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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5월호 (제 136호)
제4절 교황청 (6) 법원 가. 로마 공소 법원 (Sacra Romana Rota) ①12세기까지 교황께 상소되는...

주일의 말씀
1990년 5월호 (제 136호)
부활 제 4주일 : 5월 6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사도 2,14-41) : 오늘 독서에 나오는 ...

교회의 정의 활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5월호 (제 136호)
머리말 정의를 위한 한국의 천주교회의 활동은 1967년 강화도 심도 직물 사건에 관한 한국 주교단의 ...

가톨릭 청년 운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5월호 (제 136호)
한국 교회가 처하여 있는 전교 3세기의 이 시기는 인간 생활의 전 영역에서 급격한 변화가 예견되는 2000...

복음 선교의 토착화 해의 복음 선교의 현실과 전망
1990년 5월호 (제 136호)
일 시 : 1990년 3월 26일(월) 오후 3시-6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사 회 : 김성태...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
1990년 5월호 (제 136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

나의 고백
1990년 5월호 (제 136호)
함 제도 (Gemrd Β. Hammond) 신부님은 1933년 8월 15일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으로 1960년 뉴욕 메리놀 ...

가톨릭 신자와 가족 계획
1990년 5월호 (제 136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하나인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용정, 연길에서의 수도자의 길
1990년 5월호 (제 136호)
대 담 : 김안나(올리베따노 성 베네덕도회 수녀), 김정수(「사목」주간·신부) 일 시 : 199...

남북한의 평화적 민족 통일에 관한 신학적 고찰
1990년 5월호 (제 136호)
서 론 얼마 전부터 동구 공산권 여러 나라에서는 독재자,독재당,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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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회 토착화 연구 발표회 1990년 5월호 (제 136호)

복음 선교의 토착화 해의 복음 선교의 현실과 전망

김성태 / 정승현 외

일 시 : 1990년 3월 26일(월) 오후 3시-6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사 회 : 김성태(가톨릭대학 교수. 신부)

주 제 : 해외 복음 선교의 현실과 전망

주제발표 : 정승현 (교황청 전교 원조회 한국지부 총무. 신부)

약정토론 : 원하림 (성 골롬바노회 신부). 배경민(한국 외방 선교회 신부)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한국 교회의 발전에 대해 많은 말을 해왔다. 박해의 한 세기와 성장의 한 세기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성인이 된 것이다. 성인(成人) 교회에 걸맞게 103위 성인(聖人)을 모시게 되었고 또 세계성체대회도 치렀다.

그러나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뿌듯한 만족감을 표시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말만 서른이라고 하지 실제로는 어른다운 행동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는 자기 비판을 나타내는 한국 교회이기도 하다.

아직도 우리는 소위 전교 지방 교회 범주에 속해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전체 인구의 6%도 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면에서 줄 것보다는 받아들일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토착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문화유산과 종교적 통찰은 엄청난 데 반해 아직도 이를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를 우리 문화의 전통 안에서, 우리 문화와 전통의 표현 방식대로 올바로 이해하고 전하는 신앙적 자립(自立)을 하루속히 이루어야 한다.

1. 해외 복음 선교의 현실

교황청 전교 원조회 한국 지부는 지난해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남녀 수도 장상연합 회와 함께 한국인 해외 선교사 현황을 조사한 바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89년 4월 1일 현재 선교 단체와 수도회 그리고 교구 등 총 28개 단체 115명의 선교사들이 35개국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 남자 선교회 및 수도회

선교사 현황

이와 같은 통계 숫자는 1년이 지난 현재 크게 변동되지 않았다. 인보 성체회가 처음으로 페루에 2명의 수녀를 파견하였고 안동교구와 서울대교구가 각각 1명의 교구 사제를 프랑스에 피데이 도눔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예수회의 두 수사가 태국의 난민수용소 활동을 마치고 돌아왔고 한국 외방선교회는 페루 선교 대신 중국 선교를 위해 대만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하여 지금 준비 중이다.

참고로 살펴보면 한국 외방 선교회 회원은 현재 10명의 사제와 29명의 신학생들이 확보되어 있으며 외방 선교 수녀회는 36명의 회원(서원자 5, 수련자 14,청원자 7, 지원자 10)이 해외 선교를 준비하고 있다. 그밖에도 아직 선교 현지에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로마나 프랑스 등지에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파견 단체, 파견 지역,활동 내용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한 수도회들은 대개 국제적인 공동체이지만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와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같은 한국의 수도회도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고 있으며 인보 성체회도 페루에 2명의 수녀를 최근에 파견하였다.

선교사가 파견된 지역을 대륙별로 보면 아시아 28명, 아프리카 15명,유럽 34명,라틴 아메리카 21명, 오세아니아 7명,북아메리카 10명으로 전 세계에 고루 파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교 사업의 내용을 살펴보면 난민 구제,자선 활동, 방송 선교, 전교, 양로원, 고아원,이민 사목, 교리 교육 등 전통적인 선교 사업뿐 아니라 수도 생활, 내부 봉사 등의 간접 선교에도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의 선교를 직접 선교나 간접 선교,신앙 전파나 재복음화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파견 시기와 경위 ‘

한국 선교사의 해외 파견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그것 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한국 교회 200년을 돌아보면서 이제는 ‘받는 교 회'로부터 '주는 교회,내지 ‘나누는 교회’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 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수도회가 이를 조용히 시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선교가 예전처럼 개척적이거나 모험적민 것이라기보다 총회(본부) 차원에서 이미 교두보를 마련한 곳에 파견되어 유경험자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비록 그렇기는 해도 한국의 공동체 입장에서는 위험을 동반하는 시 도이므로 시도 이후의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선교사로 파견되는 대신 기한을 정하고 파견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외방 선교회와 교구의 피데이 도눔 선교의 경우 이를 널리 알리고 있는데 선교사를 파견하는 공동체의 자기 선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외적으로는 한국 교회가 이제 보편 교회의 일원으로서(선교 교령 20항; 현대의 복음 선교 64항 참조),공식적인 교회 활동을 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공표하고 내적으로는 신자들의 선교 의식을 고취하여 한국 교회의 선교 사명 수행을 뒷바라지하며 나아가 선 교 성소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결의의 표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견 동기와 목적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하는 목적이나 동기는 여러 가지이다. 경험도 쌓고 교육도 시킬 목적으로,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았으니 필요한 때에 도와주려고,수도회의 고유한 선교 카리스마의 실천으로,다양성과 친교의 표지로, 다른 관구의 성소자 부족으로…… 회원을 선교사로 해외에 파견하고 있다.

또 선교지방 교회의 요청으로 파견되거나,총회(본부)의 요청으로 파견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선교적인 교회의 본래 모습을 구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선교 교령 1,2항; 현대의 복음 선교 13 ? 15항 참조)

선교사 양성 과정

선교사로 파견하기 위해서 우선은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살리면서 그 선교열이나 자질(어학 능력, 건강 등도 포함)을 고려하여 인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필요한 교육은 자체적으로 실시하거나 프랑스,로마 등지의 전문 교육 기관에서 연수하게 하 거나,총회(본부)나 본부가 운영하는 양성 기관에서 시키거나,다른 수도희의 교육 기관에서 위탁 교육을 받게 하거나,특별한 교육 없이 바로 현지의 공동체에 파견되어 실제 선교를 통해 체득하게 하는 방식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나라 선교사들의 경험이 집약 정리되어 이를 새로 선교지로 떠나는 후배들에게 산 교훈으로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선교사들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한 해에도 선교사로 파견되는 숫자가 적지 않으니 일년에 한두 차례 이들을 모아 2?3일 정도 함께 지내면서 선교 경험이 있는 선배들의 체험을 듣고 묵상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기회 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해의 선교의 문제점

선교사 파견에 있어서는 항상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비자를 받아 입국하는문제,언어장벽,기후나 문화,정치적 사회적 차이, 풍습과 사고 방식의 차이 등에 적응하는 문제, 심지어는 인선에 따르는 어려움까지 있으나 이는 어느 나라의 선교사든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어려움을 해소시키고 그 선교열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뒷바라지가 필요하다. 현지 교회 즉 선교 지역 교회가 전적으로 맡아서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수도회 총회나 한국의 공동체가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되는데 특히 한국 공동체의 소식, 기도, 격려, 송금 등 지속적인 관심 표명은 가장 중요한 지원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한국 교회 전체의 기도와 성원은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을 것이다.(하다못해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마음으로 한국 교회가 모든 면에 있어서 훌륭한 사명 수행을 이루어 나갈 때 해외의 선교사들이 모르는 사이에 긍지를 느끼고 자신 있게 선교에 임할 수 있다.)

2. 해외 복음 선교의 전망

한국교회의 해외 복음 선교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가톨릭 신문89.4·23, 1면; 조선일보 89.4.29,9면 참조), 해외에 선교사룰 파견한 선교 단체 및 수도회들은 지금까지의 해외 선교 활동에 대해 매우 조심스런 평가를 내리면서도 거의 대부분의 단체가 계속해서 선교사를 파견하거나 새로 교체시켜 강화하거나 선교지의 활동 시설(학교,유아원, 진료소 등)을 확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자원하는 회원들이 있기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선교 성소를 육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소개된(CCK 회보, 제57호,55면 이하) 리하르트 프리들리의 글은 우리에게 세계적인 차원에서 선교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글을 선교적인 전망에서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아시아 동남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구 폭발은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지구의 중심이 태평양 쪽으로 기울어지며 비그리스도교에로 기울어진다. 이것은 분명 선교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다”(55면).

“태평양은 새로운 지중해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통계 자료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a) 인구 증가를 보이기 위하여 : 대표적인 인구 폭발 지역. b) 결정적인 중심지의 이동을 파악하기 위하여 : 태평양 주변의 대도시들. C) 유럽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하여 : 현실적인 세계 지도. 이러한 자료들은 적절한 평가에 의한 것이다”(56면).

"이러한 통계,도표, 지도들은 단순히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현존하는 신자 분포와 비교된 새로운 사회 경제적 배경만을 드러낼 뿐 아니라 유럽인들이 더 이상 세계 대도시의 시민들이 아니라 변두리에 사는 거주인들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 고 있다.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선포하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적인 사색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자의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57면).

이러한 지리학적이고 인구학적인 전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은 구체적으로 현대 세계의 차원에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파고들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여 그 구원이 되고 평화가 되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여러 종교들과 문화들 그리고 민족들 가운데서 그들을 앞질러 오시고 또한 그들을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본당’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미 파악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깊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가톨릭교회의 보편성과 일치성은 질적으로 더욱 커지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브 꽁가르의 표현대로 '양적인 가톨릭으로부터 질적인 가톨릭으로’ 나아갈 것이다”(58면).

유럽의 선교학자가 전망한 바를 우리는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2천년대(선교 제3천년대)의 주역으로서 우리의 사명 (mission) 을 인식 하면서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 전망을 긍정적으로 내다보게 된다.

물론 현재 교회 내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가 없지 않다. 한국 교회의 눈부신 발전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성소자의 증가 역시 둔화되거나 퇴화될 것이다,소위 이방 선교의 자세는 낡은 것이 되거나 사라질 것이다,…”· 등.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써 극복될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세계 선교에,나서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세계화

지난88올림픽의 캐치프레이즈가 ‘세계는 서울로,서울은 세계로’였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것은 한국이 지구촌의 한 구석에만 칩거하고 있을 수 없고 세계 역시 한국을 언제까지나 지구촌의 한 지점으로만 방치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한국은 세계 속에 드러나야 한다. 이렇게 한국의 세계화가 현대 세계의 필연적인 요구요 추세라면 한국 교회 역시 한국의 세계화의 저 요구와 추세에 따라 세계화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해외 선교라는 차원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신앙은 일종의 음식과 같은 것으로서 서로 나눌 때 인간학적이요 신학적인 충만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한국 교회의 북방 정책

제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한국의 북방 정책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고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는데 이는 제6공화국의 고유한 발상이거나 독점물이 아니라 이미 세계적인 추세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6공화국은 북방 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세계적이고도 역사적인 대세라는 말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극적인 세계 변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도 그런 변화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변화가 가속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과 아울러 바티칸의 정책은 우리에게 북한과 중국 등 인접한 공산권에 대한 사명(파견)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등 종교와의 만남

프리들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앞으로 비그리스도교 세계 앞에 소수 집단으로 서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미 200여 년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선교하여 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체험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의 이 체험은 보편 교회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불교, 유교 등의 유서 깊은 고등 종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왔고 이를 실생활에서 삶의 지혜 내지는 지침으로 삼아 왔다.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불교나 유교가 그리스도교와 만나게 해야 하며 이브 꽁가르의 말대로 ‘양적인 가톨릭에서 질적인 가톨릭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특히 한국 교회가 보편 교회의 일원으로서 해내야 할 사명(선교)이다.

이방 문화와의 만남

종교와 문화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어느 종교나 소위 우리말로 토착화라 번역된 Inculturation 의 과업을 지니고 있다. 아 토착화 과업은 이미 그리스도교 문화를 이루었다고 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아마도 서양에서는 탈토착화 내지 반토착화의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앞에서의 경우(고등 종교와의 만남)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는 이방 문화 앞에 소수 집단으로 서게 될 것이다 이방 문화 속에서 선교를 수행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체험을 보편 교회가 절실히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교회의 새로운 이해는 유구한 역사와 높은 가치관을 지닌 아시아 문화를 복음화의 적절한 수단으로 평가하게 할 것이다.

사랑의 나눔

선교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가난했던 과거를 지닌 우리에게는 미션(선교)이라는 말이 우리의 어려움을 여러 분야(육영 사업, 의료 사업, 사회 복지 사업 등)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쉽게 연상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 선교는 또한 정신적 물질적 부를 가난한 이웃 나라와 나누는 좋은 방편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에는 우리보다 어려운 나라들이 많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물질적 부를 그들과 나누어야 한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해외 선교에 더 많은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과거 선교의 역사를 볼 때 이 ‘나눔’(애덕)이 선교에 큰 의의를 부여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맺는 말

한국 교회는 아직도 선교 지방 교회이다. 그러나 이미 교계 제도가 설정된 독립된 교회이며, 젊은 교회로서 미약하나마 보편 교회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

해외 선교에 대해 우리는 이제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선교 성소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신학교나 수도자 양성 기관에서도 선교학을 가르쳐야 한다.

이름만 있는 주교회의 전국위원회의 하나인 선교위원회 (Evangelization Committee) 도 실제적인 기구가 되어 한국 교회의 선교 사명 수행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교황청 전교 원조회 한국 지부는 그동안 보편 교회의 원조금을 받아 각 교구와 신학교 그리고 수도 공동체에 전하는 역할만 해오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전교 연맹 (한국 지부)을 결성하고 전교회를 부활시키고 어린이 전교회를 전산화ㅡ현실화하였으며,금년 성소주일을 기해 베드로 사도회(한국 지부)를 발족시킬 계획이다. 받는 일만 있어서야 체면이 안 선다. 받았으면 줄 줄 아는 것이 한국인의 예의이다. 교황청 전교 원조회 한국 지부가 그동안 받는 창구였다면 이제부터는 주는 창구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마케도니아 전교의 계기가 된 사도 바오로의 영상을 떠올리게 된다.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호소하는 한 마케도니아인을 영상으로 본 그는 이를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것으로 믿고 선교 길에 나선다(사도 I6,7ㅡ10; 16 ?17장 참조).

북한과 중국의 우리 동포들 그리고 중국인들이 호소하는 소리를 우리는 듣는다. "이리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복음에 목마른 영혼들이 우리를 부른다.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약정토론 I : 원하림

선교와 토착화 주제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바로 며칠 전에 발제자의 원고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 충분히 논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희망 찬 전망

발제자의 논문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발전상을 아주 희망차게 보여 주고 있다. 평자는 몇몇 교구와 여러 수도회에서 그렇게 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보냈는지 몰랐다. 물론 전체 수는 아작 적지만, 발제자의 발표를 통해서, 한국 교회는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외 선교에 대한 개념이 신자들에게 올바르게 인식된다면,신자들은 한국 가톨릭 교회가 언제라도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 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것임을 보여 주었다. 또한 발제자는 한국의 해외 선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위해선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인가도 지적하였다.

토착화 세미나의 1년 주제가 모두 ‘토착화’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 오늘 세미나 주제에서만 ‘토착화’란 말이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발제자는 이 허점을 잘 지적하였고, 해외 선교와 관계된 토착화의 중요성을 올바르게 강조하였다.

92면에 있는 신(新) 용어인 ‘탈토착화’ ‘반토착화’라는 말로 전제한 토착화의 이해 부분만 제외하고는 평자는 발제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평자는 발제자가 지면 부족으로 전개하지 못한 몇 가지 점에 대해서만 면밀히 검토해 볼까 한다.

선교활동이란 무엇인가?

이 논문을 보면서 제일 먼저 평자 눈에 들어온 곳은 ‘선교 내용’ 난이다. '선교 활동’의 범주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는데, 내용에 있어서는 선교 활동이 마치 '자선 활동’ 또는 '난민 구제’ 같은 것과는 다른 활동인 것처럼 제시하면서,'유치원’ '양로원' 같은 것은 어떤 의미로 선교 활동으로 간주하였는가?

단순히 외국에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수도 생활’이 '선교 활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외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평신도 즉, 교포들뿐 아니라 일시적으로 해외에 나가 있는 해외 근무자,외교관, 건설 노동자 등과 같은 사람들 역시 선교사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인지? 선교는 단지 성직 수행만은 아니다. 그래서 평자는 발제자께 어떤 원칙 하에 선교 내용을 구분하였는지 그 견해를 듣고 싶다.

20년 간 한국 교회에서 사목해 온 평자의 체험에 비추어 볼 때, 아일랜드, 미국,호주,뉴질랜드 등지에서 파견된 골롬반 신부들 모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교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서품을 받고 사제로서 외국에서 수년 간 사목했다는 단순한 사실로 자동적으로 선교사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교회를 많이 짓고,자선 사업 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대화의 필요성

선교의 특징은 하느님 체험을 나눔으로써 해방되고 풍요로워지며,상호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국가, 문화, 종교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 중심 활동은 사람과의 대화이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은 비록 언어를 배우고 지역 풍습을 몸에 익힌다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못하고 있다. 우리는 대화가 그저 이야기하는 것 이상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교사들은 사람들과 말로 이야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제로서의 권위를 행사하고,그 지역 상황을 고려하기보다는 그들의 모국 교회에서 본 그대로 업무를 처리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사목의 모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선교사들이 진정한 대화보다는 권위주의와 명령하달 식으로 사목을 하는 그 자만심은 아마 정치적인 면뿐 아니라 문화적 영성적 자만심에서 온 것 같다. 미국,영국, 스페인 등과 같이 과거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나라에서 온 선교사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한국과 같은 작은 식민지 국가에서 온 선교사들도, 그들의 선교 자세가 그리스도교 가치관에 기초하여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여야 함을 쉽게 잊고 있다. 선교는 정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를 앞세운 종교적 정복이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빈 자리 채우기

많은 선교사들은 나이가 들수록 처음에 지녔던 열정이 점차 사그라지면서 쉽게 안주하게 된다. 국가, 문화, 종교, 상별, 빈부 격차 등의 여러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선교 정신이 점차 약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 정신에 입각한 진정한 사목을 하기 보다는 그저 빈 교회를 채우면서,거기에서 사제로서의 어떤 보람을 얻으려는 것 같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만의 조직 안에서 성사를 집행하고,특별한 교회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외국에서 사목을 한다고 할지라도, 또한 빈 교회를 채울 필요성이 아주 시급하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의 선교사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에 와서 우리의 사고 방식이 자본주의 사회 의 대형화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교회까지도 대기업처럼 생각하고, 해외 선교 활동을 마치 대기업이 세계 곳곳에 지사를 두는 것과 같이 생각할 우려가 있다.

복음화의 다섯 가지 필수 요인

지난 25년 간에 걸친 교회 공식 문서를 검토해 보면,완전한 복음화는 다섯 가지 필수 요인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거 생활,2)직접 선교, 3)타종교와의 대화,4)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5)성체성사와 연관된 삶이다. 평자는 이 중에서 3),4) 두 부분만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 고등 종교와의 대화

발제자는 한국 교회가 200년 간 다른 고등 종교 사이에서 성장해 왔으므로 한국인 선교사들은 타종교와의 대화에 폭넓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발제자의 주장은 물리적인 면에서는 맞지만 종교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 교회가 불교와 유교의 문화권 안에서 성장했지만 그들 종교들과 종교적인 면에서는 거의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은 불교나 유교 신자들을 대화의 대상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평자는 지난 몇 달 동안, 바티칸의 최근 문서에서 ‘타종교와의 대화에 있어서 어떤 위험성’을 경고한 것에 대해, 한국의 사제와 수녀들이 쉽게, 두려워하는 것을 보곤 놀랐다. 더군다나 그 문서 자체를 읽은 것도 아니고,신문 기사 정도를 읽고서 말이다.

또한 이 점에 있어서, 발제자는 왜 '고등' 종교만을 정확히 언급하였는지 궁금하다. 이 제안은 다른 종교들은 우리의 대화 대상으로 가치가 없다는 것인지? 고등 종교는 이미 조직화됐고 체계화된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지식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라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민간 신앙 등과 같이 체계화되지 못한 종교 신자들은 대부분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 되어 있으므로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우리의 형제로 생각하지 않고,결국 중산층을 위한 교희로 존재하며,민간 신앙에 대해 우월감을 가진 종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너무 지나친 논리 비약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가톨릭 교회의 세계화

발제자는 이 논문의 두 부분, 즉 한국 교회의 세계화(91면)와 사랑의 나눔(93면)에서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언급하였다. 전자는 후자보다 더 중요하다. 오늘날,많은 도의적 문제는 국제적인 구조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 문제들은 자선사업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지역적으로 풀 수가 없다. 그 구조 자체가 변화되어야만 하며,그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지 교회와 모국 교회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 선교사들은 과거에 미국 군대가 한국에서 얼마나,그리고 어떻게 인권을 억압했는지에 대해, 또한 한국 시장을 강압적으로 개방해 양담배를 수출한 문제 등에 대해 미국 교회의 관심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다. 그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에 있는 한국 선교사들은,몇몇의 한국 목재 회사들이 민다나오에 있는 우림을 베어 버리고 있는 것에 대해,도의적인 면에서 심각히 숙고하고 한국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해외 선교에 대한 현대 개념

우리는 이제 선교의 새 시대에 와 있다. 과거의 많은 선교사들은 수백만의 이교인들이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으면 죽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 복음을 전파했다. 지금 우리는,하느님께서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초월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있다.

오늘날의 선교사는 세 가지 주요 파제, 즉 문화,정의 그리고 생태학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1)서양화되지 않은 그들 고유 문화 안에서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2)국가 사이에서뿐 아니라 같은 한 나라 안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악화되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3·)하느님의 창조물 인지상의 모든 생명과 자연이 공해의 오염으로 파괴되어 창조 질서가 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예수의 제자로서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주제들을 가지 고 현대 선교사들은 일하고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신도 선교

선교사들이 위에 언급한 첫번째 주제를 다루려면,우선 사회 과학자들과 타종교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두번째 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려면,경제 학자들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번째 주제를 다루려면,과학자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 신앙과 과학,기독교 신앙과 경제학,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사회 과학 사이의 경계를 넘어 하나로 통합하려고 애쓰는 평신도들이야말로 선교사라 할 수 있다. 만일 한국 교회에 신앙과 전공 분야를 하나로 봉합시킬 수 있는 익명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많아진다면 그때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해외로 파견되는 성직자 선교사들은 위의 언급한 세 가지 문제, 즉 문화,정의 그리고 생태학 문제를 가지고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교량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모국 선교

발제자의 논문 제목에서 '해외 선교’란 말의 사용은 몇 가지 다른 종류의 선교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들은 무엇인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교는 국가간의 경계뿐 아니라 문화,계층간, 성별,종교간,신분,경제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이다. 가톨릭 교회는 중산층의 사람, 남성과 성직자 위주, 서양과 로마식 교회에 머물러 있는데,가난한 사람,여성들,평신도, 토착민, 소외된 자의 측면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선교사들의 사명일 것이다.

만일 교회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농부들에게 진실로 관심을 갖는다면, 그 같은 선교 정신은 해외 선교와도 연관되어 자연히 성장하고 활발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모국’ 선교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조직적인 기술만 가지고는 성공적인 해외 선교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카리스마의 일상화 (Routinization of Charisma)

종교 사회학자인 막스 웨버 (Max Weber) 는 아주 흔한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카리스마의 일상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모든 종교 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처음에 지녔던 열정이 점차적으로 악화되는 반면,구조와 조직 중심이 되어 그 안에 안주하게 되기 쉽다. 대부분의 조직들처럼 교회도 커질수록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고,보수적으로 되면서 어떤 경계도 넘어서지 못하며, 결국 권력만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통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토론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1) 한국 해와 선교 운동은 현실적으로 한국 교회의 전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없다. 2) 만일 한국 선교사가 외국에 나가 그 지역 주교님이 요구하는 일만 한다면, 그 들은 이미 선교 성소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학교 교과 과정에서의 선교학

이제 신학교와 연관된 한 가지 문제점을 제안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성서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가 참교회가 될 수 없듯이,교회가 아무리 작더라도,선교를 단지 장식품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참교회가 될 수 없다. 신학자들은 ‘선교가 교회의 필수 분야'임을 말로는 쉽게하면서도, 과연 이중요성을 신학교 교과 과정에 어떻게 반영시키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평자가 언급한 모든 경계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성(聖)과 속(俗),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해 이 경계를 뛰어넘은 하느님의 역사야말로 선교의 근본 정신이라 하겠다. 선교를 증진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선교학이 선택 과목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의 한 분야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교회가 선교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학교에서 선교 교육을 받은 사제들을 통해,평신도들이 선교에 대해 올바른 언식을 하게 되고,나아가 선교 사업에 협조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면, 아마 외방 선교회뿐 아니라 다른 선교 단체에도 아낌없이 지지를 보낼 것임 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약정토론 II : 배경민

한국 천주교 창립 제3세기의 여명기를 시작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해외 복음 선교의 현실과전망’에 대해서 주제 발표하신 발제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200년 가까이 받아만 오던 교회의 모습에서,세계 교회의 요청에 호응하여, 우리 현실이 풍족한 것 은 아니라 하여도,이제는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세계 교화와의 형제적 나눔에 대한 소명을 자각하고 실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오늘의 해외 선교에 대한 토론 주제는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평자는 발제자의 연구 발표에 대해 소견을 밝히면서,외방 선교회에 소속된 사람으로서의 입장을 부연하고자 한다.

1) 첫번째로 선교사의 개념 문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에서는 선교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선교란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복음 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사업을 말한다”(6항). 교회는 사실 선교를 그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세례와 견진으로 교회를 이루는 모든 신자에게 선교 의무가 부과되지만,협의로서는 오직 복음 선포자를 지칭하는 말로 선교사라 한다(한국가톨릭 대사전,'선교사’ 참조). 선교사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포교성성이 설립된 1622년이었는데, 선교사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에게 파견된 자를 의미하였다. 이는 17세기에 선교단의 사제와 수사들에게 적용되어 선교사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를 뜻하였다(상동). 이처럼 이방인이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선교 임무를 수행하는 자가 선교사인 것이다.

그런데 발제자의 통계 자료에서는 선교사의 개념이 모호하게 드러나고 있다. 발표문 88면에서 발제자는 선교사업의내용을 전통적인 선교 사업과 간접 선교로 분류하고 그 모두를 광의의 선교 개념으로 보고 있다. 간접 선교라고 하는 개념 가운데는 선교지의 방인 신자들을 위한 활동이 아닌 교포 사목과 이민 사목까지 포함하고 있는 직접 해당 수도회에 문의한 결과,교포 사목과 함께 학생 수도자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러 가지 선교 활동 가운데서 가장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선교 활동 중의 하나가 원주민과 그 나라 방인들에 대한 선교이다. 발제자께서 선교 활동에 포함시킨 자선 활동, 방송 선교,유아원, 기술 학교,양로원,고아원,내부 봉사 등의 활동은 교회의 커다란 보호벽 안에서 얼마든지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전통적인 선교 활동과는 엄연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다.

외방 선교사가 만일 자기 자신이나 자국민만을 위해서 일할 때에는 그 선교사의 정체성 (Identity)은 흐려진다. 선교사는 비록 인어,풍습,사고 방식 등이 같지 않은 가운데서도, 때로는 목숨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주님을 모르거나 복음의 빛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복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두번째로 선교사 파견에 대한 당위성 문제이다. 발제자께서는 선교사 해외 파견 목적과 동기를 경험 축적,교육 목적,보은(報恩)의 정신,공동체 카리스마,다양성과 친교 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선교 사명은 이런 부수적인 요건으로 이해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교회의 선교는 궁극적으로 “첫째, 성서에 기록된 대로 예외 없이 모든 이를 구하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의 실제적 구현이며, 둘째,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확한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순명이며, 셋째,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사랑과 그 하느님을 깨닫도록 이끌어서 온전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할 교회의 의무에 대한 실현인 것이다,(John Power, Mission Theology Today),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가 임의적으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이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교회에 맡겨진 의무인 것이다. E. Brimner 같은 신학자는 교회와 선교와의 관계를 "불과 불꽃”으로 비유하였다. "교회는 선교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에 의해 불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처럼 선교 없이는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E. Brunner, The Word & the World) .

3) 셋째로 국가와 교회의 문제이다. 발제자는 한국 교회의 세계화에 언급하면서 "한국의 세계화가 현대 세계의 필연적 요구요 추세라면 한국 교회 역시 한국의 세계화의 요구와 추세에 따라 세계화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순례의 여정을 가는 나그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발전의 부침에 따라 그 선교 정책·이 영향을 받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국가의 위상이 고양됨에 힘입어 교회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 15?16세기의 교회가 끊임없이 비판받아 온 바의, 군대와 경제력으로 힘을 과시했던 국가의 외교 정책에 편승한 선교 정책이 될 우려가 많다. 더구나 연이어서 발제자가 언급하는 '한국 교회의 북방 정책’이라는 항목에서는 제6공화국의 북방 정책과 한국 교회의 선교 정책을 하나로 접목시키듯 언급하고 있다. 평자는 이러한 점에 보완하여 세계 보편 교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 2천 년 역사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오던 서구 및 북미의 교회는 물질 주의,배금주의,이기주의, 쾌락주의에 물들어 성직지망자가 줄어 사제수가 감소하며, 신자들 또한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냉담하면서,교세는 계속해서 약화 일로 에 있고 신속하게 회복할 기미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복음의 씨를 얻어 성장하면서 순교 선열들의 얼을 이어받아 꾸준히 성숙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상황이 다르다. 지리상으로 조그만 나라 중의 하나인 이 땅에 신학교가 이미 서울,광주,대구, 수원 4곳이나 있고, 또한 부산교구와 대전교구에서도 신학교 건립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103위나 되는 많은 성인을 옹위하면서 또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교황 성하를 두 번이나 모시게 되었고,대개의 본당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세례성사를 받거나 견진성사를 받는 것을 우리는 해마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상황에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땅에 베풀어 주신 이러한 축복은, 성직자들의 노화 및 감소 현상과 교회의 선교 활동 약화 등의 시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나라 교회에 대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땅에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축복과 은총이 우리 한국 교회만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라고 우리가 주장한다면,우리는 또 다른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 되는데,그래서 우리 본당, 우리 교구, 우리 한국 교회만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이라고 단언하게 될 때, 과연 이러한 크신 축복을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 자자손손 대대로 항구하게 베풀어 주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여전히 성직자가 부족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아마 성직자 부족 현상은 세말까지 계속되리라 믿어지는데, 가진 것 없는 가운데서도 동전 두 닢을 헌금하는 성서의 가난 한 과부처럼,우리도 우리보다 더 어렵고 부족한 교회와 나눌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를 귀하고 곱게 양성하여 다른 나라 교회에 파견하고 봉헌한다는 것은, 마치 생명을 상징하는 빵과 피를 나누는 것처럼’ 서로 밥 이 되어 주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교황님께서도 200주년 때와 세계성체대회 때에 거듭해서 발전하는 한국 교회에 구체적으로 요청하신 것이 외방 선교이다. "부디,여러분이 모든 천주교인들 가운데 참된 선교 의식을 끊임없이 증진시키는 한편,한국의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가 좀 더 외방 선교를 지향하도록 노력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엠마우스 성시간 강론),

우리가 다른 나라 교회의 선교에 일익을 담당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사제상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삶 가운데서 체현(體現)하게 될 때, 다가오는 2천년대의 세계 교회 안에서 한국 교회의 세계 교회적 중요성과 그 주도적 역할은 현저하게 부각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해두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선교사의 파견 자세이다. 파견되는 선교사는 이방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겸손한 자세로 그들에게서 숨어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 발견하고 배우면서, 그들 안에 있는 복음 의 빛을 드러내기 위해 파견된다고 사려되는 바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고 (Kenosis) 세상에 강생하셨음 같이,선교사도 새로운 세계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육화의 신비를 구현하면서,전혀 새롭게 탄생해야 참으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될 수 있고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 가 가능한 것이다.

4) 네번째로 고등 종교와의 대화에 관해 한 말씀드린다. 한국 교회가 불교, 유교 등의 고등 종교와의 체험은 외방 선교에 있어 중요한 체험임은 전적으로 공감한다. 특히 이 자리를 빌려 고등 종교가 대다수를 이루고 가장 인구가 많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가장 적은 대륙 아시아를 주요 선교 대상 지역으로 환기시키는 바이다. 사실 고등 종교를 통해 그리스도 강생 이전부터 하느님의 빛을 찾고 갈망해 온 아시아 민족들에 대한 선교는 외방 선교를 주요 카리스마로 실천하고 있는 본회로서는 대 단한 관심이 모아지는 곳이다. 더구나 종래의 경우와는 달리,아시아 대륙의 선교는 아시아인들에 의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데,본회에서도 이번 3월 말이나 4월 초 에 본회의 두번째 선교지로,중국 본토를 겨냥하여 대만으로 3명의 선교 사제를 파견할 계획이다. 대만의 경우, 다른 아시아 지역 교회와 다름없이, 주민들이 대부분 토속 신앙에 깊이 젖어 있으며, 도교, 불교, 유교 등이 혼합되어 신봉되고 있다.

세계 고등 종교들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도 체험이 있다. 하지만, 그 나라 백성들의 신봉하는 종교를 잘 알고 배우며, 저들의 안목에서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타종교의 경전 안에 명시되어 있는지 발견 하도록 힘쓰면서, 그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고유성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 연구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5) 끝으로 지난 주 가톨릭 신문(1990년 3월 18일) 6면에서도 주교회의 선교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비판하면서 각 교구에 선교국 설치를 촉구했는데,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교회 내적으로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해 전교주일 담화문에서 교황님께서도 선교 교령 20항을 인용하시면서, 선교 활동에 활발하게 참가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아직 어린 교회라도 할 수 있는 한 속히, 예컨대 그 자체 교역자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하더라도,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할 선교사들을 스스로 파견하여 교회의 보편적 선교 활동에 실천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극히 적절한 일이다. 아직 어린 교회도 타민족에의 선교 활동에 활발히 참가할 때 보편 교회와의 친교는 어느 의미에 있어서 완성될 것이다”(20항). 또한 1983년에 개정 공포된 새 교회 법전의 791조에서도 이 같은 내용의 선교 지원책을 명시하고 있다.

제791조:교구마다 선교 협력을 증진하기 위하여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선교 소명(성소)이 장려되어야한다. 2.선교계획을 효과적으로 촉진시키기 위하여 특히 교황청 전교 원조회를 위하여 사제가 선임되어야 한다. 3.매년 선교의 날이 거행되어야 한다. 4.매년 선교를 위하여 합당한 헌금을 거두어 성좌에 보내야 한다.

이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지켜지지 않는 것이 1항이다. 교회법과 교황 성하의 여러 권고 서신과 회칙에서도 선교 성소 육성을 적극 권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외방 선교에 투신하기 위해 본회에 모여 온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많은 반대의 어려움을 겪고서 본회에 입회하였다. 외방 선교에 대한 반대의 입장에는 여전히 이해 타산적인 관점에서 선교 사제를 외국에 파견하는 것이 커다란 손실을 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부과하신 선교 사명의 의무를 실천하기 위해서도 선교 성소를 육성하는 데 노력해야 하겠지만,나누어 줌으로써 받게 된다는 성 프란치스꼬의 기도에서처럼 우리도 나누어 줌으로써 풍성하게 된다는 나눔의 신비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구 사제 성소도 귀중하고 어려운 것이지만, 선교 사제 성소는 더욱 귀하고 어려우며,평생을 오지(奧地)에서 항구한 열성으로 훌륭하게 선교 사업을 수행하기는 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다. 선교 성소에 대한 관심을 갖고서 선교 성소를 양육하며 선교 사제를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는 등 범교회적인 협조가 촉박함을 밝혀두는 바이다.

약정토론에 대한 발제자의 답변

약정토론에 참가하신 두 분 신부님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다시 한번 문외한이 이런 전문적인 연구 발표회에 나서게 된 것이 얼마나 외람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주제 발표문에서 부족하게 언급하였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보충하고자 한다.

원하림 신부님의 지적에 대하여

* '탈토착화’ 또는 '반토착화"?

이 말들은 주제 발표문에서 선교의 관점에서 내 나름대로 만들어낸 말이다. 한국 천주교회 200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이미 선교사 이전의 박해 시대에 우리 선조들 이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였는지 상고해 볼 때 오늘의 한국 교회가 깊이 천착하는 바 없이 서양화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진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로마 교회의 지부처럼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냐고 우려하는 한국 교회사 학자를 만난 적도 있다. 서양으로부터의·복음 선교에 있어서 복음과 함께 그들의 문화가무 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경계해야 되며 서양의 선교사들 역시 복음을 전할 때 자신들의 문화를 마치 복음의 일부인 양 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 선교 활동?

선교가 무엇인지는 시대의 요청 내지 시대의 징표에 따라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인간의 자기 이해(인간학.),그리스도인의 자기 이해(신도학), 교회론,그리스도론 등의 발전에 따라 선교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주제 발표문에서 선교의 내용으로 적은 것은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한 단체에 보낸 설문 조사서에 대한 각 단체의 응답을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에 명확히 구분, 정리되지 못했음을 양지하기 바란다. 나름대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 활동’으로 분류한 것은 일반적으로 모두 선교 활동에 참여하고 있거나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른 협의의 선교 활동을 펴고 있는 경우이고('전교’ 역시 같은 의미일 것이다), ‘원주민 선교’는 남미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말과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사는 인디오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경우이고,‘이민 사목’은 소위 ‘교포 사목'과는 달리 현지 교회의 수도 공동체 안에서 현지 교회의 사목 방침에 따라 교포들을 돌보는 경우이고, '내부 봉사"는 같은 수도회의,성소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관구에 파견되어 회원들을 돕는 경우일 것이다.

1990년 3월 18일자 가톨릭신문(1,6면)에서 선교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화 활동이고 사목은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화 활동으로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선교는 넓은 의미에서 '교회를 심는’(선교 교령, 6항) 모든 일이다. 교회 문헌에 따르면 교회는 하느님과의 일치와 인간 사이의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요 도구인 일치의 성사이며(교회 헌장,1항) 하느님과의 친교와 이웃과의 친교나 나타내고 이무는 친교의 성사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32항 참조). 따라서 주제 발표문에는 설문 조사의 응답대로 이 모든 활동을 선교의 내용으로 보았고,파견된 자리에서 어떠한 활동을 통해서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친교와 이웃과의 친교에로 인도하고 있다면 이 모두를 선교라고 일컫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오늘날 선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하는 일인지 잘 밝히고 있으며 전통적인 선교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폐쇄적인 선교관을 깨뜨리고 개방된 선교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부님의 강조점인 또 하나의 ‘경계'의 타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업화되지 않은 단순 사회에서는 개인과 가정과 이웃과 부락 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이를 형제들과 나누게 하는 일차적인 복음 선교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고등 종교와의 대화?

주제 발표문에서는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를, 한국 교회의 세계화, 한국 교회의 북방 정책,고등 종교와의 만남,이방 문화와의 만남, 사랑의 나눔 등의 관점에서 전망해 보았다. 이것은 특별히 오늘의 한국 교회에 해당되는 전망이다.

따라서 주제 발표문에 고등 종교만 언급한 이유는 어느 곳이든지 토속 신앙 내지 민간 신앙은 하나의 중요한 선교상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이런 기본적이고도 일반적인 문제 말고도 불교나 유교와 같은 고등 종교에 대해서도 올바른 이해와 태도를 지닐 수 있음을 강조했을 뿐이다. 신부님은 고등 종교와의 대화에 한국 선교사들이 실제로 폭넓게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지금 주제 발표문에서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전망이다. 우리는 불교와 유교의 문화권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선교 성소 양성 과정에서 불교나 유교에 대한 교육을 올바른 선교적 차원에서 받기만 한다면 그 어느 나라의 선교사보다 더 훌륭한 대화를 이들 종교와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 국내 선교,평신도 선교

선교가 얼마나 개척자(frontier) 적인지를 신부님은 잘 설명해 주셨다. 선교사는 실로 최전방에 나선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선교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 나서야 하며 그 경계를 뛰어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있어서 국내에서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고, 특히 평신도들이 본래적인 선교 임무를 수행해야 된다. 선교 성소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교육을 통하여 육성되는 것이 아니다. 선교 성소는 교회의 진정한 선교 활동,평신도들의 예언자적인 선교 활동 안에서 육성되고 개발될 것으로 믿는다.

배경민 신부님의 지적에 대하여

* 선교사란?

선교사의 개념은 선교의 개념에 따라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선교하는 사람은 모두 선교사라 할 수 있다. 주제 발표문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이웃과의 친교를 이루는 일’ 즉 교회를 심는 일을 모두 선교의 범주에 넣었고 선교사도 그에 따라 넓게 해석하였음을 다시 언급해 둔다.

* 선교사 파견의 동기와 목적

주제 발표문은 해외 선교의 현황을 선교사, 파견 단체, 파견 지역, 선교 활동 내용, 파견 시기,파견 경위, 파견 동기, 선교사 양성, 해외 선교의 어려움 등으로 보고하였는데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여기에 소개된 내용은 발제자의 주장이 아니라 설문 조사서의 응답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선교사 파견의 목적이나 동기가 원칙적으로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논하는 것은 주제 발표문의 영역 밖이라고 본다.

신부님은 한국 선교사의 해외 파견의 전망에서 언급한 한국 교회의 세계화와 한국 교회의 북방 정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이나 주변 정세의 변화가 한국 교회의 선교 사명 수행에 본질적인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다만 여기 소개된 몇 가지 전망은 본질적인 선교 이유(ratio missionis) 라기보다 한국적인 상황의 매우 부수적인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의 어느 지역 교회든 다 해당되는 이웃들이어서 주제 발표문에서 생략했던 것임을 양해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