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6월호 (제 137호)
제4절 교황청 ⑦ 6개의 사무처들 (Officia) (114-131조) 제1절 상서원 (Cancellaria Apostolica)) (...

주일의 말씀
1990년 6월호 (제 137호)
성신 강림 대축일 (전야미사) : 6월 29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창세 11,1-9) : 막강한 ...

교회의 정의 활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6월호 (제 137호)
IV. 복음화와 정의 예수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명령과 사명을 주...

복음 선교의 토착화 토착화 관점에서 본 복음 선교 이해의 어제와 오늘
1990년 6월호 (제 137호)
일 시 : 1990년 4월 30일 (월) 오후3시 ~6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사 회 : 김정수 (...

해방신학이 남미의 국가 발전과 교회 생활에 기여했는가?
1990년 6월호 (제 137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

나의 고백
1990년 6월호 (제 137호)
배세영( Marcel Pelisse ) 신부님은 1928년 6월 28일 프랑스 랑작( Langeac ) 태생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

사회 정의는 사랑의 표현
1990년 6월호 (제 137호)
이스라엘을 구할 자로 믿었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였을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천...

한국 교회의 냉담자 문제
1990년 6월호 (제 137호)
대 담 : 강형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세나뚜스 부단장),    윤길래 (수유 1동 천주교회 신...

남아메리카의 선교 역사
1990년 6월호 (제 137호)
서 론 천지가 창조된 후 제일 큰 사건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즉 콜룸부스(Cristoba Colon) 가...

남아메리카의 사회 현실 -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1990년 6월호 (제 137호)
I. 머리말 이 글에서 남미(南美)라고 지칭되는 지역은 사실상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중남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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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대담 1990년 6월호 (제 137호)

한국 교회의 냉담자 문제

강형일 / 윤실래

대 담 : 강형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세나뚜스 부단장), 
  윤길래 (수유 1동 천주교회 신자)

사 회 :  최 철(사목편집장)

일 시: 1990년 5월 10일(목) 오후 2?4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이번 사목 대담에서는 20여 년 간의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통하여 예비 신자 권면과 냉담자 회두에 꾸준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강형일(투도비꼬) 씨와 여러 가지 주위 사정으로 인하여 두 번에 걸쳐 냉담하다가 회두하여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시는 윤길래(요세피나) 씨를 모시고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의 냉담 실태와 그 원인 및 대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회자 : 지난 4월 말에 집계된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1989년 12월 말 현재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 총수는 2,613,267명으로 250만 명을 넘어서 이제는 신자수 300만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냉담자수 역시 262,515명으로 10년 전부터 유지되어 오는 10%선을 꾸준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수의 증가와 함께 비슷한 비율로 증가하고 있는 냉담자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수치(數値)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오늘 오랫동안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통하여 많은 냉담자를 접하신 형제님과 한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경험하신 자매님을 모시고 냉담자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책을 들어볼까 합니다. 먼저 냉담자라고 할 때 그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형일 : 교세통계표 상으로 나타난 10%의 냉담 비율에 대하여 우선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저희가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냉담 비율은 오히려 그것을 앞지르고 있지 않나 합니다. 교회에서 집계하는 냉담자의 냉담 기준은 봄, 가을의 판공성사를 기준으로 판공성사룰 보지 않으면 냉담했다고 일차 분류를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그런 방법 외에 정확한 집계를 내는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록 판공 성사는 보더라도 가톨릭 신자로서 자기가 해야 할 본분을 하지 않는 사람까지 냉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냉담 자라고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더 넓게는 자신 있게 자기가 신앙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냉담자로 분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윤길래 : 저 자신도 그 의견에 동감합니다. 물론 판공성사가 냉담자 분류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실제로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0년이 아니라 한달이든 두달이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든가 아니면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나 불신의 감정을 지니고 있을 때는 바로 그 때가 냉담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형일 : 그래도 주일 미사를 거르지 않고 나오는 사람은 냉담자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합니다. 그러나 주일에 대한 어떤 의식이 없이 시간이 남으면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놀러 가거나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요즈음 레저가 많이 보급되고 발전됨에 따라서 등산이나 낚시,골프 등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해서 여가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고,이 사람들은 어쩌다 한번 생각날 때 성당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나름대로 판공성사도 보고 기도도 한다지만 저는 그런 사람들도 냉담자(물른 본인이 듣기에는 억울하다고 할지 모르지만)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신앙이 식었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주일 미사를 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기가 조금만 노력하면 빠지지 않을 수 있는데도 주일 미사룰 권한다면 냉담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무방합니다.


사희자 : 네,냉담의 기준을 상당히 폭넓게 규정해 주셨는데 신앙이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에서의 만남이라고 볼 때 어떤 규정이나 외적인 것보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과의 만남에 적극적이고 열심하게 생활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떠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강형일 : 냉담은 크게 말하자면 두 가지로 형성됩니다. 자의에 의해서 될 수도 있고 타의에 의해서 될 수도 있는데,엄밀히 말하자면 타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냉담의 구체적인 결심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천주교 신자가 많지 않은 경우에는 타의에 의한 냉담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혼종 혼배나 비신자와의 결혼에서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냉담의 현실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결혼할 때에는 결혼 후에 성당에 나가겠다고 하지만 막상 결혼해서는 비신자인 자신은 물론 신자였던 상대방까지 성당에 못나가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경우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황으로 이것은 타의에 의해서 냉담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타의에 의한 냉담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의에 의한 것은 어느 시기에 가면 해소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부모님이 성당에 못나가게 해서 냉담을 할 수밖에 없을 경우,물론 빨리 돌아가시라는 것은 아니지만 시부 모님이 어느 시기엔가는 돌아가실 것이고,남편이 반대할 경우라면,어느 시기엔가는 남편이 부인을 따라가게 되어 있기에 그 시기에 따른 차이는 있겠지만 타종교인이나 비신자와의 결혼 생활에서 생기는 냉담은 결국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자의에 의해서 냉담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물론 이것도 주위 환경이나 외부의 어떤 상황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의에 의한 냉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 관계입니다. 제가 레지오 활동을 하다가 경험한 것인데, 본당 신부님께서 누가 냉담 중이니 활동을 나가라고 하셔서 만나 보니까 그 신부님 때문에 성당에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고 이유를 물어 보면 여러 가지 대답들이 나옵니다. 사실 영세받고 처음에 성당에 나오면 뭐든지 낯설고, 자기 신심도 얕고,기도도 잘 못하고 아는 사람도 적어서 활동에도 적극적이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신부님께서라도 성당에 오면 악수도 하고 그러면 좋은데 아주 쌀쌀맞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고백성사를 볼 때,많은 분들이 고백소에 들어가서 떳떳하게(?) 제대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떨리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더듬거리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신부님들이 안계시지만 옛날에는 그럴 경우 안 에서 신부님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고백성사뿐만 아니라 성 당에 나오는 것도 꺼리게 되고 결국 냉담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신부님이 가시면 다시 성당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생활을 하다 보면 그것이 자기 몸에 배어서 다시 나오는 데 오랜 시일과 커다란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뺏기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제 어느 정도 살 만해지고 레저 산업도 발전하니까 자기 자신의 취미나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이 앞서서 냉담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생활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는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면 더 잘 나올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어떤 열등감을 느끼고 안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중산층화와도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어떤 분의 경우 제가 찾아가서 ‘왜 안나오십니까' 하니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서 못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신앙 생활을 하는 데 그것도 이유가 되느냐’고 하니까 '그래도 남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모양이라도 내고 오는데 자기는 맨날 꾀죄죄하니 창피해서 못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일 때문에 못나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신의 직장 생활 때문에 못나오는 사람들은 타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자기가 나올 수 있을 때도 안 나오게 되는 것 이 문제이지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다방에서 차를 나르는 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주일은 쉬고 한 주일은 일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한 주일 건너서 성당에 다니더니 나중에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니까 아예 안 나옵니다. 이런 경우도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윤길래 : 여러 방면으로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제 자신의 경우를 말씀드릴 까 합니다. 저는 태중 교우로 유아 영세를 받았고 아버지께서도 전교회장을 하 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어릴 때는 매일 미사도 안 빠지고 다닐 정도로 열심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안에 아들이 없이 딸만 여섯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아들을 낳다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께서 성당에 나가시지를 않았고 우리 자식들이 성당에 나가는 것도 금하셨지요. 아마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대단하셨던 것 같아요. 아직도 아버지께서는 성당에 안 나가시지만 많은 갈등을 겪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신앙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했는데 불교 집안 사람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 둘을 낳고 아이들이 조금 자라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해주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신앙심을 길러 주는 것이 가장 큰 유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남편도 그때 영세를 해서 같이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 6개월 가량 신앙 생활을 했는데 남편의 일이 잘 안되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남편 온 천주교가 우리와는 맞지 않는 종교라고 했고 저도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냉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속으로는 신앙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신앙 문제 때문에 남편과 다투는 것도 제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기에 냉담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시기인가제가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절박한 상황이 닥쳤습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이러다가는 세상이 어떻게 되지’, ‘이러다가는 내가 죽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레지오 단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부터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정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고상이고 성모상이고 보이기만 하면 다 때려 부수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흔들림이 없었고 남편과 다투는 두려움도 이길 수 있었고, 주님께 다른 무엇보다 그냥 제가 성당에 계속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는 기도만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처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저의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되었고 그렇게 어려운 중에 신앙 생활을 한 2,3년 하다 보니까 올해 1월부터는 남편도 다시 성당에 나가게 되어서 이제는 아침 미사도 같이 나갑니다. 이와 같이 어느 누구의 강압에 의해서 냉담 하는 경우가 있지만 제 경우에 비추어 보면 누구를 탓하기보다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가 올바로 정립되어 있고 중심이 잡혀 있다면 그런 것은 다 핑계인 것 같아요. 제 경우에 물론 아버님의 강압도 있었고 남편의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 그것은 핑계였습니다. 신이 하느님을 첫째로, 우선으로 여기면 다 극복이 되더라구요. 특히 제 남편은 유난히 별난 편이어서 핍박도 더 많이 받았지만 제가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시라고 기도드리며 꾸준히 나가니까 남편까지도 하느님께서 붙잡아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냉담의 동기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첫째 위치에 놓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주위의 환경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교무금부터 시작해서 여자들은 특히 옷차림 같은 것, 남 보기에 초라해 보인다는 느낌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고, 신자들끼리도 저 사람이 보기 싫어서 안 나온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열심하다는 사람이 저 모양이니 성당에 나가면 무엇하느냐는 것이지요. 특히 신심 단체나 본당 활동을 사람들 중에 냉담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이러한 자기 이웃에 대한 미움이 그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원인이 자기 자신 안에도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께 탓을 돌리는 것이지요.


강형일 :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기복적(祈福的)인 요소를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가질 때 순수한 종교적인 것보다는 복을 바라고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현세적인 이익을 바라고 종교를 갖는 것이지요, 그럴 때 자기의 요구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주위에서 제가 입교 권면을 해서 영세를 받게 하고 한 때는 레지오 활동도 열심히 하던 청년이 있었는데 결혼식을 성당에서 하지 않고 일반 예식장 에서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까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할 때도 자기 자신만 신앙을 가지고 자기 가족들에게는 신앙에 대해서 전혀 관심도 갖지 않았었고, 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다리를 다쳤는데 어머니가 그것이 천주교를 믿기 때문 이타고 하니까 그 사람도 그런 것 같이 느껴져서 냉담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양심에 걸리는 것이 있기는 했겠지만 주위에서 워낙 강경하게 말하니까 그냥 그 것으로 그만둔 것이지요, 또 한 경우는 전공인데 가족이 모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전주에 올라갔다가 감전이 되어 떨어져 크게 다치니까 주위에서 종교 때문이라고 하더랍니다. 천주교를 믿어서 그런 것이니까 불교를 믿어 보라고 해서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저희가 열심히 방문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아직도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이런 예들이 바로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신앙관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원했으면 꼭 주셔야 한다는 기복적인 요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종교를 기웃 거리는 것이지요.


사회자 : 상당히 다양한 이유로 냉담하는 신자들을 만나시면서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기도도 드리는데 다행히 우리 교회로 돌아오면 큰 보람도 느끼시겠지만 자기 고집을 세우고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어떤 좌절도 느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가장 어려움을 느끼시는 때는 언제인지요?


윤길래 : 상대방이 인간적인 아집을 가지고 그것을 버리지 못할 때입니다. 특히 지식이 있거나 남보다.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자기 나름대로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고,그것이 확립되어 있으니까,하느님이라는 절대자의 존재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것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잘 안 부서집니다. 마음이라도 열고 순수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좋겠는데 오히려 어거지라도 자기주장을 내세우지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어렵습니다.


강형일 : 네, 그런 사람들이 참 어렵습니다. 냉담자 회두는 아니지만 제가 입교 권면한 사람 중에 개신교 집사로 대학교수를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론이 굉장히 정연합니다. 그분을 입교시키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냉담자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구교우였던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자신들보다 천주교 교리를 더 잘 압니다. 그리고 제일 어려운 사람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예, 나가야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하면서 안.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몇 년이 걸려도 안 나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 길으면 우리가 설득을 해서라도 끌어들일 수가 있는데, 잘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까지 다 알기 때문에 아주 힘듭니다. 그런데 거절은 하지 않습니다. 자주 만나기도 하고 남자라면 같이 술잔도 기울이면서 ‘곧 나가야지요' 라고 쉽게 대답하면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안 나간다고 그래야 이야기 도 되고 설득이라도 할 텐데 나간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도 없습니다.


윤길래 : 그리스도나 신앙에 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이는데 마음으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회자 : 그러면 냉담을 하던 사람들이 회두하여 돌아오는 것은 어떤 계기가 주어졌을 때일까요? 또 많은 활동을 통하여 경험하신 것에 따르면 냉담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대개가 돌아오는지요?


강형일 : 돌아오는 동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구교우였다가 냉담한 신자들은 마음속에 자신이 신자라는 생각은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이 분들이 성당에 가야 할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 누가 권고하면 성당에 다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이 얕으신 분, 신자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다치신 분들은 거의 안돌아옵니다. 구체적인 계기를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사업이 크게 실패하거나 큰 병에 걸리든가 하면 이런 사람들은 100% 회두합니다. 냉담이라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있는 데 사업이 실패하거나 큰 병에 걸리면 벌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에 회두하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어떤 어려움, 예를 들어서 자기 자식의 입학 험 때가 닥치든가 하면 인간적이 아닌 절대자의 존재에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종교를 찾기도 하는데 냉담자들이 회두하는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 경우 자식이 합격을 하면 계속해서 성당에 나오지만 만약에 불합격되면 다시 냉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냉담 원인을 말씀드릴 때 나왔지만 우리 한국인의 기복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복적인 요소가 냉담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냉담으로부터 회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윤길래 : 자는 그 시기나 동기를 우리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회두의 계기가 될 수 있고,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냉담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시기도 전혀 알 수 없지요. 그런 것은 오직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 이 회두의 계기도 되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냉담의 계기도 되거든요. 같은 사람이라도 사업에 실패해서 냉담을 했는데, 그 후 사업이 잘되다가 갑자기 다시 사업이 망해서 신앙을 찾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것이 냉담자가 회두하는 동기가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저의 집 같은 경우에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 남편은 냉담하면서 아주 심한 말까지 하면서 성당에 나가는 것을 막았었어요. 자기 기분에 따라서였지요. 기분이 좋을 때는 제가 성당에 갔다가 조금 늦어도 그냥 넘어가는데 자기 기분이 나쁘면 아주 심하게 하느님께 대해서 반발을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갑자기 제가 하는 주방 일을 돕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끓는 기름이 얼굴과 팔에 튀어서 많이 데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또 난리가 났을 텐데 그렇지 않는 것이었어요. 오히려 그 후 주일이 되니까 ‘나도 미사 좀 갈까? ‘ 하는 것이었습니다. 7년 만에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 기뻤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 싫어서 다시 안 나겠다고 할 것 같기도 하고, 또 별 반응을 안보이면 무심하다고 그럴 것 같기도 해서였지요.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계기는 우리가 짐작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몇 주 성당에 나가다가 성탄 밤 미사 때,제 남편이 장이 좋지 않아서 그 날도 미사 중에 배가 아파 고생하다가 그 사람이 하느님께 '미사 시간에만 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드렸는데 참을 수 있었대요, 그리고 정말 감쪽같이 다음 날부터는 안 아픈 것이었어요, 사실 신앙심 때문은 아니었는데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서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같이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하느님이 관심을 가지고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할 뿐이지요.


사회자 : 냉담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사실 냉담자를 회두시키는 것도 중요하나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무엇보다도 냉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냉담자를 끌어들이는 노력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냉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형일 : 네,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냉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냉담의 원인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고라는 우둔한 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양하고 개별적인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온 쉬운 일도 마니고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신자 관리의 철저입니다. 사무적인 관리가 아니라 신자들의 영성 문제에 관한 철저한 교육이지요. 냉담자의 절대수가 늘어나는 원인 중에 지금 가톨릭 신자의 양산도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명동 성당만 해도 1년에 본당 하나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신자가 영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이끌어 주는 관리가 아주 부실합니다. 본당이나 교구 또는 전진상 교육관이나 서강대학교 등에서 신자 재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실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의 참석자는 상당히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명동 성당의 신앙학교의 경우에 장년층 은 거의 없고 청년층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도 대부분이 영세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신자들입니다. 영세받은 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자기가 신자 생활을 오래했다는 타성에 빠지고 또 신자 재교육과는 자기가 관계없다는 헛된 자부심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나 어떤 사목 방침도 수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예비자의 경우 교리 공부 기간이 6개월인데 너무 적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 기간을 1년 또는 1년 반으로 길게 잡아서 그 기간을 견뎌내면서 교리도 배우고 신 앙 생활도 배워서 영세받게 한다면 쉽게 냉담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6개월은 너무 짧습니다. 영세 받고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세받고 나면 다시 신자로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풍토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문제이지요,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은 너무나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교회에서 발행하는 좋 온 책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거의 읽지 않습니다. 저는 냉담하신 분들이나 새로 입교하신 분들에게도 책을 많이 권하는 편인데,박도식 신부님의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또 '가톨릭 사상 강좌‘, 4교부들의 신앙’ 등을 많이 권합니다. 냉담하였던 분들도 그런 책을 읽기만 하면 틀림없이 회두합니다. 그래서 제 주장은 냉담 방지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신자 재교육입니다.


윤길래 : 예비자 교리 교육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그 기간도 문제이지만 사실은 교리 공부 때 이론적인 것보다는 그 사람이 신앙인으로서 홀로 서기를 할 수 있도록,즉 자기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세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교리 시간에 배우는 이론들도 중요하지만,현재 예비자 교육을 보면 일주일에 교리 한 시간 하고,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뿐인데, 자기 신심에서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실한 신뢰 같은 것을 가꾸지 않는다면 미사 참례나 교리 공부만 가지고는 신앙관을 확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는 이 세상의 세파들을 헤쳐 나가면서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기 어렵습니다. 요즘 세상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바쁜 세상인데 영적 독서만 가지고는 힘들지요. 그리고 혼자보다는 공동체를 느끼게 해주어야 하거든요, 따라서 영세를 받은·다음에는 성령 세미나나 MBW 등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주고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강형일 : 피정이나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 세미나 등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그 후에 계속 그 생활이 이어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저도 꾸르실료를 받았지만 저희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꾸르실료 갔다 와서 냉담을 하면 약이 없다’는 것이지요. 꾸르실료라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는 데 그 사람이 냉담을 한다면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 교육을 받은 사람이 냉담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왜 냉담을 하는가? 제가 보기에는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 참례타고 생각합니다. 미사 참례를 한 번이라도 열심히, 물론 인간이니까 전혀 분심 없이 할 수는 없지만, 분심을 최대한 적게 갖고 주일 미사 한 대라도 열심히 정성껏 한다면 그 미사 한대가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가게 할 수 있는 제일 큰 기회라고 보거든요. 그리고 가정 기도입니다. 가정. 기도처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이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게 되면 어려운 일이거든요, 또 가장도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되지요. 그렇지만 나름대로 할 수 있도록 부모들이 이끌고 부모부터 모범을 보인다면 가능합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참 열심하시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보여 주어야지요.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는 집안에서는 냉담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사회자 : 예비자 교육이나 신자 재교육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는데, 지난 1988년에 가톨릭 신문사에서 조사한 '가톨릭 신자의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이라는 사회조사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 중 태중 교우는 25%이고 나머지는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 영세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와 같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성인 예비자들에게 기성 신자들이 이끌어 주는 것도 상당히 중요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기성 신자들이 또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새로 영세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윤길래 : 첫째는 기도입니다. 함께 기도드릴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주님께 부탁드리고 매달려야지 인간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같은 말을 해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함께 기도하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참 어려운 것이지만 서로가 자기를 죽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형일 : 더 나아가서 기성 신자들이 표양을 잘 보여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이 나왔지만 ‘저 사람 보기 싫어서 성당에 안 나간다'는 말이 나오면 끝입니다. 그나마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서 다른 본당에라도 가서 미사 참례하면 괜찮은데 다른 곳도 안가거든요. 두번째로는 새로 영세한 신자를 보면 본당의 어떤 활동 단 체에 들어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단체에 들어가기도 어려우면 구역 반상회라도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 냉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부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좀 더 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을 다 알 수는·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체라도 해주셔야 하고 최소한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미사가 끝나면 나오는 신자들과 따뜻이 인사라도 나누고 특히 처음 만나는 신자들과 악수라도 나누면서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본당에서 가난한 신자들이나 처음 오는 신자들은 신부님과 인사 나누기가 힘들고 사목위원이나 신부님과 더 친한 신자들이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러한 신자들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신부님과 그래도 가까운 신자라면 다른 신자들을 위해서 자제해야 합니다. 자신들은 그냥 묵례만 하고 처음 오는 신자들이 신부님과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신자 들이 건의하고 말씀드리는 것을 묵살하지 말으셔야·합니다. 건의하는 것들 중에 때로는 옳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신부님께 건의하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하고 그래도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건의하는 것인데 일언지하에 묵살시 켜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성당에 안나오는 신자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요즈음 새로 서품받으시는 신부님들은 그런 경향이 거의 없지만 신부님들이 아무에게나 반말하시는 것도 신자를 냉담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구교우들은 그것이 몸에 어느 정도 익어서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새로 들어온 신입 교우들은 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인간적인 실망감 등으로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신부님들이 신자들에게 공손히 대해 주시고 신자 들 이야기도 경청해 주시고 좀 친절하게 맞아줄 때 냉담자도 줄어들 것입니다.


윤길래 : 저도 제가 직접 겪은 것은 없지만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성직자들의 권위 의식 때문에 마음 상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직자나 수도자의 탓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주관만 가지고 생각 하고 판단하는 데서 오는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다같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그분들은 가장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시는 분들이니 까 우리 평신도들이 좀더 순박하게 그분들을 따르고 모셔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교회 규모가 너무 크다고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신자수가 많고 범위가 크다 보니까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서로 신자인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성당에서 만나서야 바로 옆집 사람이 신자인 것을 확인하고서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신자들끼리만이 아니고 신부님과의 관계도 본당 규모가 작아지면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지고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더 커지리라고 봅니다.


사회자 : 네, 냉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여려 가지 방법들에 대해 다양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전체 신자 중의 10%인 26만 명이 현재 냉담중입니다. 이들이 빨리 하느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분들을 다시 신앙의 공동체로 끌어들일 방법에 대해서 말씀 해 주시지요,


강형일 : 어떤 뚜렷한 대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꾸준히 찾아서 방문해서 대화를 나누거나 아니면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분들에게 공동체외 사랑을 일깨워 주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지요.


윤길태 : 그리고 기도가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지요. 또 교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공동체적인 기도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남북 통일을 위한 기도처럼 꾸준하게 냉담자의 회두를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마지막으로 신자들이나 냉담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 입니까?


윤길래 : 신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가정에서부터 신앙 생활에 열심히 노력해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제가 어렸을 때 가졌던 신앙이 나중에 다시 성당을 찾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신앙이 몸에 밴 사람은 청년기나 나중에 냉담을 하더라도 다시 교회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냉담 중인 분들에게는 하느님 품에서 사는 것이 정말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고통이나 짐을 그것까지도 다 하느님께 봉헌하면 되는데 모든 것을 자기가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냉담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지요,


강형일 : 저는 신자들에게는 좋은 표양을 보여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좋은 표양을 보면 새로 입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냉담 중인 신자들도 그 생활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을 새롭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냉담자분들에게는 좀 더 강력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생(生)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생각 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내일 당장 죽는다면 누가 냉담을 하겠습니까. 냉담자는 신자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죽음 앞에서는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그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대전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내게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냉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오늘 당장 자다가도 맞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인데 그것 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죽음이 바로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냉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하자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서 모든 신자들이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오랜 시간 동안 좋온 말씀 들려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마지막으로 해주신 말씀 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의식이 모든 신자들에게 깊이 인식되어서 우리 모두가 열심한 신앙 생활에 정진하고 주위의 사람들과 사랑의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더 많은 수의 신자 증가와 함께 냉담자의 감소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