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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6월호 (제 137호)
제4절 교황청 ⑦ 6개의 사무처들 (Officia) (114-131조) 제1절 상서원 (Cancellaria Apostolica)) (...

주일의 말씀
1990년 6월호 (제 137호)
성신 강림 대축일 (전야미사) : 6월 29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창세 11,1-9) : 막강한 ...

교회의 정의 활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6월호 (제 137호)
IV. 복음화와 정의 예수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명령과 사명을 주...

복음 선교의 토착화 토착화 관점에서 본 복음 선교 이해의 어제와 오늘
1990년 6월호 (제 137호)
일 시 : 1990년 4월 30일 (월) 오후3시 ~6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사 회 : 김정수 (...

해방신학이 남미의 국가 발전과 교회 생활에 기여했는가?
1990년 6월호 (제 137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

나의 고백
1990년 6월호 (제 137호)
배세영( Marcel Pelisse ) 신부님은 1928년 6월 28일 프랑스 랑작( Langeac ) 태생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

사회 정의는 사랑의 표현
1990년 6월호 (제 137호)
이스라엘을 구할 자로 믿었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였을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천...

한국 교회의 냉담자 문제
1990년 6월호 (제 137호)
대 담 : 강형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세나뚜스 부단장),    윤길래 (수유 1동 천주교회 신...

남아메리카의 선교 역사
1990년 6월호 (제 137호)
서 론 천지가 창조된 후 제일 큰 사건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즉 콜룸부스(Cristoba Colon) 가...

남아메리카의 사회 현실 -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1990년 6월호 (제 137호)
I. 머리말 이 글에서 남미(南美)라고 지칭되는 지역은 사실상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중남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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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남아메리카의 교회와 사회 1990년 6월호 (제 137호)

남아메리카의 선교 역사

한조룡 (과달루페 외방 선교회 한국지부장 · 신부)

서 론

천지가 창조된 후 제일 큰 사건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즉 콜룸부스(Cristoba Colon) 가 삼 개월 이상을 바다에서 표류한 후 ‘신세계'를 발견한 것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이 사건은 가톨릭의 나라 스페인으로서는 크나 큰 영광이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유럽 제국들 중 아주 작은 영토를 차지한 소국이 근세사에서 전세계에 걸친 광대한 왕국을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복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특별히 종교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이와 연관된 라틴아메리카의 복음화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신세계가 위대한 것처럼 신세계의 복음화는 대양의 범선처럼,창공의 제비처럼 또는 밀림의 한 마리 짐승처럼 그 지역에 생명과 활력을 주는 위대한 업적이다. 특히 복음화의 역군인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에게 신앙과 교육 그리고 사랑을 베푸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물론 정복자들 중에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기들 왕의 명령을 따라 원주민들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다. 즉 우상 숭배와 악습에서 벗어나게 하고 복음을 가르치면서 그 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열심한 사도처럼 그 명령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그 후임자들은 원주민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등 행패가 심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인디오스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불리어졌다. 선교사들은 새로운 교육 방법을 사용했고 신세계에 최초로 인쇄기를 들여왔으며 농업과 축산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선교사들 은 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땅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우르다네타(Fray Andres de Urdaneta) 는 필리핀에서 멕시코의 아카불코로 돌아오는 항로를 발견했다. 선교사들 중에는 건축가,음악가, 문법학자,의사, 신학자,철학자 등이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한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파노 아메리카(Hispano-America) 의 국가들을 건설하고 전통의 기초를 세운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파타고니아에서 알라스카의 바닷가까지,마겔란 해협에서 루이지애나까지 그리고 필리핀, 중국, 일본 지역을 잇는 복음화의 삼각 지대를 형성했다.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고 적응해야 했으며,한편 원주민들의 교육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최초의 대학은 1551년에 설립된 멕시코의 왕립 및 교황청립 대학교(Regaiis et Pontiiica Umversitas) 이고, 그 다음으로 페루의 성 마르코 대학교가 같은 해에 세워졌다. 선교사들의 철저한 순명 의식과 충실한 선교 활동을 통해서 스페인 본국과 식민지들 간의 우호 관계가 촉진되었다.


다음에서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복음화(福音化)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아르헨티나(Argentina)


스페인 왕국의 후원으로 마젤란(Fernando de Magallanes) 과 그의 탐험대는 아메리카 대륙 원정에서 남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Patagonia)를 발견하였다. 1519년 4월 1일에는 현지의 산 훌리안(San Juliin) 에 상륙하여 십자가를 세우고, 한 사제가 미사를 바쳤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원주민들이 호기심을 갖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몇 년 후인 1536년 2월에는 베드로 데 맨도사(Pedro de Mendoza) 가 현재의 부에노스 아이레스(Bueuos Aires) 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서 요한 가브리엘 신부는 인디안 원주민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글과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서로 죽이고 인육(人肉)을 먹는 악습을 버리게 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첫번째로 설립된 도시는 1536년 2월 2일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였는데 이 도시는 1541년에 파괴되어 1583년에 다시 재건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개척자들은 꼬르뿌스 크리스티 (Corpus Chnsti) 와 파라구아이의 아순시온을 설립하였다. 1560년에는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들어간 정복자들이 맨도사와 산 후안(San Juan) 도시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페루에서 온 사람들이 1565년에 두쿠만(Ducuman) 과 1573년에 코르도바(C0rdoba) 와 산타페 (Santa Ρ?) 를 설립하였다.


탐험된 곳과 도시가 설립된 모든 곳에서 수도회와 교구 사제들이 영성적으로 지도하였다. 아르헨티나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과 수도자 성직자들은 대부분 성실하고 신심이 매우 깊어 선교에 열심이었으나 성직자들 중 일부는 종교 재판 을 피해 온 사람들도 있어서 원주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원주민들을 교화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1570년도부터 착실하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특히 프란치스꼬회와 예수회의 선교사들의 노력이 컸다. 프란치스꼬 회원인 알론소 데 부에나 벤뚜라(Alonso de Buena Bentura)와 루이스 데 볼라뇨스 (Luis de Bolanus) 는 1578년부터, 예수회원인 바르사나(Barzana) 와 베드로 데 아냐스코(Pedro de Aliasco) 는 1586년도서부터 인디오에 대한 조직적인 복음화를 시작하였는데 프란치스꼬 회원들은 지금의 파라구아이의 개척지와 부에노스 아이레스 산타페 등에서도 일하였고 예수회원들은 미시오네스(Misiones) 그리고 파라구아이와 브라질의 부근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 18세기에는 아비포네스(Abipones), 모코비에스(Mocobies), 팜파(Pampa) 등 개척지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2, 볼리비아(Bolivia)


1531년부터 1538년까지 페루에 대한 권리 때문에 프란치스꼬 피싸르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싸움으로 볼리비아의 정복은 연기되었었다. 피싸르로는 알마 그로에게 승리하여 남쪽을 정복하러 베드로 안주레스를 보냈다. 안주레스는 1538년 10월 29일에 자르카스 (Charcas) 를 건설하였다.


1545년에는 원주민 디에고 괄가가 포토사 (Potosi) 에서 은 광맥을 발견하여 그 후 1545년 4월 10일 요한 비자르로엘이 포토시 도시를 설립하였는데 포토시는 세계에서 은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되었다.


볼리비아의 원주민으로는 고원(高原)에 아마라스,케츄아스 족이 살고 있고 산맥에는 목소스 치키또스, 치리과노스 족들이 살고 있는데 프란치스꼬 회원들과 예수회원들이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외에도 식민지 시대에 쎄르세다리오회, 도미니꼬회, 아우구스티노회,성 요한회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였 다. 몇몇 선교사들의 아름을 들자면 치리과노스에서 선교지를 세운 프란치스꼬회 수사인 프란치스꼬 델 필라르,메르세다리오회의 디에고 데 보르레스 신부 그리고 예수회의 베드로 마르반과 지보리아노 바라제, 요셉 데 아르제,루까스 카바제로 등이다.


여자 수도회는 관상회 수녀들만 새 대륙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예를 들면 성녀 글라라회, 아우구스티노모니까 수녀회, 그리고 18세기에 성녀 대 데레사에 의해 개혁된 가르멜 수녀회이다.


1624년에는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대학이 설립되었다.


3. 브라질 (Brazil)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에서 제일 큰 나라이며 세계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다.


브라질은 1500년 4월 22일 베드로 알바레스 가브랄(Pedro Alvarez Cabrai) 이 발견, 점령하였다. 적극적인 정복과 개혁은 1530년에 시작되었는데 첫번째 정복 탐험은 마틴 알폰소 소우사(Alfonso de Sousa)에 의해 이루어졌다.


개척 사업에서 가장 주된 일은 사탕수수 재배였는데 그 일을 위해 1549년부터 1850년까지 아프리카에서 6백만 명의 원주민들이 노예로 끌려 왔다. 원주민만으로는 그 일을 하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이었다. 브라질의 상업의 발달은 나무 벌목과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수확한 설탕, 황금 채광으로 이루어졌다.


1549년 이전에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이미 포르또 세구로 (PortoSeguro) 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그곳에서 일한 이유는 그 지방이 파라구아이 국경과 인접한 곳으로서 스페인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먼저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들어간 후에 예수회도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1549년도에 이르러서는 원주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였다.


1551년 2월 25일에 살바도르에 교구가 설정되었고 리스보아(Lisboa) 족장의 대교구가 이 살바도르 교구를 후원하였다. 그 다음해인 1552년에는 바이아 교구 가설립되었고 교구장에는 베드로 페르난데즈(Pedro Fernandez) 주교가 임명되었다.


4. 콜롬비아(Colombia)


콜롬비아가 정복되고 난 후 1508년부터 프란치스꼬 회원들에 의해 복음화가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공동체 생활로 지도하였고 그들을 정복자들의 학대로부터 보호하였다. 콜롬비아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프란치스꼬회, 도미니꼬회,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들이었다. 프란치스꼬회는 1550년에 이르러 세자 성 요한 회관을 설립하였다. 1529년에는 도미니꼬회원들이 도착,1549년에는 가르타헤나와 산타페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메르세다리오 회원들은 1537년에 칼리에서 수도원을 건설하였고 아우구스티노회원들은 1575년에 산타페 수도원을, 1597년에 ‘은혜의 성모' 관구를 설립하였다. 선교사들은 도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17세기의 콜롬비아는 영성 생활이 매우 발전하였고 성직자들의 수도 매우 많았다.


예수회원들은 로보 게레로(Lobo Guerrero) 대주교와 함께 콜롬비아로 들어가 가르타 헤나와 산타 페 학교를 설립하였고 1610년에는 예수회 관구가 설립되었다. 성 요한 수사회가 16세기 말에,레골레또 아우구스티노회는 17세기 초에 도착하였다. 이상의 언급된 모든 수도회원들은 콜롬비아의 복음 선교 활동에 종사 하였다. 관상 수녀회도 식민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어 1573년에 산타 글라라 수녀원을 설립하였고 그 이후로 1583년 꼰셉시오니스타, 1606년 가르멜, 1645년 성녀 아네스등 여러 수녀회들이 콜롬비아에서 관상생활을 하고 또 여성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위대한 인물로는 성 루이스 베르트란트(LuisBertrand), 흑인들의 사도인 성 베드로 글라베르,아우구스티노회의 프란치스꼬 로메로(1963), 예수회의 알론소 데 산도발(Alonso de Sandoval 1576-1652), 요셉 구밀라(Jose Gumilla 1686-1750) 그리고 요한 리베로(Juan Ribero 1681-1736) 를 들 수 있다.


5. 쿠바 (Cuba)


쿠바는 1592년 10월 27일, 콜룸부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요한나 또는 페르난디나로 불렀다. 콤룸부스의 아들 디에고는 1512년에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쿠바에 정복하러 보냈다. 여기에는 바르돌로메 데 라스카사스와 멕시코를 정복한 에르나 코르테스가 참가하였다.


처음에는 쿠바의 수도가 바라코아였는데 그 이후 산티아고로 옮겼다가 1549년에 곤잘로 페레즈 (Gonzalo Perez) 쿠바 총독이 라 아바나 (La Habana) 로 옮겼다.


6. 칠레 (Chile)


이곳은 남아메리카 대륙 서쪽 기슭의 남단에 있다. 베드로 데 발디비아는 쿠스코(Cuzco)에서 칠레를 정복하러 내려가1541년에 마포초(Mapocho) 강가에 산티아고 시를 건립하고 페루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번째의 탐험(1549)에서 다시 라세레나 도시를 세우고 임폐라알과 발디비아 도시를 건설했다.


칠레의 복음화에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방과는 달리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첫째는 정복한 사람들에 대한 아라우칸 원주민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3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고 둘째는 선교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 과 물질의 결핍이었다. 또 셋째로는 선교사들의 부족이었는데 이 문제는 후에 산 미겔과 메델린 주교가 칠레에 도착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 두 주교가 중심이 되어 교회를 조직하였고 각 지방과 마을로 선교사들이 투입되었는데 양순한 원주민은 쉽게 복음을 받아들여 그들과의 분쟁이 없었다. 예수회원인 루이스 데 발디비아는 호전적인 원주민들의 교화를 위하여 그들에게 적대감을 주는 정복자들의 출입을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예수희원들은 1756년에 카스트로 칠로에 (Castro Chiloe) 지방에 원주민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고 예수회의 폐지 후에는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예수회 선교지를 지도하였다.


7. 에쿠아도르( Ecuador)


프란치스꼬 피사로가 에쿠아도르의 정복을 위해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자르를 파견하였다. 세바스티안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함께 1534년 12월 6일에 산 프란치스꼬 데 키토(Quito) 도시를 설립하고 .1535년 6월 25일에는 과야킬 (Guayaquil)을 건설하였는데 이 도시는 파괴되었다가 오레자나에 의해 1537년에 재건되었다.


에쿠아도르의 복음은 콜롬비아와 볼리비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도회들이 학교를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노회는 1693년 산 풀젠시오 대학교에 신학원을 설립하였고 예수회는 1622년에 성 그레고리오 대학교를,도미니꼬회는 17세기 말에 산 페르난도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에쿠아도르의 첫 교구는 1545년 1월 8일에 설립되었으며 첫 주교는 가르시아 디아스 (Garica Diaz) 아다.


8. 도미니카 공화국 (Dominican Republic)


콜룸부스가 1492년 12월 5일에 도미니카섬을 발견하여 그해 12월 2일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이름으로 점령하였다. 1493년 11월 27일에 라 이사벨라 (Lalsabela) 도시를 건설하였고 1496년 8월 6일에는 콜룸부스의 동생인 바르돌로메가 후에 수도가 된 산토도밍고 도시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원주민들이 많은 고생을 겪었고 스페인에서도 손해가 많았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위 된 보바디자가 바르돌로메와 콜룸부스의 아들인 디에고를 체포하여 스페인으로 송환시켰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복음화는 1493년 버일 (Buyl)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첫 교구가 1510년 전에 설립되었으며 많은 수도원과 학교와 성당,병원 등이 세워져 활발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고, 해적인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산토 도밍고 도시를 약탈하고 방화한 이후에 그러한 침략에 대항하여 산토 도밍고.교회는 대성당과 주교관, 프란치스꼬 수도원, 메르세다리오 수도원, 예수회 회관과 시에나 산타 카타리나,산타 글라라 수녀원과 단결하였다.


특히 특출한 주교들로 인하여 도미니카 공화국의 교회는 더욱 공고해졌으며 스페인 교회와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유명한 주교들로는 인문학자이며 멕시코의 종교 재판 책임자였던· 알렉산더 제랄디니, 고고학자이며 역사가인 아우구스틴,설교자 니콜라스 라모스, 도민고 데 나바레테 등을 들 수 있다.


9. 파나마 (Panama)


15이년에 로드리고 데 바스티야스가 파나마를 발견하고 1502년에 콤룸부스는 파나마의 바닷가를 탐험하였다. 1508년에 누에바 안달루시아(Nueva Andalucia) 와 카스티야 데 오로(Castilla de Oro), 베라과(Veragua)가 정복되었다. 1519년 8월 15일에는 다빗 (David) 이라는 도시가 건설되었다.


10. 파라구아이 (Paraguay)


1524년에 알레호 가르지아가 발견하였다. 알레호 가르지아는 차코 지방을 발견하여 안데스 산맥으로 넘어가는 통로를 찾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에 현재의 파라구아이 수도인 아순시온을 탐험했다. 아순시온은 오랫동안 리오 데 라 풀라타 (Rio de la Plata) 지방의 수도로 정해졌다.


파라구아이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은 프란치스꼬 회원들로서 1537년에 아순시온에 들어가 그곳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에 전파하였다. 그들 중에 유명한 인물로서 알론소 레브론 (Lebron), 루이스 볼라노 (Bolanos),베드로 페르난데즈 데 라토레(Torre 파라구아이 첫번째 주교), 그리고 마르틴 이냐시오데 로욜라 (Loyola) 가 있다.


프란치 스꼬회를 이어서 메르세다리오회와 예로니모회,도미니꼬회가 도착하였고 맨 마지막으로 예수회가 들어갔다. 각 수도회는 자기 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와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다.


파라구아이 복음화의 장애 요인으로는 첫째,원주민의 언어를 배우는 데 따르는 어려움,둘째,원주민들의 잦은 이동,셋째,포루투갈 폭력배들의 파괴 행위, 넷째,위정자들과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립을 들 수 있다.


파라구아이 복음 사업의 특장은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음악과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상업 학교와 공업 학교를 설립하여 원주민들을 가르친 것이다. 이 방법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1. 페루 (Pera)


1522년에 바스칼 데 안다고야가 탐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531년에 프란치스꼬 피사로가 파나마에서 출발하여 1532년에 피우라(Pium)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 안데스 산맥을 넘어서 카하마르카(Cajamarca) 에 도착하고 황제 아타 알파(Atahualpa)를 사형하였다. 1535년 1월 18일에 리말 강가에서 리마(Lima) . 도시를 세워 베네수엘라를 제외한 전남미를 지배하였다.


페루의 정복과 동시에 선교사들이 복음화를 시작하였는데 페루에 진출한 수도회는 도미니꼬회,프란치스꼬회, 메르세 다리오회,아우구스티노회,예수회 였다.


유명한 인물로는 리마의 성녀 로사,성 토리비오 데 모그로베호,성 프란치스 꼬 설라노 등인데 성 프란치스꼬 설라노는 아르헨티나에까지 가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이외에도 사목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이 있는데 메르세다리오회의 디에고 데 포레스 신부는 2백 개의 성당을 세우고 8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도민고 데 산토 도마스는 케츄아 (Qiiedma) 말로 첫 교리 문답을 만들었으며 아우구스티노회의 오르티스는 순교를 당했다.


페루에서는 제1차 공의회(1551ㅡ1552)를 시작으로 여섯 차례의 공의회가 있었다.


12. 우루구아이 (Uruguay)


우루구아이 영토는 1516년도에 요한 디아즈데 설리스가 발견하고 카스티야 스페인 왕의 이름으로 점령하였다. 인디오 원주민들은 차르루이스와 자메스,바아네스, 야로스 그리고 괴노아스 종족으로 구성되었고 그 수는 5천 내지 6천명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관리자들은 우루구아이 영토를 목장으로 만들 목적으로 가축들을 들여와 그로 인해 우루구아이의 지방이 발전되었다. 이것을 역사가인바우자 (Bauza) 는 “야만의 어둠속에서 우루구아이 지방에 하나의 크리스찬 도시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우투구아 이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프란치스꼬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우루구아이로 들어갔다. 베르나르디노 데 구스만은 우루구아이에서 처음으로 개척지를 건설하였는데 어떤 역사가는 “우루구아이 개척자인 베르나르디노 데 구스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원주민들을 야만적인 생활에서 개화하고 윤리적으로 유익한 일에 대한 덕행을 연마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라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었다. 프란치스꼬 선교사들이 도착한 다음에 예수회원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복음 사업에서 특히 청소년들의 교육에 주력하였다.


13. 멕시코(Mexico)


1517년 코르도바가 쿠바에서 출발하여 유카탄 반도와 캄페체에 이르러 포톤찬 (Potonchan)까지 도착하였다. 그러나 원주민들과의 싸움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겨 쿠바로 되돌아갔다.


그 다음해인 1518년 5월 1일에 요한 데 그리할바가 쿠바에서 출발하여 멕시코 지방으로 탐험하다가 Sacnficia Humana 섬을 발견하였고 베라크루스(Veracruz) 에서 오리사바(Orizaba) 의 꼭대기를 볼 수 있었다.


1519년 2월 10일에는 코르테스가 쿠바의 산티아고에서 출발하였는데 1519년 4월 21일에 베라크루스 도시를 건설한 다음 11월 8일에 트락스칼라를 통해서 첫 번째로 멕시코 수도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코르테스의 장군인 알바라도의 잘못으로 인해 그는 멕시코 도시를 도망하여 트락스칼라로 갔다.


1521년 8월 21일에 멕시코 도시는 함락되었다.


멕시코의 복음화는 코르테스의 멕시코 탐험 때 메르세다리오회의 올메도 (Olmedo) 신부가 코르테스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에 의해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523년 5월 1일에 정식으로 첫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도착하였다. 그중 칸테 (Cante) 수사는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한 아메리카 대륙의 유명한 교육자 중의 한명이다. 1524년 5월 13일에 프란치스꼬회 12명이 더 들어왔고 1526년 7월 2일에 도미니꼬회 12명이 도착하였는데 이중 5명은 일찍 사망하였다. 그리고 1533년 5월 22일에 아우구스티노회 7명이 도착하였다.


이후로 각 수도회는 번성하여 1555년도에 프란치스꼬회는 380명의 회원에 80 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고,도미니꼬회는 210명의 회원과 40개의 수도원이, 아우구스티노회는 212명의 회원과 40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1530년에 멕시코 시티에 첫 교구'가 설립되었고 첫 주교로는 원주민들의 보호자였던 요한 데 수마르 라가(Juan de Zumarnaga) 였다. 멕시코의 복음화는 멕시코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에 전파되었는데 남동쪽으로는 중아메리카,북쪽으로는 루이지애나까지 태평양 쪽으로는 캘리포니아와 필리핀,일본에까지 이르렀다.


* 필리핀 (Philippines)


마젤란이 세계를 탐험하면서 1520년 말에 남미 대륙 마겔란 해협을 발견한 다음에 1571년 4월 7일 필리핀 군도인 비사야(Bisayas), 민다나오(Mindanao) 그리 고 세부 (Cebu)에 기항하여 이 군도를 성라자로(SanLazaro) 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후에 스페인 왕자인 필리포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고 불었다. 마겔란은 막단(Mactan) 섬 원주민들과의 전투 중에서 부상을 당하여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 엘카노(Elcano) 가 탐험을 끝까지 완성하였다. 1543년 2월 2일 루이 비 잘로보스가 민다나오에 기항하였고 1564년에는 미겔 로페즈 데 레가즈피가 테이 테 (Leyte) 에 기항 후 1565년 2월 13일에 섬의 추장들과 협정하여 섬을 점령하고 15기년 6월 24일에 마닐라(Mamla)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는 후에 필리핀의 수도가 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도 아우구스티노회(1564년), 프란치스꼬회(1577), 예수회(1581), 도미니꼬회(1587) 등 수도회 선교사들을 필두로 조직적인 복음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선교사들은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필리핀의 첫 교구는 1578년에 마닐라에 설정되었고 첫 주교는 도미니꼬회의 도민고 데 잘리자르였는데 그는 1582ㅡ1586년에 필리핀 종교 회의를 소집하였다. 1614년에는 아시아에서 유명한 산토 토마스 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백년이 지난 후에는 신자수가 2천만에 이르렀다. 이때는 성직자들의 반 수가 원주민들이었으며 교구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마리아나스(군도)와 카를리나스와 그 외 대양주 가까운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 예수회의 해산


남미 선교의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예수회가수도회 외적 요인에 의해서 활동 금지를 당한 것은 교회사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볼테르(Voltaire) 를 대표로 하는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이성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와 모든 수도회,특히 예수회를 파괴하려고 힘썼으며 얀세니스트들과 프리메이슨도 예수회를 반대하여 비방 선전을 퍼부었다.


포르투갈의 수상 폼발(Pombal)은 1759년에 예수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회원들을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에서 추방하였으며 지하 감옥에 가두고 경멸적인 대우를 하였다. 계몽주의, 갈리까니즘(Gallicamsm), 얀세니즘의 진원지인 프랑스에는 예수회의 원수들이 특히 많았다. 마담 폼파두 (Madame Pompadour) 와 수상 스테파노 초아셀이 계몽주의자들을 보호하였으며 루이 15세는 1764년에 프랑스 식민지에서 예수회의 활동이 불법이라고 선언하였다. 스페인도 1767년에 예수회의 재산을 빼앗고 회원들을 추방하였으며,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실리아 왕국도 1768년에 1,400명의 예수회원을 내쫓았다.


교황 클레멘스 13세(1758ㅡ69)는 부르봉 왕조의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예수회를 박해로부터 보호하였으나 그를 계승한 클레멘스 14세(1769-74)는 즉위 후 4년 동안은 최종적인 결정을 미루어 오다가 예수회의 반대자들아 이교하겠다고 하자 결국 1773년에 소칙서「도미누스 악 레뎀또르」(Dommus ac Redemptor) 를 통해 예수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정황에 미루어 볼 때 교황은 예수회를 단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조치를 취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교황의 명령은 가톨릭 교육, 특히 식민지의 교육을 마비시켰으며 그 후 아무도 예수회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었다.


결  론


라틴아메리카의 선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회의 활동과 18세기 유럽의 사회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는 프랑스 혁명이나 계몽사상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고 사실 영성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도 외부의 영향이 강력히 작용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외형상으로는 신세계의 복음화를 완수했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산출한 것도 사실이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이 마치 정복자가 피정복민에게 강요하듯이 복음을 주입시키거나 원주민들의 전통과 관습을 무시하고 무조건 자기들 식의 신앙을 주입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삶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낯선 생활과 문화를 강요하는 폭군의 명령이 될 것이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전통 문화와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분별력과 관대함을 동시에 지니며 모범적인 생활로써 일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Daniel Olmedo, Manual de Histㅇria de la Iglesia, Tomㅇ 1 , Mexico 1950.

* Joseph ILL. Schlarman, Mexico Tierra de Volcanes. De Hernan Cortes a Miguel Aleman, Mexico 1951.

* Alfonso Jonco, Inquisicion sobre la Inqmsicion, Editoral Jus Mexico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