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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5월호 (제 136호)
제4절 교황청 (6) 법원 가. 로마 공소 법원 (Sacra Romana Rota) ①12세기까지 교황께 상소되는...

주일의 말씀
1990년 5월호 (제 136호)
부활 제 4주일 : 5월 6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사도 2,14-41) : 오늘 독서에 나오는 ...

교회의 정의 활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5월호 (제 136호)
머리말 정의를 위한 한국의 천주교회의 활동은 1967년 강화도 심도 직물 사건에 관한 한국 주교단의 ...

가톨릭 청년 운동의 신학적 근거
1990년 5월호 (제 136호)
한국 교회가 처하여 있는 전교 3세기의 이 시기는 인간 생활의 전 영역에서 급격한 변화가 예견되는 2000...

복음 선교의 토착화 해의 복음 선교의 현실과 전망
1990년 5월호 (제 136호)
일 시 : 1990년 3월 26일(월) 오후 3시-6시 장 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회의실 사 회 : 김성태...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
1990년 5월호 (제 136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

나의 고백
1990년 5월호 (제 136호)
함 제도 (Gemrd Β. Hammond) 신부님은 1933년 8월 15일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으로 1960년 뉴욕 메리놀 ...

가톨릭 신자와 가족 계획
1990년 5월호 (제 136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하나인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용정, 연길에서의 수도자의 길
1990년 5월호 (제 136호)
대 담 : 김안나(올리베따노 성 베네덕도회 수녀), 김정수(「사목」주간·신부) 일 시 : 199...

남북한의 평화적 민족 통일에 관한 신학적 고찰
1990년 5월호 (제 136호)
서 론 얼마 전부터 동구 공산권 여러 나라에서는 독재자,독재당,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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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단 1990년 5월호 (제 136호)

교회의 정의 활동의 신학적 근거

오경환 (인천교구 간석동천주교회 신부·사회학)

머리말

정의를 위한 한국의 천주교회의 활동은 1967년 강화도 심도 직물 사건에 관한 한국 주교단의 공동 성명서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노동자의 부당 해고를 규탄하기 위해서 한국 주교단이 발표한 최초의 성명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 참여는 몇 년 후인 1970년 10월 5일 원주 문화방송 사건으로 인한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규탄 시위와 주교단의 공동 교서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더니 1974년 7월 10월 지학순 주교의 구속에서 발단된 시국 기도회를 통해서 극대화되었다고 보인다. 아 기도회를 계기 삼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1974년 9월24일 원주원동성당모임에서 결성되었다. 그리고 1975년 춘계 주교회의는 주교단 메시지 2항에서 정의평화위원희를 주교회의 산하 기구로 설치한다고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87년에 6,29 선언문이 발표되기 전까지 명동 성당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성당에서는 기도회가 개최되었으며 수십 가지의 성명사가 발표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 명의 사제들이 투옥되었다. 인권 회복과 정의 실현을 위한 이와 같은 교회의 활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비신자만이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서도 교회의 사회 참여와 정의 활동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한결같은 질문은 한국의 천주교회가 무슨 이유로 혹은 무슨 근거에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렇게 강력하게 뛰어드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정의 활동과 교회의 본질이나 사명과의 관계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보였다. 그들의 질문은"사회 운동 단체도 아닌 교회가 무엇 때문에 사회 참여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교회의 사회 참여의 동기와 이유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혹은 상황적인 설명보다는 신학적인 설명이 교회의 사회 참여와 정의 활동을 설명하는 데에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만약 교회의 활동이 신학적인 수준에서 설명되고 정당화될 수 없다면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크게 빗나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 활동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교회는 궤도를 이탈한 것이라고 판단될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의 정의 활동을 보고 의문을 갖는 것도 적절한 신학적 설명을 모르든가 혹은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 참여에 열성을 보였던 만큼 그것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일에 충분한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성서뿐 아니라,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나 교황의 다른 회칙에는 그것을 위한 신학적 설명이 상당한 정도로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와 교회의 사회 교서1)에 의존하면서 교회의 정의 활동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I. 하느님 아버지의 정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대행자가 되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하느님 아버지가 하신 것을 따르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되고 신자들은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권이나 정의의 문제에 관해서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행적이나 소원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창조의 이야기,출애굽의 이야기 그리고 예언자들의 선언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서 전 세계 안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임을 보여 준 다.

세상을 창조하면서 하느님이 가지셨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의 정의를 인간의 공동체와 나누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그 자신이 정의로우실 뿐 아니라 하느님의 첫째가는 요청도 정의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일을 정의롭고 공평하게 처리하신다. 하느님은 불의를 저지를 수 없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자신의 정의로운 길을 따라서 인간들이 서로 정의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법이 나의 척도요,정의가 나의 저울이다”(이사 28,17)라고 말하셨다. 이 말씀은 정의가 얼마나 하느님의 중대한 관심사인지를 보여 준다. 하느님은 예언자 아모스를 통하여 정의에 대한 관심을 또다시 강조 하였다. 인간이 바치는 순례절, 분향제,곡식 제물,살진 제물보다 하느님은 정의가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이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아모5,23-24), 이렇게 고찰해 보면,하느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공경하는 방법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하느님은 자신이 억압받고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옹호자라고 드러내신다(출애 22,21-22).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드러내는 구약 성서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목표는 정의로운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불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출애 3,7-8), 나아가서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조직적인 불의의 희생자를 위하여 정의를 효과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예레 22,15성).

구약 성서의 곳곳에는 정의를 위해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도구로 삼아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정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만민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역사의 궁극적인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역사는 의미와 일치를 가진다고 파악된다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 행위의 궁극적 목표는 따돌려진 이들을 포함시키는 평등과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이들에게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면서 강압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직접으로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예언자나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심지어는 비신자들의 협조와 노력을 통해서 행동하시는 것이다.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그들을 알아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그는 하느님을 진정으로는 모르는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이 요청하는 정의는 마음의 회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은 나쁜 법률의 폐지 뿐 아니라,백성의 권리의 신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제도적 불의를 자행하는 이들을 이렇게 책망하였다.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악법을 제정하는 자들아,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만드는 자들아! 너희가 영세민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내가 아끼는 백성을 천대하여 그 권리를 짓밟으며" (아사 10,1-2). 하느님이 원하시는 정의는 당장 급한 고통을 풀어 주는 자선 사업만이 아니라,더욱 근본적인 제도의 개선, 굴레와 압제에서의 해방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 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리는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이사58,6-7).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은 이렇게 정의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의 목적을 실행하는 대리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인간 관계와 사회 구조 안에서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할 소명을 받은것이다. 만약에 교회가,그 성직자와 신자들이 정의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그들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진정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과 강력한 요구를 무시하면서, 교회가 그분을 알고 또한 섬긴다고 말할 수 없다. 교회가 정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종교의 초월적 가치를 배반하고 필요 없이 세속적 일에 간여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거나 불신하는 이들은 교회가 섬기려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를 모르고 따라서 성서의 하느님아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정의를 위한 교회의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될 만하다. 그러나 성서를 믿는 신자라고 자처하면서 정의에 무관심하든지 혹은 교회의 정의 활동을 비난하는 사람은 성서의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가상적인 신을 믿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도나휴의 말마따나 "정의를 위한 노력은 당신 백성의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개입이나 고통의 인간 세계 안으로 들어 온 예수의 육화보다 더욱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2) 양민을 괴롭히는 악법을 제정하고, 영세민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며 권리를 짓밟는 이들이 위정자라고 해서,굴레와 압제를 씌우는 이들이 최고의 위정자라 할지라도,하느님의 요청아 중지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노력과 발언이 정치라고 인정된다 해도 교회가 정외를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교회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점에 대하여 2차 세계주교회의는「세계 정의에 관하여」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구약을 읽으면 하느님께서는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자,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자로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인간에게는 당신을 믿고 이웃에게 정의를 실천하라고 명하셨다. 따라서 인간이 정의의 의무를 다해야만 하느님이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자로 나타난다.”3)

II. 예수의 정의

가톨릭 교회는 예수가 세상에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기 때문에, 예수야말로 하느님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가장 정확하고 진실 되게 전해 준다고 믿는다. 교회는 예수가 가르쳐 주고 보여 준 하느님을 믿으며 그의 가르침과 생활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단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정의를 위해서 무엇을 가르쳤고 무엇을 실천하였는지는 신자들에게는 지극히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는 구체적 역사의 상황 하에서 생활한 분이고, 그 상황 안에서 구체적 생활양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특정의 역사적 상황 하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인권을 신장해야 하는 교회는 예수의 처신을 숙고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당시와 정치적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가? 그는 정의와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 당시의 유대인 사회는 로마의 점령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리고 로마 지배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소수의 특권층이 있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한 농어민이거나 소상인들이었다. 특권층에는 당시의 세습 사제들이 많았으며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와 같은 지식인들이 있었다. 특권층에 속하는 사제들과 지식인들은 성전, 전통을 고수했고,따라서 안식일의 타협 없는 준수와 율법에 의한 엄격한 제재를 주장했다. 집권층은 로마와 종주권을 무조건 존중하는 한편, 어떤 수단으로든 일종의 성직자 중심의 종교 국가를 수호하여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부심하였다.4)

예수는 집권층의 일원이 되거나 동조자가 되기를 거절하였고 집권층과 부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그들의 사회 비리, 권리 침해,수탈 행위, 학정을 고발하였을 뿐 아니라,가난하고 억눌리고 억압받으며 불우한 이들을 가까이하고 변호하였다. 예수는 궁궐에서 고운 옷 입고 사는 자들을 통렬하게 비난하였다(마태 11,8), 예수는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하는 폭군들을 비꼬았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들온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루가22,25), 예수는 친로마파의 두목인 헤로데를 여우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하였다(루가 13,32), 예수는 집권층을 구성하는 사제들과 지식인들의 외형과 율법 준수에 치우친 종교 생활을 거침없이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와 특권에 위협을 가하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하였던 최초의 설교에서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4,18-19)라는 성서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정의와 인권에 대한 관심을 처음부터 나타냈다. 예수는 과부(루가7,11-15; 18,2-5; 21,1-3)와 이방인들에게(루가 10,30-37) 뚜렷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예수는 또한 자캐오가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자 크게 칭찬하였다(루가 19, 8-10). 이와 비슷한 관심을 보여 주는 대목을 신약 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변두리로 밀려난 인간들에 대한 예수의 지대한 관심과 아울러 정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요더(Yoder)의 주장대로,5) 예수의 말과 행동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었으나 정치적인 색깔과 효과를 심각하게 생산하고 있었다. 예수는 정치적 혁명을 추구하던 당시의 열성 당원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일부는 예수에게 끌리어 제자가 되고 말았다. 예수의 언행과 처신은 자유와 정의를 바라던 민중에 게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위치와 세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예수는 질병, 고통,죽음만이 아니라 가난과 억압도 없는 나라,정의와 자유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기존 체제의 집권자들은 예수를 심상찮은 위험 인물로 보기 시작하였으며, 사회 안정과 정치적 문제를 만드는 인물로 파악하였다. 정의와 자유 및 해방을 거론하는 최초의 설교를 시작할 때부터 억압적인 체제의 집권층은 예수를 경계 하고 탄압하도록 되어 있었다. 십자가형은 본래 정치범들이 당하는 사형의 방법 이었으며 예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인 죄목이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형이라는 가혹한 죽음을 가져온 원인 중에 하나는 분명히 예수의 생전의 처신과 언행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관심, 다시 말하면 정의와 인권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노력이 그분의 죽음을 초래한 한 가지 원인이라고 보인다. 특권과 세력을 유지하려는 집권층의 욕심과 도전자를 제거하려는 그들의 반격이 예수의 죽음을 가져온 원인 중에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예수는 자신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의 역사적 상황 아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고,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준 것이다. 지배층이 사회 비리,권리 침해, 학 정을 자행하여 수많은 이들이 가난과 억압으로 고통을 당하는 상황 하에서는,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따르려는 신자들도 정의와 인권을 위해서 철저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는 틀림없이 보여 준 것이다. 예수의 생활은 신앙 생활과 정의나 인권에 대한 무관심이 도저히 융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려는 신자들의 생활 안에는 반드시 정의 실현과 인권 신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포함되어야 한다.

예수가 집권층이 자행하는 사회 비리를 공박하고 권리 침해와 학정을 고발하며,가난하고 변두리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편애하였다고 해서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였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처신과 언행을 있지도 않은 사회 혼란과 분열을 조성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는 이미 억압자와 피억압자, 가난한 이들과 부자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사회는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었으며, 집권층은 그 분열을 공고히 하고 유지하려고 부심하였다. 예수의 가난한 추종자들이 뭉쳐서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기 전에, 집권층은 재빠르게 위험을 감지하였으며 단호하게 행동하였다. 예수의 처신은 사회 갈등을 창출 할 가능성이 있었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물론 필연적으로 갈등을 수반한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사회 분열을 치료하여 일치를 가져오며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며 더욱 파괴적이고 과격한 갈등을 예방하는 것이다.

III. 사랑과 정의를 위한 활동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가기 직전에 유대인의 복잡한 법률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여기 서 예수는 인간들 간의 상호적 사랑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중대한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당신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을 평가해서 자신의 진정한 제자인지를 판별할 때에, 그 인간들이 진정 사랑을 실천하는지를 보겠다는 것이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30-31). 그 학자가 이 두 계명이 성전에서 온갖 종류의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동의하자, 예수는 "당신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12,34)라고 평하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모스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은 분향제, 곡식 제물이나 노랫소리보다는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고 서로 위하는 마음이 개울처럼 흐르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는 번제물과 회생 제물보다는 하느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정의와 사랑이란 것은 다른 것인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다른 것인가?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일치시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4,,12). 보이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더욱 시급한 것이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에 불과하고,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해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

1971년에 열린 2차 세계주교화의 문헌인「세계 정의에 관하여」도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보이는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하느님과의 관계와 인간간의 관계는 불가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간의 분열은 동시에 하느님과 의 분열을 의미한다. 인간 간의 분열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결코 섞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직결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에 드리는 응답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가장 힘있게 나타난다" 다시 말 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인간에 대한 사광을 거부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단지 감정에 머물지 않고서 효과적이어야 하며 특히 가난한 이들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 효과적인 사랑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야고1,27),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특별히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변두리에 놓인 사람들에게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최후의 심판관이 인간들의 잘잘못을 가릴 때에,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였는 지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최후 심판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노력이 많은 제물이나 번제보다 더욱 요청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어서 "여기 있는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25, 40)라고 말하였다.

과거에 너무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계명이 요청하는 것을 지나치게 안이하게 이해하였다고 생각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라는 말씀을 단자 자선 행위를 하라는 것으로만 파악하였던 시대가 있는 듯하다. 이 사랑의 계명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당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자선 행위에 대한 요청으로 이해되었지 그들을 그 상태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정의를 실천하라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가난과 불행은 그것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잘못이나 불가사의한 운명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 가난과 불행이 다른 인간의 욕 심이나 죄악적인 행동과 결정 때문에 발생하고 또한 유지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불행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자선을 통해서 돌보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고치거나 제거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아 있는 것이고 거기에는 항상 따뜻한 자선 행위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고통과 불행은 어떤 이들의 불의한 행동을 중지사키고 나쁜 관습과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정의를 위한 노력을 통해서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욕심이나 죄악 때문에 만들어 놓는 고통과 불행도 많은 것이다.

인간의 죄악적인 마음과 결정으로 발생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제거될 수 있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사람을 그 처지에 방치해 두고서 위로하려고만 하는 것은 효과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못될 수 있다. 자선은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기보다는 위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반면에, 정의를 위한 노력은 위로하기보다는 문제의 원인을 색출해서 제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강력한 요청은 자선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정의를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앞에서 말한 2차 세계주교회의도 사랑과 정의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정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은 이웃의 존엄성과 권리를 인정하라는 정의의 절대적 요청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사랑 안에서만 그 내적 충실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상이요 그리스도의 형제이므로,그리스도인은 각 사람 안에서 하느님 자신과, 정의와 사랑의 절대적 요청을 발견한다.”7) 이렇게 고찰 하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하느님의 요청이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당부는 같은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고찰하는 신학적 윤리학적 저술이 풍부하게 있는 것이다8)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의를 요약한다면 ''만약에 당신이 사랑을 사회적 현실로 바꾸면, 그것은 정의가 된다”9)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정의를 수정하고 변이시키는 힘이라고 파악된다. 그렇게 되자면, 사랑은 정의의 문제에 깊이 개입해야 하고 정의를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사랑은 정의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정의가 요청하는 것보다 적은 것을· 요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은 정의로운 인간 관계와 구조를 추구함으로써만 정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사랑의 필연적인 전제 조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사랑과 정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대에 사랑의 계명은 교회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계명은 교회가 불의한 제도의 개혁에 매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램시의 말 대로10)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직접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변해야 하는 기존 구조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개선에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억압과 불의에 대하여 항의하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예수의 사명을 계속하는 일에나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실패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은 국가적인 불의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사회의 정의롭고 필요한 변화”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노력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다.

예수는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주었고 사랑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이웃에 대한 효과적인 사랑은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이들,소외되고 변두리에 방치된 인간,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자선의 행위뿐 아니라 그 불의한 구조와 제도를 개선하려는 정의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많은 고통과 불행은 불의한 제도 때문에 발생하고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의한 구조와 제도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악적인 행동과 결정으로 말미암아 탄생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를 개선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사회 갈등을 조성하고 불안을 창출하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반대하는 것은 사랑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제도의 개선 없이,사회 갈등이나 불안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실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예수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해석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특권층의 권력과 세력을 옹호할 뿐 아니라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이들을 현재의 상태에 묶어 두려는 의도를 위장하는 사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인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주]

1) 오경환, "전통 사회의 변모와 천주교의 사회 윤리”,현대 사회와 전통 윤리(고려대학 교, 민족문화연구소,1986),491?517면. ,

2) John R. Donohue, S.J., "Biblical Perspectives on Justice," in John C. Haughey, ed., The Faith that Does Justice(New YorkPaulist, 1977), 109.

3) 세계 정의에 관하여, 14면.

4) 한스큉, 정한교 역, 왜 그리스도인인가(분도출판사 1982, 86-92면. 96ㅡ97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성염 역, 해방신학(분도출판사:1977), 290?297면.

5) John Η. Υㅇder, The Politics of Jesus(Grand Rapids:Eerdmans, 1977).

6) 세계 정의에 관하여,16면,

7) 같은 책, 16면.

8) Gene Outka, Agape(New Haven:Yale University Press, 1972) ; John P. Langan, S.J., "What Jerusalem Says to Athens," in John C. Haughey, ed., The Faith That Does Justice, 152?180.

9) John Shea, "Spiritual Empowerment and Social Ministry," in the Proceedings of the Catholic Committee on Urban Minstries' Conference, p. 1.

10) Paul Ramsey, Who Speakes for the Church?(Nashville : Abingdon Press, 1967), 116.

11) 민족들의 발전, 51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