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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5월호 (제 136호)
제4절 교황청 (6) 법원 가. 로마 공소 법원 (Sacra Romana Rota) ①12세기까지 교황께 상소되는...

주일의 말씀
1990년 5월호 (제 136호)
부활 제 4주일 : 5월 6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사도 2,14-41) : 오늘 독서에 나오는 ...

교회의 정의 활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5월호 (제 136호)
머리말 정의를 위한 한국의 천주교회의 활동은 1967년 강화도 심도 직물 사건에 관한 한국 주교단의 ...

가톨릭 청년 운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5월호 (제 136호)
한국 교회가 처하여 있는 전교 3세기의 이 시기는 인간 생활의 전 영역에서 급격한 변화가 예견되는 2000...

복음 선교의 토착화 해의 복음 선교의 현실과 전망
1990년 5월호 (제 136호)
일 시 : 1990년 3월 26일(월) 오후 3시-6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사 회 : 김성태...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
1990년 5월호 (제 136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

나의 고백
1990년 5월호 (제 136호)
함 제도 (Gemrd Β. Hammond) 신부님은 1933년 8월 15일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으로 1960년 뉴욕 메리놀 ...

가톨릭 신자와 가족 계획
1990년 5월호 (제 136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하나인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용정, 연길에서의 수도자의 길
1990년 5월호 (제 136호)
대 담 : 김안나(올리베따노 성 베네덕도회 수녀), 김정수(「사목」주간·신부) 일 시 : 199...

남북한의 평화적 민족 통일에 관한 신학적 고찰
1990년 5월호 (제 136호)
서 론 얼마 전부터 동구 공산권 여러 나라에서는 독재자,독재당,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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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만남 1990년 5월호 (제 136호)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

김창순 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의 생각을 점검하는 위치를 제공하련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같은 의견보다는 서로 보완하면서도 대치되는 다른 의견을 가진 이웃을 만나려 한다. 그런 일의 기준은 세계적으로 양분된 정치 상황에서 출발되겠으나 그 바탕에는 철학적 역사 발전의 근저에 그런 논리가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내부에서도 자기 자신의 긍정, 부정의 긴장 관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느끼며 사는 오늘의 현실에서 「사목」은 우리가 겪는 한계와 정반(正反),긍정 부정의 자기 상황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려고 고심하는 분들을 위하여 “우리의 만남”을 시작한다.

6 ? 25 세대의 북한관

김창순 (북한연구소 이사장)

1. 엄청난 허언과 진실

만일 남북한 간에 6 · 25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민족사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우리는 동족인데 왜 이다지도 애타게 화합을 부르짖어야 하고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가. 6 · 25 전쟁이 없었다면 이런 처지는 우리 앞에 전개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또 비극이 단지 타율적으로 우리 앞에 강제된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 민족을 하나의 국민 공동체 의식으로 더욱 결속시키고 그 정부의 존재 가치를 더욱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슬프다! 6 · 25 전쟁은 동족상잔의 살육으로 시산혈해를 이루고 조국 강토를 희진 했으니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는가. 국군 장병이 미처 새벽잠을 깨기도 전 일요일 미명에 치밀한 계획의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삽시간에 대 부분 내 처자가 죽고 내 집 내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으니, 스탈린의 팽창주의는 우리 민족의 안위 따위가 안중에 없었다 치더라도 김일성까지 그럴 줄이야 사대망국의 적구가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기 때문에, 지금은 50대 초의 사람들까지도 기억에 몽롱하겠지만 스탈린 정부는 미국 정부에 1948년 9월 18일자 각서를 통해 북한 점령 소련군이 그해 12월 말까지 철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스탈린 정부는 군사 고문단과, 각종 요원을 남겨놓고 소련군을 북한에서 철수했다. 당시 북한의 인민 군 무력은 보병 10개 사단, 전차 1개 사단,비행대 1개 사단, 각종 예속 부대와 내무성 산하 경비 부대를 합하여 20만이었고 장비는 Τ34형 전차와 SU76 장갑 자동차 약 5백 대, YAK9형 전투기 2백여 대, 각종 함정 30여 척이었는데 모두 소련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이에 따라, 북한 지역에서는 1949년 1년 동안에 남침 전쟁의 실질적 준비가 최종적으로 각 영역에서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군사 작전 면에서의 전투 준비와 이에 대한 검열 사업이 치밀하게 전개되었고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이에 반대하는 분자는 물론 동요하는 분자들까지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소위 불순 요소와 인텔리 분자들을 검거 투옥했다. 한편 남침 전쟁의 준비 진행을 몰라보게 하는 정치적 위장 투쟁으로5 평화 공세의 연막전술을 전개했다. 1949년 6월 28일의 소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선언서는 그 대표적 각본의 하나이다.

북한은 기습 남침의 시기가 아주 절박한 것을 감추기 위해, 평화적 통일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토의 결정하는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를 1950년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해주군 또는 개성시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통일 선거를 1950년 8월 5?8일에 실시하자고 했다. 이 같은 제의는 1950년 6월 7일에 행해진 것이다· 9일 후 6월 16일에는 평양 방송을 통해 평양에 감금 중인 민족 지도자 조만식과 서울에 체포되어 있는 북측 공작원 김삼용, 이주하의 신병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4일 후 20일에는 앞으로 3개년 경제 계획을 실시하기로 한다고 소위 내각 결정 제128호를 발표했다.

6월 25일에 개시될 남침 공격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렇듯 정치적 연막 전술을 전개하고 작전 일수를 50일로 정하여 군사적 점령을 단시일 내에 끝내며 8 · 15 해방 제5주년 기념을 서울에서 행한다는 작전 계획이었다.

북한은 지금도 6 · 25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는 주장을 기회있을 때마다 늘어놓지만 그것은 거짓말이고,진실은 노획된 그들의 작전 문서가 입증하고 있는 바이다.

2. 증오와 반대로 그칠 수는 없다

전쟁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 미치는 영향은 그 전쟁의 규모,기간, 심도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6 . 25 동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장의 전쟁은 아니지만, 그 상흔은 아마도 가장 깊고도 크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전후 7년의 기나긴 임진왜란에 못지않은 깊고도 큰 상흔을 남겨 놓았다.

전투가 바로 우리 국토 위에서 벌어졌고 전국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으며 우리의 경제와 문화를 전면적으로 파괴해 버렸다. 인명 피해만 보더라도 병력 손실이 전사자와 전상 및 행방불명을 합하여 1백만에 달하며 민간인은 학살 사망자, 고문 사망자, 부상자,납북자,행방 불명을 합하여 1백 39만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는 6 · 25의 상흔을 영원한 증오와 반대의 상징으로 남겨 둘 수 없다. 그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평화와 사랑의 민족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이에 있어서는 무조건의 타협이 아니라, 잘못한 것은 반성하고 반성에 대해서는 관용하고 관용은 새것을 창조하는 길로 이어져야 한다.

현대 한국의 사회 문화적 변화와 발전 특히 민족 문제의 해결은 8?15 해방과 6?25 동족상잔으로 이어지는 역사 과정의 사회과학적 규명으로 잘못한 것은 반성하고, 반성에 대해서는 관용하고,관용은 새것을 창조하는 길로 이어져야 하는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명료한 경지를 못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오히려 잘못을 파묻고 반성은커녕 적반하장으로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방법으로 사태를 호도하려는 것이 북한의 일관한 정치 노선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특히 한국 사회의 6 · 25 세대가 북한의 정치 노선을 의심하는 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6 · 25 남침에 대해서는 최소한 유감의 뜻이라도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데 오히려 북침이라는 조작극으로 사태를 호도하려고 하니 관용의 길이 막히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도 민족 독립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독립 운동의 방략상의 문제로 그 길을 택했던 것이고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 민족 독립 운동 을 다만 일시적 방편으로 삼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본다.

북한 위정자는 전자와 후자를 양수걸이로 삼으면서 자신의 독재권을 더 절대시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사상가라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 위상은 전 세계의 그 어느 독재자보다도 음모의 과학과 파괴의 기술에 능한 존재로 과시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당대를 위해서만 아니라 사후에도 만세에 그 이름이 남는 영웅이 되기 위해 세습 체제를 생전에 만들어 놓기를 원한다.

한 영웅의 위대성은 그의 당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창업이 그의 사후에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에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인지 모든 정력을 세습 체제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민족 문제를 논하고 통일과 평화를 논하는 것이 얼마나 낭비적인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증오와 반대로 일관할 수도 없다. 그도 생물학적 존재이기 때문에 수명에 제한도 있을 것이고,스스로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객관적 제약도 있는 것이다. 인내하면서, 북한은 우리와 같은 동족 사회라는 인식을 확고히 가지고, 언젠가 반드시 통일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반성을 촉구하며 관용을 아끼지 않으며, 생활상의 교섭과 교호 작용을 빈번히 가지면서,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가능한 민족적 선택과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3. 통일 운동의 공식을 찾는다면

독재자의 생시에 그의 권력을 장자에게 세습적으로 승계시킨다는 것은 이름은 인민공화국이지만 정치 행태는 군주제나 다름없다.

스탈린 사후에 모든 공산당들이 근대화를 지향하여 개인숭배를 배제하다가 지금은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철회당하고 다당제의 개혁 개방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유독 북한의 ‘조선 노동당’만은 김일성 부자의 신격화 정책을 진행하고 있으니 시대 역행의 표본이다·

김정일 시대에 들어선 북한이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분야에서 과거의 어느 때 보다도 난항을 보이고 있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사유가 겹친 데 있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중요시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첫째,공산주의에 대한 신념,둘째, 공산당에 대한 신뢰, 셋째, 경제 건설에 대한 공산당의 능력을 불신하고 다만 명령하는 대로만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북한의 경제 건설이 만성적으로 침체 상태에 빠지고 있는 것도,사람들의 생산 의욕이 감퇴되었다는 인질(人質) 조건에 더 많은 비중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한편 북한 공산주의의 특징은 그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지간에 주관 적 능동성을 너무 과대시하고 있다. 사람의 사상 의식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주장으로, 소위 주체사상만 확고하면 무엇이든지 못해낼 것이 없다는 광신적 교리로 만병통치약을 삼는 데 문제가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주체 사상의 수령으로 삼고,절대적 복종과 무조건적 충성을 다하는 방법에 의해 북한을 통치한다는 것은 북한을 감옥으로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북한에 ‘특별 독재 대상 구역‘이라는 생지옥을 만들고 여기에 15만 가량의 정치 사상범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북한의 정치 현실이 얼마나 무 인권 지대인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도 언제나 가두어 놓고 통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도 1989년 현재 1백여 개 국가와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보더라도 1년에 일본 사상 요원과 관광 요원은 1988년에 6천 명 가량, 89년에는 1만 명 가량 북한을 다녀왔다는 설이 나돌고 있고 북한 사람으로 일본을 다녀 간 수효는 최근 매년 2백 명을 웃돌고 있다는 설이다.

이밖에 동유럽 사태와 모스크바 변화로 그곳에 나가 있던 유학생들이 2천 명 가량이나 북한으로 소환되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이런저런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북한도 어쩔 수 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개방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 또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교호 작용을 증대시켜 나가야 한다.

이 문제는 우리와 북한은 같은 동족 사회이기 때문에 공통 분모는 민족 (N) 이다. 다만 제도 사상 이념에 있어 우리는 그것이 자본주의 (C) 라면,북한은 사회 주의 (S) 라는 분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C 도 S 도 아닌 공통의 민주주의 (D) 라는 분자로 만드느냐가 통일 운동이다. 이것은 행정적 방법도 아니고 정치적 흥정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공통 분자로서의 D 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 발전의 일정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D 의 구성 요소가, C를 70% 내지 80%가 되게 하고 S를 20% 내지 30%로 되게 하는 인위적 노력과 정진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젊은 세대의 북한관

김 귀 옥(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 2년)

“보릿고개가 없어진 지 얼마나 된다고,요즘 젊은이들은 6.25가 뭔지 몰라요.” 지난 초 겨울,전철에서「창작과 비평」1989년 겨울호에 실린 황석영의 북한 기행문을 읽고 있던 내게,옆좌석에 앉아 있던 한 중년 부인이 불쑥 던진 말이었다. 이렇게 서두를 연 그 부인은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야기의 요지는 “젊은 이들이 북한에 대한 호기심이 동하여 그러한 글을 읽더라도 결코 빨갱이들의 입에 발린 소리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세대는 태어나서 성년이 될 때까지 계속 반공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릴 때 유희의 대부분은 ‘공비 잡는 놀이‘였고, 빨갱이를 잡거나 공비를 고발 하는 내용이 담긴 동화나 실화담“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는 우리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一 을 읽도록 권장 받았다. 학교에서 관람시켜 주던 영화나 반공 강연회, 간첩 포획 시 수집한 물건 전시회에 참여하는 일들은 늘 그 내용이 그 내용이어서 이따금은 지겨운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 세대 의 무의식 깊숙이 심겨진 이북은 얼굴이 시뻘건 사람들이 사는 ‘동토의 제국‘ 그 자체였다. 그러던 1970년대 초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고 우리 측 위원단이 북측을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에 비추어진 이북 동포들은 우리와 똑같은 ‘백의민족‘임을 보고 대단히 경이로워 했었다.

대학 입학 후 우리는 현대사를 다시 배웠다. 일제 강점기 애국자라고 하면 중국에 있던 임시 정부의 독립 운동가가 전부인 줄 알았던 우리에게 백두산과 만주 지역을 거점으로 총과 칼을 들고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한 독립 운동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5년 8.15 이후 해방된 조국을 빛냈던 많은 학자와 지식인, 기술자 등등이 1948년 단정(單政) 수립과 1950 ㅡ 1953년 전쟁 동안에 이남 땅에서 사라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6.25의 남침설에 관해서도 믿기 어려운 주장, 즉 미국이 그 전쟁을 유인했고 한국은 대리로 전쟁을 치르었다고 하는 주장을 미국의 수정주의 학자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점철되어 있는 간첩단 사건도 많은 수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법조계측의 이야기에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간첩이나 빨갱이라고 불리우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 땅의 자주화와 민주화, 평화 통일을 주장하다가 잡혔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이렇게 왜곡되고 은폐된 우리의 현대사와 현실의 이면에는 이북과 관련된 많은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왜 1988년 5월 명동 성당에서 20대 나이의 조성만은 ‘조국 통일’을 외치며 할복 자살을 해야 했고, 왜 백발의 문익환 목사와 연약한 소녀 임수경은 현행법을 어기면서까지 북에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라는 물음에서 “도대체 북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북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시작된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선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을 위하여 민족 동질성과 신뢰 회복 그리고 친밀감을 조성해 나가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해방 후 오늘날까지 남과 북에는 오랫동안 서로 다른 체제와 제도,사상이 존재하여 왔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느 일방의 제도나 사상을 절대화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통일을 반대하는 여론이 우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강한 독일과 달리 남과 북 모두 조국 통일을 지상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이상, 제도나 사상의 차이가 통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난관으로 작용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또한 이북사회의 내적 전체적 사살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해나 가는 과정에서 밝혀져야 한다. 같은 피를 나누고, 같은 말과 생활 습관을 가진 겨례가 남쪽의 민중처럼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생활하고 있고 현대사를 이룩하였음을 왜곡하지도 말고 윤색하지도 말고 인식하여야 한다. 이남의 역사가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소위 ‘운동권’에서 말하듯이 예속과 착취의 역사였다고 할지라도 88 올림픽은 우리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위대한 성과물이듯이 이북의 역사가 설혹 반공 교육에서 배운 대로 수령과 일당의 독재로 얼룩진 역사이더라도 1989년 임수경이 참가했던 세계 청년 축제 또한 북쪽 민중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성과물임에 틀림없다. 이북의 역사와 현실을 민중적 관점에서 객관 으로 연구하였을 때 비로소 이북의 역사 발전의 동력과 전체적인 현실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그 다음,이 문제는 주체 사상의 이론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과 관련된다. 흔히 주체 사상은 김일성 집단이 이북 사회를 세뇌 시켜 노예화하려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중?고 시절을 통해 이런 말을 배웠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 는 있어도 많은 사람들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라는 격언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이북 사회를 수십 년 지배하고 통치하는데,주체 사상을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좀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북 자체에서 주체 사상 이 수용되는 현실과 논리가 있지는 않은가.

북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다음으로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관련된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선언된 이래로 동구권에 일고 있는 엄청난 변화는 동서 진영을 막론하고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우리 정계나 학계, 언론계에도 많은 토론과 논쟁을 낳고 있다. 이런 토론과 논쟁의 하반부에 가면 으레 제기되는 물음이 있다. 바로 “북한은 바뀔 것 인가”라는 물음이다. 아무리 이론 높은 학자나 연구가라고 해도 사회주의권의 이러한 변화로 일거에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있다거나 마르크스-레닌 사상이 종식되고 있다고 단정 지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과 내적 발전 법칙을 규명한 다음 그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유보적인 자세를 보인다. 이렇듯 북한에 대해서도 그 사회의 내적 발전 동력이나 논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규명한 다음 북한의 개방이나 변화 여부를 따져 보는 것이 학문적 대결과 연구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북한의 변화를 논하기 전에 우선 우리 자신을 반 성해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다시 말해 “북한은 바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페레스트로이카적 발상,즉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우리에게는 “이남 은 바뀌고 있는가?” 또한 세계 주도권을 쥔 “미국은 바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야 할 시점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대로 우리는 이북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첫째는 함께 통일과 변혁을 추구해 나갈 또 하나의 주체라는 민족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둘째는 남쪽과는 그 사회 성격이나 제도,사상이 질적으로 다른 ‘자력갱생’의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또한 이북 사회를 연구하는 데에 요구되는 자세로서 북쪽에 대한 이남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이나 이북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동시에 지양하는 객관적인 방법과 태도를 견지하되,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작으나마 봉사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 세대는 보릿고개를 모르고 6.25를 겪어 보지 못해서 실로 전쟁의 참혹상이나 북한 공산 집단의 위장 전술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일까. 가난과 굶주림,헐벗음을 못 겪어서 북한의 실상을 알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으며, 집세가 없어 자살하고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농사에 늘어만 가는 빚 걱정으로 자살하며, 산업 재해로 인하여 죽어가는 이웃이 너무도 많다. 또한 6.25와 남북의 분단으로 인하여 수십 년 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여 만나지 못하는 일들도 너무 많다.

이 모든 불행한 일들을 종식시키기 위한 지름길 중의 하나가 통일이라고 믿기에 우리의 겨례가 사는 이북의 역사와 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 앎은 모든 이데올로기적 때를 벗겨 낸 투명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지난 호(135호)에서 81면5행의 ‘서울대교구장’을 ‘서울교구장’, 9행의 ‘서울대교구’를 ‘서울교구’, 82면 마지막 행의 ‘시작하자고’를 ‘시작한다고’,83면 5행의 ‘제44차 세계성체대회 강론’을 ‘한국 성체 대회 강론’으로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