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6월호 (제 137호)
제4절 교황청 ⑦ 6개의 사무처들 (Officia) (114-131조) 제1절 상서원 (Cancellaria Apostolica)) (...

주일의 말씀
1990년 6월호 (제 137호)
성신 강림 대축일 (전야미사) : 6월 29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창세 11,1-9) : 막강한 ...

교회의 정의 활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6월호 (제 137호)
IV. 복음화와 정의 예수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명령과 사명을 주...

복음 선교의 토착화 토착화 관점에서 본 복음 선교 이해의 어제와 오늘
1990년 6월호 (제 137호)
일 시 : 1990년 4월 30일 (월) 오후3시 ~6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사 회 : 김정수 (...

해방신학이 남미의 국가 발전과 교회 생활에 기여했는가?
1990년 6월호 (제 137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

나의 고백
1990년 6월호 (제 137호)
배세영( Marcel Pelisse ) 신부님은 1928년 6월 28일 프랑스 랑작( Langeac ) 태생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

사회 정의는 사랑의 표현
1990년 6월호 (제 137호)
이스라엘을 구할 자로 믿었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였을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천...

한국 교회의 냉담자 문제
1990년 6월호 (제 137호)
대 담 : 강형일 (레지오 마리애 서울 세나뚜스 부단장),    윤길래 (수유 1동 천주교회 신...

남아메리카의 선교 역사
1990년 6월호 (제 137호)
서 론 천지가 창조된 후 제일 큰 사건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즉 콜룸부스(Cristoba Colon) 가...

남아메리카의 사회 현실 -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1990년 6월호 (제 137호)
I. 머리말 이 글에서 남미(南美)라고 지칭되는 지역은 사실상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중남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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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회 1990년 6월호 (제 137호)

사회 정의는 사랑의 표현

박복주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

이스라엘을 구할 자로 믿었던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였을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천길 물속 같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 찼고 가슴에는 절망을 안은 채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옛 고향을 향하여 엠마오의 촌길을 걸어가고 있는 두 제자,더욱 날은 저물어 낙조의 붉은 물이 어린 시골 길을 쓸쓸하게 걷고 있는 두 사람이야말로 처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때는 황혼,인생은 절망”, 이 말은 엠마오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제자의 모습만은 아니다. 현대라는 "때”도 시대의 황혼기요, 현대인의 절망 역시 두 제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20세기 후반기를 가리켜 도덕적 암흑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 수십 년 안에 혁명에 혁명을 거듭하고도 우리의 형편은 말이 아니다. 날로 더해가는 부정 공무원과 뒷골목의 깡패와 소매치기,그리고 사기 밀수배가 득실거리고, 서로 물고 뜯고, 속이고 속고,죽이고 죽고,죄에 죄를 더하고,불의를 더하는 우리 사회야말로 이 이상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몸부림치는 듯한 느낌에 가슴 아파온다.


이 시대의 황혼기를 당한 현대인의 시간을 동트는 새벽으로 만들 방법은 무엇일까? 이 막다른 골목에서 실망에 허덕이는 인간에게 통로를 열어 놓고 소망을 불러일으킬 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살아계신 예수님과 접촉하는 그 한 길만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막다른 시대에 발생한 종교,라고 하겠다. 전쟁과 혁명과 테러 와 난동과 데모로 어수선한 이 시대에 평화를 선포할 분은 오직 예수뿐이며 슬 품과 고뇌와 절망과 곤비한 인간의 마음에 소망을 줄 분호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믿는다.


신앙인들은 모름지기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짐,즉 오뇌, 번민, 고통, 슬픔, 실망,낙담 등을 젊어지고 용감히 그리스도께로 찾아 나아가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그 어깨로 대신 져주시고 우리에게는 가볍고도 소망에 찬 생의 멍에를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는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 16.3)고 경고하신다.


1. 교회의 생명과 사명


교회는 이중 성격을 갖고 있다. 산 위에 세운 성이며, 땅 위에 흩어진 소금이다. 산 위의 성은 빛이 있어야 하며 땅 위의 소금은 맛이 있어야 한다. 빛은 착한 행실이며 맛은 유용 가치를 상징한다고 보겠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 모은 산 위의 성으로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믿음의 생활이며,신앙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친교하는 거룩한 화해의 삶이다. 또한 교회는 세계에 흩어진 땅 위의 소금으로 하느님의 이스라엘이요,평신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세계를 위한 봉사이며 세상과 화해하는 사랑의 생활이다.


교회는 세계 안에 있다. 세계를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표현이며 계시를 받은 전달자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장소이다.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의 세계에 들려져야 하고 하느님의 모습이 보여져야 한다. 교회는 가고 오는 율동의 생활이다.


신앙인은 산 위의 성에 고립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정치 문제나 국가 문제는 세속적인 것이므로 교회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태도는 성서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시대적인 요청만이 아니라 성서가 보여 주고 있는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와 생명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세상과의 화해의 희생 제물이다. 하느님을 떠나서 교회가 있을 수 없고,세상을 떠나서는 교회가 필요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믿음이 산 위의 성에 홀로 갇혀 있으면 죽는다. 땅 위의 소금으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세계에서 해야 할 봉사는 사랑으로써 행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공동 사회의 여론도 아니요, 정욕적인 개인감정도 아니다. 산 위에 세운 성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의 계시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정치적 기관들이 봉사하여 영향을 끼치는데 필수적으로 적용해야 할 원리이며 사회문화를 세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2. 사회 정의 실현의 동기와 목적


국가 사회란 공동 사회에 의해서 발전된 조직체로서 그 안에 있는 인민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활동을 조화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가는 법 제도를 설치하고 있다. 이 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키 위해 강력한 권위의 중심체가 있어야 한다.


국가 사회의 목적은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사회 질서를 위해 사회 정의가 유지되어야 하며 사회 정의는 법으로써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이 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이란 언제나 목적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권력이 그 위치를 벗어날 때 힘의 정치가 이루어져서 사회 정의는 왜곡되고 질서는 위험하게 된다.


교회는 언제나 이것을 경계하여 권력이 법 시행의 수단에서 떠나 법을 만드는 법 위의 법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법 자체가 공동 사회의 여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때 불완전성과 제한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 여론에 의해 설치된 법을 소수자의 집권 세력이 깨뜨려 버리고 소수의 목적 수행을 위해 이 권력을 남용하는 독재 정권은 그 위험성과 불완전성이 전자에 비해 훨씬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회 정의의 기본 원리가 되고 있는 평등과 자유, 권리와 의무 등은 그 사회의 도덕률에서 나온 규범 민 법으로써 구체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사회의 도덕률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회 정의의 개념이 달라진다. 따라서 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이런 면에서 사회 정의는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을 그 동기와 목적으로 하는 한 방편이라고도 보는 것이다.


3. 신앙인의 새로운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신앙 생활을 하기 어려운 곳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현 사회는 인간이 쌓아 올린 과학적 지식,물질적 번영 그리고 허다한 성취 때문에 자기 충족과 낙관적인 생의 태도로 인해 하느님 대신 다른 요소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사회는 종교적 신앙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반항하면서 영적인 세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상황에 있다.


말하자면 “너희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며 도전하는 시대적 정황 가운데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구세주, 주님” 으로 믿는 신앙인으로 살고있다. ‘예수 시대’와 ‘사도시대'를 거쳐 '교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은 참뿌리를 찾아 참신앙인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바른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그리 새로운 모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Mark Gibbs 와 T.R. Maston 이 쓴「하느님의 얼어붙은 백성」( Gods Frozen People )이라는 책에서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 형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신앙을 냉장고 속에 넣어두었다가 주일 아침에 끄집어내서 교회에 가지고 가고 다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그 신앙을 냉장 고 속에 넣어 둔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핵심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다만 외적으로 주일 미사에 참여 하는 것만에 두고 신앙을 우리의 일상 생활과 관련시키지 않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파연 믿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비쳐진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다만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 현실 문제와 아무런 관계없는 영적 문제, 내세 문제에 공감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는지 ......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인색하고 옹졸하며 낡은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때는 없는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현사회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복음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 노력하십시오.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필립 1,27-28).


복음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알려진 계속적인 구속의 행위를 의미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이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적 혹은 영적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이 세상의 주(主)님이시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적 신앙 자체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관심을 가지셨다. 죄악과 수다한 문제가 있는 이 세상에 직접' 사시면서 인간 문제를 다루고 해결지어 주시는 분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은 화목하게 하는 평화의 직능이었다.(2 고린 5.18-19)


이 평화의 직능을 다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어떤 때에는 비본질적인 전통과 법을 깨치시며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사셨다. 결국 수난의 종으로 자기 생명까지 주시면서 하느님과 세상을 화해시키시고 또한 언제나 비전(vision)이 있으셨다. 즉 허망한 장래에 대한 꿈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항상 구체적으로 현실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 문제에 부딪쳐 해결해 주시고 치유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통해 볼 때 종교적인 생활과 일상 생활이 각각 유리된 별개의 생활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의 종'으로 사시면서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보여주신 분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모든 것이 가득 차고 부유한 것 같으나 실상 굶주리고 병든 사회이다. 인간이 성취한 기계 문명이 인류의 최후 행복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며 하느님을 멀리 떠난 현대인에게 어떻게 효과 있는 선교가 가능 할 것인가? 하비 콕스 (Haivy Cox )는 '세속 도시'라는 책에서 교회의 역할은 문화적인 무당의 역할이라고 하였다. 즉 인간들의 허망한 20세기의 신화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신앙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신앙 훈련을 받아 그들 각자가 작은 교회가 되어 그들이 살고 있는 터전에서(가정,직장,일터) 비신자 이웃에게 사랑과 섬기는 종의 모습, 화해의 모습을 생활을 통해 산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써 보내신 소개장 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2 고린3, 3). 우리 신앙인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신다. 우리는 20세기의 복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번역하고 기록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4. 국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사명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 12,17)는 말씀은 하느님의 것이 따로 있고 카이사르의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이사르의 것은 곧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의 것은 카이사르 에게 맡겨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와 하느님이 대립되거나 분리되는 것으로 해석하시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주권 안에 카이사르에게 위임된 권세에 불과하다.


카이사르에 대한 의무수행은 하느님께 대한의무 수행 안에서 되어야 한다. 국가 사회에 대한 봉사는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의 원리를 국가 사회 통치에 적응시켜야 한다. 교회는 국가 사회를 하느님과 이원적(二元的)인 존재나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다. 권위는 하느님이 허락하신 범위와 뜻 안에서만 그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맺는 말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사회 정의에 표현시켜야 하며 처해 있는 그곳에서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으로서 공동 사회의 법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새로운 생활이며 이것을 위해 교회는 사회의 올바른 양심이 되어 줌으로써 사회 현실에 대해 큰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명실 공히 깨닫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대립 감정이나 이기주의적 책략에서가 아닌 ''사랑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혁명적인 한국 사회의 시대적 요청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위대한 사명이라고 확신한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종려나무이다. 수난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의 집,그의 영광과 은혜의 샘터인 하느님과 가까운 친교 속에서 항상 푸르르고 언제나 열매 맺을 수 있다. ‘푸른 신앙'을 가진 하느님의 자녀들은 인간 모순, 사회 모순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며 이웃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