초기 멕시코의 상위 100개 제조업체들 가운데서 39개 업체는 완전 외국인 기업이었고,19개는 외국 자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나머지 업체들 가운데서 24개는 멕시코 국영 기업체였으며 멕시코인이 경영하는 민간 업체는 불과 20개에 불과하였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도 외국인 기업의 지배는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브라질의 경우에서도 외국인 기업의 진출은 멕시코와 비슷하게 나타났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외국인 투자는 미국계 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표6〉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1970년대를 통하여 중남미에 진출한 외국인 투자 가운데서 미국 계열 기업들이 절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표6>


중남미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은 주로 내구성 소비재와 자본재 산업에 진출 하였는데 주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는 형태를 취하거나 수직적 국제 분업의 형태를 취하였다. 브라질에 진출한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는 브라질 국산차 '핀토‘에 엔진을 공급하였고 ‘폭스바겐 브라질’은 부품을 생산하여 세계 여타 지역에 수출하였지만 이는 다국적 기업의 세계 전략의 일원으로 생산 활동을 한 것이지 브라질의 토착적 자동차 산업의 진흥과는 크게 상관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다국적 기업에 의한 자동차 산업은 필요 이상의 도로 건설,석유 소비,선진국 도시 소비 생활의 전래 등 이른바 국제적 전시 효과를 크게 유발하였다. 브라질의 경제 발전 단계로 보았을 때 이러한 산업의 과잉 조기 투자는 산업 구조의 심각한 왜곡화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III. 남미 제국의 노동조합 운동


여타 측면과 같이 남미 노조의 기원과 성격은 산업이나 국가에 따라, 때로는 종교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광범위한 논의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광의의 개념으로서 노조는 몇 개의 분명한 단계를 거쳐 왔다.


최초의 노조 형태는 이주 숙련공들이 스페인이나 그들이 이주해 온 다른 나라에서 통용 되었던 업종에 따라 특정산업별 '길드’로 그들 자신을 조직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의 경우에는 기술,책임,존경과 권위가 따르는 계급 제도상 계층 구분이 있을 뿐 자본가와 근로자의 구분은 없었다. 지중해 연안 국기들의 길드 조직에서 보는 것처럼 기업 유형에 따라, 길드와 정부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종종 있었으며 길드들은 어느 정도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초기 노동 조직의 중요한 성격은 노동자 중 선발된 자만이 조직화될 뿐,대부분의 미숙련 노동자들은 조직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세기 종반 30년 이후 일반화된 다음 단계는 비상시에 노동자들을 도울 것을 목적으로. 노조는 상호 부조 단체로서 구성된 것이다.


세번째 단계는 19세기의 마지막 20년과 20세기 첫 10년에 걸쳐 유럽으로부터의 남미 이민이 급증하면서 태동된 것이다. 이 시기는 남미로서는 상당한 혼란기였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가 근대화된 유럽의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이다. 미개척 농경지도 점차 없어지고 또 농경지가 있더라도 이주 농민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농사에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주자 중 산업 및 서어비스 분야에 종사,급격히 증가하는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 칠레와 브라질의 도 시 내에 정착하는 비율이 증가하였다.이들 이주자 중 상당수는 그들의 본국에서 출현하고 있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등 새로운 정치,사회 및 철학적 사상을 가지고 이주해 왔다. 많은 조합원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강경한 대립주의는 더욱 대립적이며 폭력적인 수단을·자초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에 더욱 고무되었다.


이데올로기가 노동 운동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노조들은 편협한 기능 조합으로부터 계급 중심의 노조 연함으로 변형되었다.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 경우 참정권을 확대하고자 하는 대중과 그들의 증가하는 압력으로 말미암아 노조는 '정치 기업인’들에게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이들 정치 기업가들은 기꺼이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그들 이익을 위한 정치적 지원을 목적으로 노조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노동 운동의 정치화 현상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노조들은 출신국,직업,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분할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크고 지역적으로도 긴밀히 통합되어 있지 않은 탓으로 노조 스스로의 목표나 전략을 위해 단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선별적 유인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이들 노동 연맹은 어느 정도 통합되어 정부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내부 협력을 촉진 시킬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노조는 충분히 관료적이고 수직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 연맹과 정치적 지배 엘리트에 대한 대립 양상은 결국 새로운 협동과 협력체를 태동시키게 된 것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노조 지도자들이 정부의 지도적 역할을 맡았으며 다른 나라의 경우는 단순히 정부 안 또는 밖에서 정치적 연합에 참여하는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전략상의 변화로 노동 단체들은 그 단체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노조의 주된 목표는 노동 시장 규제와 근로 조건의 개선에 있었다. 예컨대 1950년대까지도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특히 칠레, 우르구아이, 멕시코, .니카라과, 콜름비아,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카나다. 미국,호주, 일본과 스위스에 비하여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 노동 기구가 공표한 노동 규제 협약 중 더 많은 내용을 인준하였다. 사실 노조의 역사가 길고 매우 강력한 영국, 프랑스와 벨기에만이 칠레보다 많은 노동 협약을 인준하였을 뿐이다.


볼리비아,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제외한·남미 제국과 몇몇 중미 공화국(코스타리카 제외)들온 매우 실질적이고 관대한 보험 제도,노령 및 병약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생존권 및 건강 비용 관련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IV. 아르헨티나의 좌절


남미 사회의 경제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아르헨티나는 중요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금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으며 남미 속에 유럽을 재현하여 놓은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아르헨티나 는 경제적 불안정에 시달려 왔다.


1930?83년까지 무려 24명의 대통령과 52명의 경제 장관이 교체되었다. 1940 년대 중반 이후 정부는 투자자로서, 고용자로서, 자금 차입자로서,정부 보조금 의 배급자로서 그 역할을 증대시켜 갔다. 그 결과 정부의 재정 지출은 항상 세입을 초과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더욱 큰 차입(借入)과 통화 증발에 의존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아르헨티나의 재정 적자는 국민 총생산의10%를 넘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아르헨티나는 높은 무역 장벽을 쌓고 수출을 오히려 저해하는 이른바 수입 대체 정책을 취하여 왔기 때문에 수출 부문의 국제 경쟁력은 크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세계 시장으로부터 단절과 정부가 직접 경제를 이끌어 가는 시책은 생산과 노동 생산력을 감소시켜 소득 분배에 있어서 체제 내의 갈등을 야기시켰다.


1945년 이래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율은 세계에서도 가장 높온 나라 중의 하나였다. 연평균 312%를 기록하였다. 1975년 어떤 물건은 터무니없이 비싸게 되어 그 상대 가격을 시정하려는 노력으로 환율을 160% 평가 절하시키고 휘발유 가격을 200%나 인상시켰다. 당시 정부는 임금 인상폭을 45%로 묶으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48시간 노동 엄수 및 파업과 거리에서 정치적 시위를 강행하였다. 그 결과 평균 임금은 150%나 인상되었고, 일부에서 200%까지 임금 인상이 있었다. 정부는 이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정치력의 부재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로드리고 경제 장관은 45일 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1975년 6월부터 8월까지 소비자 물가는 월평균 27,6%나 상승하였으며 그 결과 국민의 각 계층 사이에 부(富)의 이전이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크게 일어났다.


노동조합이 너무나 강하여 임금 인상과 관련한 상대 가격의 조정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높은 인플레는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저축을 보호하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달러화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달러화를 항상 보유하려고 하였으며 이는 곧 경제의 '달러‘화(化)현상을 유발하였다. 높은 인플레가 유발하는 상대 가격의 급격한 변화에서 급작스러운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태도는 아르헨티나 경제 문화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소비자 물가지수는 연평균 207%나 되었으며 최근에 와서는 연간 10,000%를 초과하기도 하였다. 초강성 인플레로 인한 경제의 몰락은 경제의 성장율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아르헨티나 경제는 1946년부터 1974년 동안 3.7%의 성장율을 시현하였으며 1974?83년까지 생산 부진은 계속하여 1인당 소득 기준으로는 9년 동안에 14%나 감소하였다. 이리하여 아르헨티나는 한때 세계 6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86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낙후는 크게 다섯 가지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돼 경제 불안정이 초래되었으며 이는 다시 정치 불안정을 유발하여 경제 정책의 일관성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둘째,정부의 경제에 대한 개입이 과다하여 정부 지출이 계속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적자 재정 정책을 취하게 만들었으며 인플레를 유발하였다. 셋째,대내 지향의 수입 대체 정책으로 자급 자족 경제를 추구하여 국제 경제에서 격리되었으며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자극 없이 안주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넷째,노동조합 운동의 강화로 노동 운동의 정치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영국형의 강력한 노조가 있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형의 탈세(脫稅) 현상이 심화되어 국가 경제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여타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경제 개방과 자유화를 추구하였지만 주로 수입 자유화만 허용하고 수출 촉진은 등한히 하였다. 자본 집약 부 문에서 외국인 소유 기업이 많았고 이들 외국 기업들은 남미 시장의 공략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개도국 가운데서 대내 지향의 수입 대체 공업화를 가장 먼저 시작한 나라가 남미 국가들이다. 이러한 정책을 오랫동안 추구하다보니 경제 발전 전략을 수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남미에서는 소득 분배의 불평등, 계층 간 격차 확대 및 이질감 심화,악성 인플레이션 때문에 경제 발전 정책을 시의 적절하게 바꾸기가 어려웠다.


남미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부조리는 사회적 경제적 엘리트 계층에 의한 해외 자본 도피 현상과 자기 집단의 이익 추구에만 급급하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남미 국가들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였지만 이민이 계속되어 국민의 동질화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국가적 목표라는 공감대의 형성이 어려웠다.


남미의 저발전을 설명하는 데는 경제의 정치화 현상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은 정권 장악을 위하여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임금 인상이 노동 생산성을 앞질러가는 강성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게 되었다. 노조와 정당의 연계화로 인하여 노조의 각종 요구는 경제적 동기보다는 정치적 동기의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노조는 국가 경제 보다는 자신의 이익 보호에 철저하였다. 철강 산업의 경우 생산성 증대를 위해 개방화가 필요했지만 철강 노조는 고용 감소를 이유로 개방화에 전면 반대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많은 여타 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일부 계층이 과점하여 발전의 장애 요인으로 남아 있다. 1940~70년대에 이르는 동안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지주들의 반발에 밀려 토지에 대한 과세를 하지 못하였다. 지금도 토지에 대한 과세는 현실화 되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정치적 불안정,노동 운동의 정치화,각 경제 주체들의 경제하려는 의지의 결여,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강성 인플레, 그리고 경제를 이끌어 가는 민간 기업인의 부재 등이 오늘날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V. 종속이론(從屬糧諭)의 퇴조



남미의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민족적 발전 이데올로기를 남미학자들이 주장한 논리 체계가 종속 이론이다. 오늘날 남미가 당면하고 있는 저발전의 원인을 남미 자체의 대내적 원인보다는 대외적, 원인에서 찾으려는 사회 · 정치 분석의 틀로서의 종속 이론은 50년대부터 시작하여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남미는 물론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3세계 지식인들 사이에 크게 풍미하였다.


종속이론가들은 세계 경제를 발전된 중심부와 저발전된 주변부(周邊部)로 양분하고 이들 양자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의 국제 경제와 무역 체계는 주변부 경제권에 대한 부등가 교환 체계(不等價交換體系)를 강요하여 주변부 경제권의 중심부경제에 예속 착취의 과정을 걷는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남미 국가들이 경험하고 있는 저성장, 궁핍화는 중심권에 의한 착취와 중심권의 경제 세력과 결탁한 국내의 반민족적 매판(買辦) 세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주변부의 빈곤과 궁핍화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적 부등가 교환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대내 지향 정책을 추구하여야 되며 외국 세력과 결탁한 국내의 매판 세력을 타도하는 사회주의적 계급 투쟁을 전개하여야 된다고 종속이론가들은 주장하였다. 종속이론가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회 현상의 분석 방법에서 하나의 안목은 제공할지라도 발전의 ‘대안(代案)’으로서 설득력을 남미에서도 상실하여 가고 있다.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사례에서 보듯이 대내 지향의 경제 운용이 아니라 세계 시장을 과감하게 활용하려는 대외 지향 전략이 훨씬 효과적 발전 전략이라는 사실은 개발 경제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인정되고 있다.


칠레에서 합헌적 절차를 통하여 출범된 아옌레 사회주의 정권이 극심한 경제 불안을 가져오고 곧 붕괴하여 버린 사실 속에서, 폐쇄적 대내 지향과 일당 독재의 정치 체제가 지니고 있는 비효율과 국민들로부터의 괴뢰에서도 종속이론의 독단성과 한계성은 단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VI. 맺는 말


세계 대공황 이후 70여 년을 경제적 정체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저발전의 심화만을 가져왔던 남미 제국에서도 변화의 기류는 최근 크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남미의 모든 나라에서 군부 독재 체제가 붕괴되고 민선 정부에 의한 민주화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남미 개발은행(IDB)의 이글레시이스 총재의 지적대로 민주화외 대장정온 모든 역내 국가에서 시작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니카라과 등에서 민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빈곤의 추방,경제 성장, 정치 민주화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민주주의의 최대 강점을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달성하는 것은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페루의 경우 나라 경제의 65% 정도가 지하 경제로 진단되고 있다. 따라서 경제의 공식 부문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정책들이 효과를 발휘하는 데는 결정적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하경제권은 국가 세금에 포착되지 않은 채 비공식적으로 전개되는 경제 활동을 말한다.


오늘날 남미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와 같은 비공식 지하 경제를 공식 부문으로 개편하고 경제 발전에 대한 국민적 에너지를 창출하고,유능하고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기업인을 대량으로 육성하여야 될 것이다. 우리는 국가가 직접 운용하는 경제 체제가 얼마나 무기력하며 저성장을 자초하는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개인의 창의력이 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시장 원리의 창달이 일어나야 하며 기능과 기술력을 높일 수 있도록 대대적 교육 개혁이 남미 국가들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세계 최대의 곡창이라고 일컬어지는 팜파스 대평원을 지니고 있는 아르헨티나가 최근 식량위기에 직면하여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사고방식, 정치 경제 제도가 경제적 번영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우리는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개인의 창의력이 발현될 수 없는 체제와 제도 밑에서,그리고 민주적 방식을 통하여 에너지의 결집이 일어날 수 없는 국가는 정체의 늪을 헤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남미의 사회 현실에서 우리는 시사 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안충영,「중남미 경제의 구조적 특질」,한국경제학회「경제학 연구」, 1986,8. 안충영,「한국 경제는 종속되어 있는가」,한국경제연구원 환경논총 1-88-01,1988.. 안충영,「개방 경제와 외채-중남미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국제경제학회 제17차 학술 발표 세미나 1986.


김희주,「중남미 경제와 우리의 진출 방안」,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 연구보고서, 1985. Furtado C,  Economic Development of Latin America : Historical Background Contemporary Problems ,Cambridge Univ. Press,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