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3월호 (제 134호)
제3절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 5. 추기원 회의 제353조 제1항 : 추기경들은 주로 교황의 명령...

주일의 말씀
1990년 3월호 (제 134호)
사순 제1주일 : 3월 4일  1. 독서의 배경과 주제 제1독서(창세 2,7-9 ; 3,1-7) : 오늘 독서에는...

교회의 사회 교리의 연원과 전거
1990년 3월호 (제 134호)
I. 사회 교리의 연원 흔히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1891년 5월 15일 발표된 레오 13세의 회칙「노동 헌...

동유럽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서 남북한의 통일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1990년 3월호 (제 134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

나의 고백
1990년 3월호 (제 134호)
원로 시인 구상 씨는 1919년 9월 16일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천주교 신자이며 일본 니혼 대학 종교학과를 ...

깊은 구렁에서 벗어나는 길
1990년 3월호 (제 134호)
시편 130장(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은 악의 수렁에 빠진 죄인의 슬픔,하느님께 대한 잘못의 ...

장애자 복지의 실태와 문제점
1990년 3월호 (제 134호)
대 담 : 김종진 (서울시 남부 장애자 종합복지관·사회사업가)     김경숙 (인천 노...

동유럽과 교회의 상황
1990년 3월호 (제 134호)
최근에,특히 19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역사 안에서 그처럼 짧은 ...

서독의 '국가 연합 구조'와 동서 진영의 이해
1990년 3월호 (제 134호)
1. 서언 우리가 역사라고 말하는 무한히 복잡한 인류사의 과정은 대부분 위정자에 의해서 진행되어 왔...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위기구조와 개혁 전망
1990년 3월호 (제 134호)
I. 머리말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났듯이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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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유럽의 정치 변화 1990년 3월호 (제 134호)

동유럽과 교회의 상황

ML 보카타 (부산대학교독어교육학과강사.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녀)

최근에,특히 19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역사 안에서 그처럼 짧은 기간에 그러한 중대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이 국가들을 보면서,이러한 사건들 안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와 독일의 역사를(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큰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소련

우선 1919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이 붕괴된 레닌 하의 소련 정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레닌은 유물론적 입장에서 종교를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고 인간을 일정한 훈련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그는 신앙을 수천년 동안 이어온 인간의 발전 과정에서 인간 스스로에게 주어진(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습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 훈련의 결과 (Selbst-Dressat) 는 폭력으로 제거시켜야 하며 새로운 징후에 대해서는 신이 없는 혁명적 인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했다.1)

소련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형언할 수 없는 매우 큰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레닌의 잔혹한 종교 박해 이후 1936ㅡ1937년에 스탈린의 통치 하에서 종교 탄압은 정점을 이루었다. 전쟁 동안에는 박해가 약간 완화되었고 사람들은 전쟁터로 끌려갔다· 새로운 박해의 움직임이 1959ㅡ1963,1964년에 있었고,그후로는 줄어들었으나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소련 정부의 비방’,혹은 ‘반정부적인 정치 선전’ 의 죄목으로 수감되기도 하고, 정신 병원에 끌려가기도 했다.2)공산 통치 하의 박해 때 전체 순교자의 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다음 표에 나타난 러시아 동방 정교와 수치로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표1>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자는 1918년 당시 약 160만에 이르렀다. “1923년까지 모든 주교들이 감옥에 갇히고 국외로 추방당하며 총살되었다. 사제 양성의 억압과 자연사,추방, 투옥에 의해 사제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모든 신학교가 없어지고, 대부분의 교회는 다른 용도로 쓰였다. 수년 이내로 교회의 외적인 종교 생활은 완전히 상실되었다.”4) 1929년과 1977년 소련 헌법에는 국민들의 종교와 양 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그중 1977년의 헌법 25조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소련의 국민들은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며, 종교를 가지든,가지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종교의 전례에 참여할 수 있거나 무신론을 선전할 수 있다.”5) 결과적으로 볼 때 외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권리는 단지 무신론자들에게만 한한다.

동유럽의 정세를 잘 간파하고 있는 비인의 쾨니히 (Ifemg) 추기경은 그 종교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전례 외에는 어떠한 교회 활동도 금지된다. 이것은 아동 교리, 성직자들의 가정 방문, 성인 교리, 청년 지도 활동, 자선 행위,교회 단체의 집회 그 어떠한 것도 해서는 안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을 전달하는 것은 단지 전례나 개개인의 대화에서만 가능하고, 가족들이 신자인 경우 신앙 전달은 가족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유치원에서부터 무신론 사상에 젖어 들게 되고, 그 사상이 전체 사회 생활을 침투해 스며들어 간다.”6)

1987년 초부터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시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1988년은 러시아 교회가 생성된 지 천년이 되는 해이며 세계의 관심이 교회에 쏠려 있었다. 1989년 12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당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회담은 신자들에게 희망을 증대시켰고, 그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련 내에 그리스도교, 회교, 불교 그리고 다른 여러 종교를 가진 민족들이 살고 있다, 나름대로의 신앙 을 가진 그들은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할 수 있고, 종교적 요구를 이행할 권리를 가진다"7) 소련 내에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새로운 법률이 준비 중에 있다.8)

소련은 우크라이나 통합 교회 (Umerte Kirche)를 받아들이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 1054년 로마와 비잔틴의 분리 이후 계속적으로 결합하려고 애를 썼고, 1596년에서야 ‘브테스트(Brest)의 합의’로 일치되었다. 통합 교회는 교황을 승인하나, 동방 정교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9)

1946년 스탈린 시대 때 동방 정교의 통합 교회는 렘베르그의 시노드 (Synode)에 참석하였다, 시노드에 참석하기 전에는 통합 교회의 모든 주교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시노드에 참석한 약 140명의 출석자는 어느 정도 강제에 의해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10) 참석자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상기하였다. "그 장면은 마치 장례식의 행렬과도 같았다. 모든 사람들은 침묵하였고 서로 쳐다보기를 꺼렸다"11) 시노드에 참석하지 않은 나머지 동방 정교의 약 3,500명의 성직자들은 결정을 승인하느냐 혹은 최소한 10여 년의 감옥 생활을 할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12)

삼한 박해로 인해 통합 교회의 행정 기구가 파괴됨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교회는 지하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88년 우크라이나 교회는 10명의 주교와 대략 6,000명의 사제와, 1,000명의 수도자가 있었다,13)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우크라이나 통합 교회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의 교회가 승인되기를 요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고르바초프의 희담 바로 전에 이 희망은 실현되어,우크라이나 통합 교회단체는 등록할 수 있고, 그것은 실제적인 승인을 의미한다,14)

2. 발트 삼국(三國)

에스토니아와 레트는 12세기에 덴마아크와 독일 선교사에 의해 그리스도 신앙이 전래되었고 리투아니아는 유럽에서 제일 늦게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국가로서 14세기에 리투아니아 야기엘로와 폴란드 여왕 헤드비히가 결혼하여 두 제국이 결합됨에 따라 이루어졌다.

16세기에는 다수의 에스토니아안과 레트인이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다각적으로 변화하는 정세에 따라 발트 삼국은 18세기에 러시아의 속국으로 있다가 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에 독립을 하게 되었다. 독립될 당시 에스토니아에는 77.6%의 루터교파,12%의 가톨릭 신자였으며 레트는58%의 루터교파와 23,69%의 가톨릭 신자, 리투아니아에는 73.9%가 가톨릭 신자였다, 발트 삼국의 개신교도는 대부분 루터교파에 속하며,침례교파도 있고 다른 종교 단체에 속한 자들도 있으며,이주한 러시아인들의 동방 정교로 있었다.

1918년과 1940년 사이에는 종교 생활이 자유로웠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체결된 비밀 협정에서 발트 삼국은 소연방 관할로 되었으며, 1년 후 조작된 투표와 군의 압력에 의해 발트 삼국은 소련으로 편입되었다. 시민들은 무자비하게 탄압 당하였고,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5 1941년에는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1944년 소련군이 재점령하기 전 독일군의 점령 하에서도 교회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고 소련 군대가 발트 삼국을 침투해 왔을 때 교회의 박해는 더욱 심하였다, 1963년 이후 이와 같은 형세는 약간 완화되어 교회의 박해는 누그러지고 더이상 집단 수감을 하는 일은 없었으나, 국가에서 법률로 규정 하는 것이 많아 교회 활동은 좁혀졌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 생활에서 피해를 보고 계속해서 감금되는 자가 속출하였고, 정신 병원으로 수송되는 자도 있었다.15)

월간지「순교자의 목소리」(Stimme der Martyrer) 1989년 10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에스토니아 : 소련의 에스토니아 지방의 종교 탄압에 대해서는 극히 일부분만을 알고 있으며, 그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단지 6개의 강제 수용소와 3개의 감옥, 그것이 알고 있는 전부이다.

레트 : 레트의 강제 수용소와 감옥에서 나온 이전 정치범의 증인 진술에 의해서,1986년 레트에서는 14개의 강제 수용소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고, 또 미성년을 위한 수용소가 따로 있으며, 그 외에도 8개의 감옥소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 독립된 리투아니아에는 2개의 감옥만이 있고,강제 수용소를 찾아 볼 수가 없었는데 반해 1989년 현재 리투아니아 지역에서는 14개의 강제 수용소와 7개의 감옥이 있음을 알 수 있다.16)

에스토니아에는 전쟁 전에는 6개의 본당에 약 3,(XX)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고 탈린(Tallin) 교구가 형성되어 교회 활동은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소련 지배 당시 처음으로 박해가 시작되고 주교까지도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행방이 묘연했다. 1985년에는 단지 한 명의 신부와 1,2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을 뿐이었으나 그래 도 1983년의 성인 영세자 수는 70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 이야기는 에스토니아의 그 당사 상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4살의 에스토니아인 알라얀 (Allan Allajan) 은레트의 리가 (Riga) 에 있는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국가에 허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1982년 신부가 되기 위해 보트를 타고 발트해를 지나 서방으로 도망을 감행했다. 도망 중 붙잡혀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고 레닌그라드의 악평이 난 정신 병원으로 실려갔다,17)

레트에는 1918년에 약 45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살고 있었고,리가와 리파자의 양교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의 지배로 활성화된 교회 활동이 무산되었고,1963년 이후 정세는 약간 완화되었으며,1985년 레트에는 약 25만 의 가톨릭 신자가 살고 있었다. 사제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그 이유는 사제직을 원하는 수의 결여에서가 아니라 국가에서 신학교에 갈 수 있는 허가를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1983년에는 40명의 지원자 중 단지 11명만이 허락되었다.

국가는 교회 활동을 다양한 방법으로 저지시켰다, 교회의 활동을 단지 교회 전례로 국한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힘든 상황에서도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침투되어 뿌리내리고, 소련에서의 일상적인 삶에 넌더리를 느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글로나(glona) 성모 순례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레트의 가톨릭 신앙의 중심인 이곳으로 해마다 많은 순례자의 무리가 떼지어 몰려든다. 1983년의 성모승천 대축일에는 직업을 잃어버릴 위기와 사회적 신분의 박탈 위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대축일 기념행사에 참석 했으며 그 수는 4만에 이르렀다고 하며, 레트 국가 가톨릭 신자 수 6분의 1에 해당한다.

레트 국가에서 지배적으로 차지하는 종교 단체는 루터 교회로 1985년 당시 거의 40만의 신자에 달했으나, 많은 신자 수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의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족했다. 국가는 성직자의 양성을 위한 허가를 제한했고 사제 양성 장소의 부족으로 교육은 통신으로 이루어졌다, 레트의 개신교 교회 건물의 4분의 3이 소멸되었고,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며 "낡은 건물의 수리"라는 핑계로 결국은 폐쇄 되었다. 소련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침례교파들은 레트에서 소수 인원을 차지하나 선교 활동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1983년 그들의 열성적인 구성원 중의 몇 몇 일원에게 소송이 열렸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허락되지 않은 선교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또 소련에서의 종교 박해에 대한 보도를 국외에 퍼뜨렸다는 이유로 5년 동안 감금되고 덧붙여 3년 동안 추방되는 판결이 내려졌다.18)

리투아니아에는 1918년 170만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었고,교회 활동은 활발했 다. 1939년에는 4개의 신학교와 일반대 가톨릭 신학부에 600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에스토니아와 레트에서처럼 소련에 병합됨에 따라 교회 박해가 시작되었고, 교회의 모든 주교와 대다수의 사제들,가톨릭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 되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추방되었다. 1939년과 1983년 사이 사제수는 1,500명에서 685명으로 줄어들었으며,사제들의 평균 연령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여기에서도 사제의 성소가 결핍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카우나스(Kaunas) 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신학교에만 허가를 제한하는 실정이며 수도 생활은 지하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공산권 치하에 들어가기 전에 수도 빌니우스(Vilnius)에는 20만 명의 주민들과 약 40여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1988년 현재 60만의 거주민에 교회는 단지 8개만이 열려 있을 뿐이다. 사제들과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종교와 신학에 관한 서적은 상당히 부족한 형편이었고 또 신자들이 종교 간행물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960년대 말경에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교회 억압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78년 '신자들의 권리를 변호하는 가톨릭회’가 5명의 사제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5명 중 2명의 사제는 그러한 행동을 이유로 수년 동안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고 추방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잇달아 발트 삼국에는 저항 세력이 생겨났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 세력을 지지하는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이 저항 세력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독립을 요구했다. 그런 가운데 정세의 완화로 수감된 자가 풀려 나오고 일부 몇몇 교회의 건물은 다시 반납되었다.20)

1988년 이래로 리투아니아에서는 교회 신문이 발간되었고, 신학 공부는 제한되지 않았고,22) 신학교가 생겼으며, 1989년부터 성탄절이 공휴일로 되었다.23) 1989년 리투아니아 의회는 새 교회법을 제정하였다. “리투아니아의 새 교회법에 따라 가톨릭 교회는 소련사회 내에서 '법률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교회는 모든 면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으며 완전히 자유롭고,국가의 간섭을 벗어나 자 유 의사로 외국과의 관계도 형성할 수 있다, 또한 교회 내의 문제도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24)

3. 폴란드

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는 백년만에 독자적인 국가로 재건되었다. 분할되어 있던 힘든 시기에 가톨릭 교회는 일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국가 건설 단계에서 가톨릭 교회는 사회 건설에 많은 기여를 했다. 교회는 국민들의 마음 깊이 뿌리 내렸고,1918년과 1939년 사이에 교구 소속 사제는 43%, 수도회 소속 사제가 62%로 증가하였다. 신앙 대회, 가톨릭 단체,열성적인 본당 사목,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가톨릭 신문,신학교와 일반대 가톨릭 신학부에서와 깊이 있는 신학 강의, 1918년에 창설된 루블린 (Lubim) 가톨릭 대학에서의 일반적인 교육 등은 신앙을 깊게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하였고 17일 후에 소련이 침공하여 곧바로 폴란드는 두 나라에 의해 완전히 나누어졌다. 폴란드 동부 지역은 소련이 점령하고, 공산권 통치 하의 교회는 잔혹한 박해를 당하였으며, 독일이 점령한 서부는 나치 정권에 의한 박해가 이루어져,교회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많은 수의 주교, 사제, 평신도들이 감옥과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고,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죽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폴란드 국가가 재건을 위해 힘쓸 때 잠시 동안 교회는 긴장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소련이 점령하여 공산 국가가 세워지고, 교회는 사회 생활에서 드러나지 못하도록 밀어젖혀지게 되었다. 1951년 공공연하게 교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교회에 속한 학교,병원, 아동 복지 시설은 국유화되었고,교회는 소유한 재산을 다 빼앗겼다. 비진스키 (Stefan Wyszynski) 주교와 다른 여러 주교들,수백 명의 사제들이 감옥에 끌려갔고, 수도원의 수는 약 40% 정도,수녀원의 수는 약 45% 정도 줄어들었다.25)

1956년에서야 비로소 고물카(Gomulka)가 이끄는 폴란드의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의 노선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긴장 완화 상태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른 주교와 함께 비진스키 주교도 석방되었으나 곧 사태는 다시 악화되었다. 악화된 상태에서 교회와 정부 사이에 마찰을 일으켰던 내용은 자선 사업에 대한 자유와의 무적인 무신론 교육의 반대,노동자와 농부의 지위에 관한 문제였다,26)

노동자의 파업과 노조 문제, 정부 내란의 위기에 처한 어려운 시점에서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년 동안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지고 거의 95% 에 이르는 가톨릭 인구가 있는 이 나라에 큰 영향력을 끼쳐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 폴란드는 최초로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일당 체제를 부수고, 교회는 좀더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27) 1989년 3월 폴란드 의회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새로운 법을 제정하였고, 1989년 7월 교황청과 폴란드 사이의 대외 관계가 회복되었다.

4. 체코슬로바키아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이 붕괴되고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들어섰으며, 인구의 4분의 3이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계층이 교회를 적대시하고,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했다. 교회 소속의 여러 학교가 국유화되었고,교회 축일이 없어졌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교회를 적대시하는 선전을 대대적으로 일삼았다. 교황청과정부사이의 수차례 걸쳐 이루어진 회합으로 서서히 교회에 관한 일정 기준법이 생겨났다,

1938ㅡ1939년에 히틀러 제국의 확장 정책으로 체코는 붕괴되었고 독일의 점령 지역에서 교회는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많은 수의 성직자가 투옥되고, 교회의 활동 사업은 위축되었다.

1945년 이후 체코는 재건되었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회 활동은 활발했다. 그러나 1948년 초에 공산 정권의 통치로 교회는 박해를 받았고 주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수감되기도 하였다. 국가에 의해 개입된 '평화의 사제단’으로 인해,성직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려 하였고 국가에서는 교회를 담당,지휘하는 부서를 두어 일괄적으로 교회를 감독하고 업무를 집행하였다.29)

1948년 법률 218조 7항에는 교회 공동체의 성직자들은 국가의 승인을 받고 국가에 서약한 자둘만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30) 국가는 주교를 임명하는 문제에도 개입하여 평화의 사제단 소속의 사제 중에서 주교가 되기를 희망하였고, 바티칸 교황청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주교 자리는 여러 해 동안 공석인 채로 있었다。1989년 12월, 13개의 주교 자리 중 7개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31) 고령의 토마세크(Frantisek Tomasek) 가 아직도 프라하의 대주교직을 맡고 있으며, 자유를 위한 노력은 국민들에 의해 환호를 받고 있다.

1980년 비인의 쾨니히 추기경이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밝힌 바에 의하면 체코의 사제들이 그들의 설교 중에 정부가 대중 매체를 통한 반종교적인 선전에 대해 반응을 보인다든지,교회 밖에서 신자들과 유대 관계를 맺는다든지,신자들이 성사를 볼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든지 혹은 노약자와 병자에게 자선 행위를 베푸는 따위의 일을 했을 때 그것은 불법이 되며,또한 학교 교사는 맑스와 레닌 사상 을 신봉하고 무신론자임을 확언한 후에야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32)

예수회 소속의 코렉 (Jan Korec) 주교는 1950년에 비밀리에 서품을 받았으나 계속적으로 정부에 의해 저지를 당하였고, 공장 노동자로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밝힌 바 있디·.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권력에 의해 신앙을 전파하고,보전하는 모든 외적 수단ㅡ신문,출판,도서, 단체,신학교, 모든 수도회 - 을 몰수당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성서와 교리서까지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모든 학교와 수백 가지의 신문, 잡지, 라디오 방송,텔레비전,모든 문화 행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반종교적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 손으로도 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서로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교회 자유에의 희망이 1968년 긴장이 완화된 분위기 ‘프라하의 봄’ 동안에 솟아났으나 곧 그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점령으로 자유의 도래는 힘들게 되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정치적,종교적으로 자유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강하게 증대되었다· 1988년 3월 25일 약 5만 명의 인파가 프레스부르그에서 손에 초를 들고 자유를 요구하였다.34) 같은 해에 7만 명의 사람들이 종교 자유를 위한 내용이 실린 목록에 서명을 했다.35)

공산권 정부가 해체되고,1990년 1월에는 모든 종교 단체의 활동은 정부 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1949년의 국가가 제정한 교회에 관한 법률 내용이 삭제되었다.36) 국가가 교회를 감독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평화의 사제단’이 해체되고 국가가 규정한 이념 교육이 폐지되었고,대학에서 전공 과목으로 다루던 ‘무신론'이 없어졌다.38) 1990년 2월에 종교 자유의 허용으로 인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체코의 주교 자리에 3명을 임명하였다.39) 체코슬로바키아의 ‘비밀 주교' 인 코렉에게 프레스부르그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교 관구에 소속한 신학교 의 책임이 주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학생 교육은 부분적으로 '평화의 사제단’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졌었다. 코렉 주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부 당국의 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라의 교회 쇄신을 위해 커다란 기여를 했다·40)

5. 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 이후 헝가리는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고, 1919년 공산 정권이 들어섰으며,난폭하고 무분별한 권력으로 교회는 파괴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33일 동안의 공포 정치 끝에 공산 정권은 붕괴되고 교회 활동은 활기를 띠었다. 1920년 헝가리에는 가톨릭 신자가 66.1%가 되었으며 21%의 칼빈파,5.9% 유대교,6.2% 루터파가 있었다. 국가와 교회 사이에 이루어졌던 원활한 관계는 헝가리가 나치 독일의 영향권 내에 놓이게 되었을 때,다른 국면으로 돌변하게 되었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교회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구해내는 역할을 하였다.

1945년 소련 군대가 뒤이어 들어오고 1949년 소련에 의해 민중을 위한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러자 교회는 모든 종류의 학교(3344),교회 단체,홍보 매체(신문, 출판)를 빼앗겼고, 수도회의 운영이 금지되었으며,추기경 민첸띠 (Jozsef Mmdszenty)와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주요 인물들은 조작된 죄로 형을 언도받았으며, 교회는 사회 생활에서 배제되었다.41)

1956년의 민중 봉기 때 교회의 지위가 호전될 것에 대한 희망을 가졌는데,며칠 후 그 꿈을 깨어졌다. 1964년 부다페스트에서 교황청의 대외 업무를 담당한 까사 롤리 (Agostino CasaroH)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주교 직위의 재임명과 헝가리의 모든 주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직회에 참석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내었는데,이 협정은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황청과 공산국가 간에 최초로 체결된 것이었으나,42) 이 체결된 협정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교회는 자유롭지 못했다.

1989년 10월에 공산 정부가 물러나고 헝가리 공화국이 들어섰으며,1990년 1월 24일 헝가리 의회는 찬성 304, 반대 1,기권 11명으로 대다수의 찬성에 의해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는 법률을 채택함으로써 공산 통치 40년의 종교 탄압 정 책을 종식시켰다.43)

6) 루마니아

세계 대전 후 많은 영토가 루마니아 왕국으로 편입되어 국가 영토는 배로 증가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였던 헝가리인들과 독일인들이 거의 다 동방 정교에 속하는 루마니아인들과 동일 국가로 되기 전에 루마니아는 단일 민족에 거의 똑같은 종교를 가진 국가였다. 국경선에 따른 새로운 법의 제정으로 국가와 교회 간에 여러 가지 분쟁이 일었으나 교회 활동은 그런 대로 활기를 띠었다.

1945년 루마니아는 강제에 의해 공산권 정부가 들어서고 1948년 왕정이 폐지되 고공산 정부가 세워졌다. 그해에 가톨릭 교회 소속의 학교가 폐쇄되었고,국가는 교회법에 반대되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1948년 12월 정부는 루마니아 통합 교회를 해산시켰고, 모든 주교들을 체포하였고 체포된 주교들은 장기간 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다음해 로마 가톨릭 주교들도 투옥되었다.45)

1965년 차우세스쿠는 공산당의 당서기장이 되었으며,1974년에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통일된 루마니아를 원했던 그는 루마니아 북부의 시벤뷔르겐에 사는 헝가리인, 독일인들을 농경지 개간의 구실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즉, 마을 전체를 철거하여 농경지를 만듦으로써 농부들이 잘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으로 수 천 년 동안 그 지역에 살았던 헝가리, 독일인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공산권 정부의 잘못된 경제 계획으로 이전에 유럽의 곡식 창고라 불렸던 아주 비옥한 땅인 루마니아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맞게 되었고 국민들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공산독재의 압력이 가중되었는데 차우세스쿠는 24년 동안에 약 5만 명 ㅡ 1주일에 평균 40명 - 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였다.47)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통합 교회는 여전히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미사도 비밀리에 거행되고 새로운 사제도 비밀로 신품을 받았다, 많은 사제는 감옥에 들어갔다.48)

차우세스쿠 독재의 몰락 이후 1990년 1월에 ‘임시 정부’가 들어서서 통합 교회를 승인하였고,41년만에야 그들은 지하 활동을 면할 수 있었다·49)

1989년 현재 루마니아국민의 88%가 동방 정교이며, 6%가 가톨릭, 5%가 개신교 신자이다.50)

7. 불가리아

수천 년 이어져 내려오는 불가리아의 역사적 토대 위에서 신앙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864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방 정교에 속하는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다· 불가리아는 1393년에서 1908년까지 터어키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과 동맹을 맺었으며 전쟁 후 영토를 양도해야 했다.

1926년 불가리아에는 84%의 동방 정교, 13%와 회교도, 1.83%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으며, 미소한 가톨릭 신자 수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나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10개의 학교, 6개의 고아원,2개의 병원을 가짐).

2차 세계 대전시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불가리아는 1944년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1948년 소련 공산 정권이 들어섰다, 1949년 법률로 교회의 자유를 제한하였고 곧 교회 박해의 움직임이 싹텄다.52) 동방 정교의 신자들에게도 공공 학교에 서의 종교 수업이 폐지되었고,자선 사업,교회 단체 모임이 저지되었으며,교회 재산의 많은 부분이 국가에 의해 압류당하였다. 그 후, 동방 정교의 지도자는 교회 활동의 완화를 위해 정부와 교회 사이에 선을 마련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로 인해 외적인 안전은 보장되는 듯했으나 무신론에 대한 선전은 여전히 지배적으로 남아 있었다.53)

개방 정책에 따라 소수의 회교도가 권리를 갖게 되었고,회교도의 권리 회복은 동방 정교와 회교도 사이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회교도인 터어키가 50년 동안 불가리아를 지배해 왔던 까닭이다.

8.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이 지배했던 지역과 세르비아 왕국으로부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된 왕국이 1918년에 생성되었고, 1929년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명칭을 가졌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여러 민족과 다양한 종교가 있었는데, 그중 45.8% 동방 정교,39.2% 가톨릭, 10·8%가 회교도 신자였다. 그 중 동방 정교회의 세르비아인들은 여러 면에서 국가의 우대를 받았는데, 1919년의 세르비아의 교육법에는 교회 학교를 허락하지 않았고,그 법은 전 지역에 적용되었으므로 그로 인해 가톨릭 교회는 교육 사업에 손해를 보게 되었다. 학생들은 반종교적인 국가 청년 단체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으며, 가톨릭 주교들의 반대는 교회에 대한 심한 탄압을 가중시켰다· 종교 단체의 합의에 의한 해결책 이 요구되었으나,동방 정교회는 합의 사항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정상 상태를 회복하고 교회의 활동은 활기를 띠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전쟁은 치열했다, 1941년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가진입하였고, 치열한 게릴라전이 벌어졌으며,이어 연합군이 들어왔다. 게릴라의 지도자인 티토(Tito)가 정부를 이양하고, 유고슬라비아는 공산권 정부가 들어섰다. 다른 공산 국가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으며 1946년까지 수도자의 15%에 해당되는 수가 처형당하고 50%가 투옥되었으며,스테피낵 (Alois Stepinac) 대주교도 감옥에 끌려갔다.

티토가 소련과의 긴밀한 결속에서 벗어나면서부터 교회의 탄압 분위기는 약간 완화되었다. 1971년 교황청과의 대외 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도래하지는 않았다.55) 1989년 10월에 동방 정교,가톨릭교,이슬람교,유대교의 대표자들이 벨그라드에서 만나 회합을 가졌고,종교 자유가 더 많이 보장되도록 요청했다.56)

9. 알바니아

1929년 알바니아에는 약 67.6%의 회교도,21.7%의 동방 정교 그리고 10.6%의 가톨릭 인구가 있었다.57) 이 작은 나라에 다양한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15세기부터 1913년까지 터어키의 지배 하에 있었던 알바니아는 1913년에 독자적인 영주국이 되었다. 1918년에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의해 점령되고, 1928년 왕국의 형태로 있다가 1939년에 이탈리아에 의해 합병되었다. 1944 년에 저항 운동이 게릴라전으로 나타났고,1944년 공산권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고58) 1960년대에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홀로 고립되었다.

1913년 알바니아가 독립된 이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기 전 가톨릭 교회는 가난한 이 나라에 자선 행위,교육 활동으로 유익한 사업을 하였으나,알바니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교회 박해가 시작되었다. 모든 가톨릭 주교들,사제들, 수도자들은 총살당하거나 투옥되었으며 뿔뿔이 흩어졌다.59) 동방 정교회 신자와 회교도들에게도 박해는 가해졌고 모든 성당,회교의 교당도 철폐되었다.

알바니아는 ‘세계 최초의 무신론 국가로 천명되기에 이르렀고,60) 1976년 헌법 37조에 "국가는 어떠한 종교도 인정하지 않으며,무신론의 선전을 지지할 것을 밝히고 있다.”61) 또한 헌법 49조 3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부모는 어린이들의 양육이 그들에게 의무적인 것처럼 공산주의 교육에도 마찬가지로 책임을 져야 한다"62)

알바니아의 교회 탄압에 관한 소식에 의하면 1972년 74세의 쿠리티 (Stefan Kurti) 신부가 감옥에서 같이 투옥된 어린이에게 영세를 주었다는 이유로 총살당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소식통에 의하면 1977년 그욘니 (Mark Gjom) 신부는 종교서적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12년 형을 받았고,동방 정교의 나이 많은 코네씨 ((Damien Konnessi) 대주교와 가톨릭의 피쉬타(Antomn Fishta) 주교도 1973년쯤에 옥사하였다.63) 그러나 최근에 교회 박해의 분위기가 약간 호전되는 듯한 움직임이 엿보인다·

오래된 교회와 회교 교당이 문화 국보로 복구되고, 외국에 거주하는 몇 명의 알 바니아인들에게 입국 여행이 허락되기도 하였다. 입국 여행의 허락으로 캘커타에 있는 마더 데레사는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가 뵐 수 있었으나⑷ 수도원의 설립은 거절당했다. 그후,몇 주 뒤에 국가 원수 겸 당의장인 알리아(Aim)는 무신론을 지지하는 헌법을 변경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65)

10. 독일

1차 세계 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였다. 연합국들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였고 독일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가 닥쳐 왔고 많은 실업자가 생겼다. 독일은 정치적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모든 여건이 히틀러가 정 권을 잡는 데 유리하게 해주었다.

바이마르 시대에 교회는 사회적인 모든 분야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침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17년부터, 후에 교황 비오 12세가 된 당시의 파챔리 주독(駐獨) 교황 대사는 독일 정부와 교황청과의 조약을 맺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 조약은 히틀러가 권좌에 앉은 수개월 후,새 정부의 요청에 의 하여 이루어졌다.66) 교황 비오 11세는 히틀러 정부의 청을 받아들여도 될지 오래 갈등을 가졌지만 그 조약을 거절하면 독일 신자들이 어려움과 고통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침내 조약을 맺었다.67)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독일 주교들은 이미 나치 사상의 위험성을 알았다. 1930,1931년 사목 교서에서 주교들은 나치와 그리스도교와는 일치할 수 없음을 명백히 설명했다. 테비오 11세는 1937년 3월 14일에 나치에 관하여69) 그리고 5일 후인 3월 19일에는 공산주의에 관하여 비판적인 회칙을 반포하였다.70) 두 회칙에서 그는 나치와 공산주의가 오류임을 설명하고 그리스도 신앙과 반대됨을 공적으로 알린 것이다.

그러나 그 회칙이나 브레스라우 교구장 베르트람(Bertram) 추기경의 정부에 대한 수차례의 진정서,또는 뮌스터 교구장 갈렌 (von Galen) 주교의 용감한 강론들도 히틀러의 길을 막을 수 없었다.71) 히틀러 정부는 백성들이 두려워서 갈렌 주교를 체포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성직자들은 마음대로 다루었다. 나치 시대에 많은 성직자들이 재판을 받았으며,많은 이들은 사형되거나 옥사하거나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독일 교구 사제 중 약 36%는 나치 정부와 큰 갈등을 가졌고72) 본회퍼 같은 개신교 목사들이나 수많은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도 같은 고통을 당하였다. 나치 정부는 자기들과 사상이 다른 이들, 종족이 다른 이들 특히 유대인 들을 박해하였고, 그 박해와 세계 전쟁을 통해 수천만 명이 죽음과 고통을 당했다.

히틀러가 ‘대독일’을 선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독일은 파괴되었다. 동부 독일은 폴란드와 소련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부분은 4개의 점령지대로 쪼개졌다. 1947년에 미국과 영국의 점령 지대는 경제적으로 합쳤고 1949년에는 프랑스 점령 지대도 그들과 합쳤다. 그러나 소련 점령 지대는 그동안 소련 공산주의의 사회가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1949년에 독일은 두 나라로 분리되기 시작했고 베를린도 비슷한 경위를 거쳤다.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 교회는 각 연방국에 따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게 나타났다, 전체적으로는 약 43%가 가톨릭 신자이며 42%는 개신교 신자의 분포이다.73) 동독에서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서처럼 직접적인 종교 박해는 없었고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수도원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무신론적 사회주의 질서 안에 살고 있으며 유물론적인 세계관이 전체 사회 생활을 결정한다" 74)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는 사람은 교육받는 기회와 직장에서 승진하는 데 장애가 많다. 동독에는 오늘날 약 42%가 개신교 신자이며 6%는 가롤릭 신자이다.75) 가톨릭은 숫자에 있어서 별로 변동이 없는 반면에 개신교 신자 수는 아주 많이 줄었다. 가끔 부모들은 자녀들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세례 주기 를 꺼린다·76) 반면에 진리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는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다른 삶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유를 체험하는 장소였다。특히 '개방’ 전 몇 주의 위기 동안에 많은 이들이 철야 기도회를 갖기 위해 교회와 성당에 모였다. 여기서 그들은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 비폭력으로 투쟁할 용기를 얻었다.

이상에서 독일을 포함한 11개국 동유럽 교회의 역사와 현황을 개괄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1919년 소련의 공산 혁명으로 야기된 동유럽 교회의 수난 여정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는 선교 활동과 신앙의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사회주의의 틀을 벗고 자유와 민주화의 역사적 새 전환점에 이르는 밑바탕을 이루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놀랍게 이루어진 이 '개방’이 동유럽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새로운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도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은 사건이기에, 이제 갓 이루어 놓은 해방과 자유의 물결이 올바르게 정착되도록 동서방 교회의 전폭적인 유대와 협력의 새 차원이 요청되고 있다.

1) Georg Siegmund, in L'Osservatore Romano, deutschsprachige Ausgabe, 23.1. 1981, S.9.

Paul Roth, Perestroika auch Fur die Christen in der Sowjetunion?, iii Arbeitshilfen,

Herausgeber: Sekretariat der Deutschen Bischoiskㅇnferenz, Bonn 1988, S. 19-20.

3) Gerd Strieker, Ziir Lage der Russischen Orthodoxen Kirche 1988, in Arbeitshilfen, S.36-37.

4) Gabriel Adrianyi, Die Kirche in den einzelnen Landem, in Handbuch der Kirchengescliichte Band I, Freiburg 1985, S.516.

5) Franz Konig, Ein Menschenrecht auf dem Papier. Religionsfreiheit im Alltag kommuni -stischer Staaten, in L'Osservatore Romano, 19.12.1980,S.6.

6) Franz Komg, 상게서.

7) Kirchenbote, Wochenzeitung filr das Bistum Osnabriick, 10.12.1989, S.3.

8) Deutsche Tagespost, 17.10. 1989, S.4.

9) Anna ?Halja Horbatsch, Die Ukrainischen Christen im Jakr des Millenniums, in Arbeitshil-fen, S.25?26.

10) Nur ein Blatt Papier. Lemberg 1946: ein "gropes und heiliges Ereignis"?oder ein Verbrechen? in Ukrainischer Pressedienst, 3 / 86,Herausgeber: Metropolie Lemberg, derzeitiger Sitz in Rom, hier in Der Fels, 7/8/1986, S.219?220.

11) 상게서,S.218.

12) 상게서,S.221.

13) Anna?Halja Horbatsch,. Die Ukrainischen Christen im Jahr des Millenniums, S.27.

14) L'Osservatore Romano, 15.12.1989,S.4

15) Zentralstelle Weltkirche der Deutschen Bischofskoniereriz, Zur Lage der Kirche in den baltischen Sowjetrepubliken, in Arbeitshilfen, Bonn 1985,S.16?17.

16) Stimme der Martyrer, Oktober 1989, S.3.

17) Arbeitshilfen 1985, S.23

18) 상게서, S.20-22.

19) 상게서, S.17-20.

20) Alfonsas Svarinskas, Interview am 3.11. 1988, m Pressedienst des Litauischen Iniormations-dienstes ELTA 1/1989,hier in Der Fels 3/1989, S.88.

21) Radio Vatikan, m Der Fels 3/89, S.90.

22) Ansgar Koschel, in Kirchenbote, 5.11.1989,S.23.

23) Deutsche Tagespost, 28.10.1989, S.4.

24) Schweizerisches Katholisches Sonntagsblatt, 21.12.1989,S.23.

25) Gabriel Adrianjd, aaO. S.518?521.

26) LOsservatore Romano, 3.61981, S3.

27) LOsservatore Romano, 12.1.1990, S.7.

28) 상게서.

29) Gabriel Adrianyi, a.a.O. S.522?525.

30) LOsservatore Romano, 19.12.1980, S.6.

31) L'Osservatore Romano, 22.12.1989, S.4.

32) L'Osservatore Romano, 19.12.1980, S.6.

33) Jan Chrisostomus Korec SJ, in Pro Fratribus 1 /1987, hier in Der Fels 6 / 1989,S.181.

34) Kirchenzeitung fiir das Bistum Augsburg 2. / 3.12. 1989, S.l.

35) Kirche + Leben, Bistumszeitung Miinster, 10.12.1989, S.4

36) LOsservatore Romano, 26.1.1990, S.4.

37) Bonifatiusbote, Kirchenzeitung ftir das Bistum Fulda, 24.12.1989, S.7.

38) LOsservatore Romano, 26.1.1990, S.4.

39) LOsservatore Romano, 19.1.1990, S.4.

40) LOsservatore Romano, 26.1.1990, S.4.

41) Gabriel Adrianyi, aaO. S.526 ~ 529.

42) LOsservatore Romano, 24.11.1989, S.6.

43) Korea Herald, 26.1.1990, S.l.

44) Gabriel Adrianyi, aa.O. S.531.

45) Bonifatiusbote, 7.1.1990, s.22.

46) Emerich Andras, Wird Siebenbtirgen der Idee des gro/5rurrxanischen Reiches geopfert? in Gexst und Leben 2/1989, S143ㅡ145.

47) Korea Herald,16.1. 1990,S.4.

48) Werenfried van Straaten OP, Interview, in Bonifatiusbote, 21.1.1990, S.3.

49) L'Osservatore Romano, 19.1.1990, S.4

50) Herders Neues Handlexikon, Freiburg 1987, S.825 auch sonst benutzt.

51) 상게서? S.125.

52) Gabriel Adrianyi, aa.O. S.535?536. ,·

53) Bernhard Stasiewski, Die nichtunierten Ostkirchen, in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Band I, S.483ㅡ484

54) Korea Herald, 16.1.1990, S.5.

55) Gabriel Adrianyi, aa.O. S.532?535.

56) Deutsche Tagespost, 26.10.1989, S.4.

57) Gabriel Adrianyi, a.a.O. S.536.

58) Herders Neues Handlexikon, S.13.

59) Gabriel Adrianyi, aa.O. S.536.

60) Janice Broun, Zur Situation in Albanien, dem ersten atheistischen Staat der Welt', in Albanian Catholic Bulletin 1/2/1984,hier in Der Fels 3/1986, S.82.

61) Der Fels 3/1986, S.82.

62) 상게서.

63) Janice Broun, aaO. S.82?83.

64) Deutsche Tagespost, 2.11.1989, S.5.

65) 상게서.

66) Ludwig Volk SJ, Die Kirche in den deutschsprachigen Landern, in Handbuch der Kirchengeschichte Band Μ , S.539, 546.

67) Pius XI, Mit brennender Sorge, Sammlung papstlicher Dokumente, Aachen 1976,Abschnitt 170.

68) Konrad Repgen, Kommission fiir Zeitgeschichte, in Arbeitshilfen, Bonn 1983, S.ll.

69) Pius XI, Mit brennender Sorge.

70) Pius XI,Divini Redemptoris, Romisch?katholische Schriften Nr.62, Wien.

71) Ludwig Volk, aaO. S.549-550.

72) Ulrich Wagner, in L'Osservatore Romano, 10.8.1984, S.ll.

73) Schlembach, Anton, Kirche in einem geteilten Land, Vortrag in Seoul 10.1989, S.9.

74) Aufderbeck, Hugo, in L'Osservatore Romano, 48/1947,S.Z

75) Schlembach, Anton, a.aO. S.5?6.

76) Georg Waif, Vortrag: Katholiken in der DDR-Probleme und Chancen einer Diasporaㅡ Kirche, in Kirchenzeiturig flir das Bistum Eichstatt; hier in L'Osservatore Romano, 19.51978, S.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