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제 2권 제 2편 제 1부 교회의 최고 권위
1990년 1월호 (제 132호)
제2절 주교 대의원회의 1.주교 대의원회의의 개념 제3조 : 주교 대의원회의는 교황의 권위에 직접 예속...

주일의 말씀
1990년 1월호 (제 132호)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 : 1월 1일장인산(청주교구 교현동천주교회 신부) 1. 교부들의 가르침 : ...

사회 회칙 '사회적 관심'에 대한 새로운 주목
1990년 1월호 (제 132호)
I. 서문 교황 바오로 6세의 사회 회칙「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이 발표된 지 어느덧...

교회의 사회적 개입의 근거와 임무
1990년 1월호 (제 132호)
I. 교회의 사회적 개입의 근거 교회와 사회 생활을 분리시키려 하는 이데올로기가 만연되어 있는 현대 세...

국가에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통로가 원활하다고 보십니까?
1990년 1월호 (제 132호)
우리의 여러 가지 생각을 모으려 한다. 여기서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을 통하여 자기...

나의 고백
1990년 1월호 (제 132호)
구천우 신부님은 1898년 12월 15일 황해도 장연 태생으로,1926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합덕을 첫 임지로 사...

그대는 로마 시민인가
1990년 1월호 (제 132호)
사도행전 22장 17절을 보면 바오로가 자신이 개종을 하게 된 경위와 사도가 된 경위를 말하고 있다. 상세한...

교회의 민주화
1990년 1월호 (제 132호)
대담자 : 이길웅 (서울대교구 자양동천주교회 사무장) 사회자: 서혜선 (「사목」편집부원) 일 시 : 1989년...

신학교와 더불어
1990년 1월호 (제 132호)
대담자 : 정태섭(가톨릭 대학 수위) 사회자 : 최 철(「사목」편집장) 일   시 : 1989년 11월 3...

교회 쇄신을 위한 근원적 성찰 - 교회 내의 민주화를 지향하며
1990년 1월호 (제 132호)
머리말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너희는 모두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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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민주화의 정체 1990년 1월호 (제 132호)

교회 쇄신을 위한 근원적 성찰 - 교회 내의 민주화를 지향하며

함세웅 (가톨릭대학 교수·신부·교부학)

머리말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데 23,8ㅡ12)

이것은 위선자의 대명사가 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은 예수의 분명한 말씀이다. 많은 이들,특히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시키면서 깊이 반성하고 부끄러워한다. 교회 안에는 형제성과 봉사 보다는 오히려 권위와 위계가 더 크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의 말씀은 물론 폭 넓게 보편적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웬일인지 마태오 복음의 23장이 대목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모두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그렇게도 꾸짖고 책망하고 야단쳤었건만, 우리는 스승, 아버지[神父],지도자 등의 칭호를 즐겨 사용할 뿐 아니라 그 칭호들이 교회 구조의 핵심적 요소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청개구리인가? 어쩌면 예수께서 그렇게도 엄하게 꾸짖고 금하신 그 칭호만을 골라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 칭호뿐이겠는가? 어찌 보면 교회는 인간으로 구성되었기에 허물투성이일 수 있다.

변천하는 세계에서 교회가 올바른 자기 위상을 정립한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시대적 요청으로 제기되는 교회 내의 민주화 문제도 결국 말씀 안에서 그 정답을 찾아야 한다. 말씀의 핵심인 회개와 형제성의 확인(공동체) 그리고 이웃에 대한 겸허한 마음의 봉사,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일진대 교회의 민주화란 결국 교회가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이에 예범적인 문제를 제기해 본다.

I. 현실적 반성

문제 제기 1 :교회법이란?

1960년대 중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지향한 쇄신의 원칙을 따라 교회가 나름대로 크게 변모할 당시 신학생이었던 우리는 다소 어리둥절할 때가 많았었다. 당시 서울 대신학교에서는 '교회법’이 필수 과목 중에서 첫째 둘째여서 '성서’ 시간보다도 많은 주 4시간이 할당되어 있었다. 성서와 거의 동등한 대접을 받던 '교회법’ 강의가 막상 로마에서는 주2시간이었고,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동방 신학교수한분이 어느날 강의 도중 교회법전을 책상에 내려치면서 “이 교회법이 교회를 망친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강조한 사실이었다. 예수의 법은 사랑의 법인데,교회법은 예수가 질타한 제도에 얽매인 것으로 결국 분열과 경쟁만 가져온 것이라고 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상대적이란 의미를 실감했다.

또 성전(聖傳) 하면,글로 쓰여지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믿고 들어왔던 우리가, 여러 전승(traditiones) 특히 동방 교회의 전승, 서방 교회의 전승이란 설명을 들으면서 더욱 의아하게 되었고,심지어는 동방 교회의 영성이 더욱 깊다는 설명에 이르러서는 자못 혼동을 겪기도 했었다.

문제 제기 2 :바티칸이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70년 이탈리아의 독립 운동에 의해,바티칸이 이탈리아에 항복하여 미완성으로 끝난 교회사 측면에서는 대단히 마음 아픈 사건이다. 바티칸과 교황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특히 스위스 근위병들은 격전 끝에 목숨까지 잃었다. 그런데 '교회사’ 교수는 바티칸이 속권을 빼앗기고 그 재산, 토지 등을 이탈리아 정부에 반환했기에 교회는 오히려 더욱 영적으로 부유해질 수 있었다며 이것이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느님의 섭리! 물론 모든 것이 섭리일테지만 그렇다면 교황청의 사수와 교황의 안전을 위하여 끝까지 총을 겨누다가 죽어간 스위스 근위병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당시 교회가 망했다고 비탄해 하던 교회의 충실한 사람들의 바람은 거짓된 것이었던가. 분명한 역사 의식을 가진 교수는 어쨌든 교회의 상대적 의미를 학생들에게 분명히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문제 제기 3 :사제들의 참된 증언이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 운동에 힘입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출애굽의 해방 의미를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깨닫고 자유와 해방을 통한 영성과 구원을 터득했다. 그리고 억압과 구조적 불의에 맞서 싸운 젊은이들의 행동 실천에서 해방 신학의 원리를 종합해 냈다. 출애굽의 뜨거운 체험이 지금, 이곳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때맞추어 1970년대 박정희 유신 독재 상황에서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목사,사제, 교수, 변호사, 학생,정치인,노동자,농민 등 숱한 무죄한 시민들이 옥고를 치르며 고생을 했다. 때문에 사제들은 믿음의 이름으로 이에 저항하며 나름대로 예수의 교훈을 따라 억울한 이웃들의 벗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쇄신 행동에 익숙하지 못한 나이 든 분들과, 교구장직을 맡은 몇몇 책임 주교들은 정부, 여당의 궤변과 뜻을 같이하여 사제들의 정치 참여는 불가하다는 묘한 표현으로 사건의 진상과 사제들의 진의를 흐려놓곤 했다. 사제들의 정치 관여는 분명 거부감을 주는 행위이다. 그런데 억울한 이를 위하여 불의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정치 관여인지 우리는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 교회는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 정치 체제가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잘못된 정치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주교가,왜 우익 독재에 관하여서는 침묵하고 있는지 젊은이들은 의아해 하고 있다.


문제 제기 4 :교황 대사란?

지난해 9월 성체대회 직전에 중앙일보에 주한 교황 대사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인터뷰 내용은 위험 수위를 넘어 문규현 신부,임수경 양의 방북 문제와 관련된 사목적 대담이라기보다는 정부 여당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다분히 정치적 발언이었고.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은 한국인의 민주화요구를 유년기에 비유했고 아직 민주주의를 이룩할 정도로 성숙한 국민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교황 대사는 누구인가? 그는 바티칸의 외교관이다. 외교관은 그 특성상 주재국의 국민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 더구나 교황 대사는 외교관에 앞선 사목자이기에 여기에는 사목적 의무가 하나 더 부과되어 있다. 우리는 초세기, 중세기에 동방,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었던 교황 대사들의 부족한 인격과 편견 때문에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아픈 상처를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현 주한 교황 대사에 대한 발언을 꾸짖는 항의가 교수들의 이름으로, 또 몇몇 사제들의 이름으로 언급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교황 대사의 발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황 대사의 신원 문제다. 불의한 정치 체제를 비판하는 사제들을 툭하면 정치 행위라고 비난하는데,사제들의 발언은 분명 예언자적 발언이다. 그러나 교황 대사는 그 직분상 정치적 신원이다. 국가 정부를 상대로 신임장을 제정하고 외교관의 신분을 갖고 있다. 교황 대사는 꼭 주교여야 하는가? 사제가 부족 한 현실에 그들 모두 사목 현장의 일꾼이었으면 좋겠다. 예수께서는 교황 대사 제도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젊은이들이 계속 물음을 던지고 있다.

문제 제기 5 :교회내의 민주화와주교의 임기제는?

흔한 표현으로 평신도들은 본당 사제를 비판하고, 사제들은 교구장을 비판한다고 한다. 또 교구장을 비판하는 사제일수록 본당에서는 더욱더 독선적이라는 악평도 가끔 듣게 된다. 본당 교우들의 경우 사제들이 너무 권위적이다,무례하다. 사람을 편애한다. 기도 생활이 부족하다는 등등으로 사제에 관한 의견이 압축된다. 사실 본당도 교회의 기초적 단위로 공동체이기에 조직,관리, 기관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친교 모임,잔치 등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의 증가와 본당의 비대화로 어쩔 수 없이 비인간화된 조직으로 퇴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제들은 본당의 운영 관리인보다는 참으로 봉사하는 목자여야 하는데 이 틀을 과연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겠는가. 사제는 물론이지만 본당의 교우들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 운영 관리인으로 비쳐진 사제를 사목자의 자리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사제들의 경우는 교구장 주교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교구 구조상 사제들이 공동 의견을 집약하여 제안할 수 없다. 우선 본당의 사목 때문에 본당에 얽매이게 되어 있지 지역 공동체라든지,교구 공동체를 생각할 수가 없다. 따라 서 교구란 허울좋은 이름일 뿐 사실상의 교회 공동체의 기초적 기본단위는 본당이다. 따라서 교구라는 공동체 개념은 구체적인 경우 관념에 불과한 현실이다. 신학적으로는 교구가 교회 공동체의 기본 단위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란 뜻이다.

1960년대의 교의 신학 교수 한 분은 주교직을 언급하면서 교구장은 꼭 임기제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구장의 임기제,60년대에는 감히 상상할 수 도 없었던 내용인데 그 교수는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1984년 천주교 200주년 사목회의 때에 교구장 임기제가 언급되었건만 이 문제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하고 파묻혔다. 세계의 정치,문화가 변하고 있는 지금,교구도 수도원의 모범을 따라 교구장 임기제를 통한 교회 특유의 민주적 공동체를 이룩해야 하리라.

이러한 문제 제기는 사람의 수만큼, 또 시대와 환경에 따라 몇 배로 증가할 것이다. 숱한 변화와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교회는 엄존하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는 철저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역사적 실재로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의 연장인 교회의 양면성, 초월적-자연적, 불변 적-가변적, 은총-제도, 신적-인간적,거룩한 교회-죄녀인 교회의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에 대한 충실을 다짐하면서,죄인들로 구성 된 교회이기에 죄인들의 회개와 개선을 통해 교회가 더욱 새로워지고 거룩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민주화는 시대적 요청이며 성숙한 사회에로의 발돋움이다. 1974년 지 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 이후 국민을 억압한 복잡한 유신 체제를 철폐하기 위해 정의 구현 사제단이 결성되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뜻밖의 모임이었다. 사제단의 활동은 교회 안팎에 나름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교회 쇄신에도 한몫을 담당한 새로운 운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주교들은 사제단의 구성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는 것이다. 특히 어느 주교는 지금은 사회 정치적 불의를 언급하겠지만 사회의 안녕과 질서가 잡힐 때 사제단의 이 운동은 꼭 교회 내에 자리잡아,교회의 쇄신 운동, 교회 내의 정화 운동으로 뿌리를 내릴 것이기에 지금 부터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나,그동안 지난 16년 간 주교회의에서 정의 구현 사제단에 대하여 취한 개별 주교들의 입장을 나름대로 종합해 본다면 상당한 근거가 있는 설이라 사료된다. 사제단의 활동의 영역이 결국 교회의 쇄신, 교회 내의 문제로 초점이 맞추어질 것을 염려하여 제동을 걸었던 그 주교는 일면 미래를 예견한 통찰력이 있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결국 자신의 능력을 악용한 시대 착오적인 발상,형제애를 거부한 독선과 아집으로 교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아니,퇴행시킨 큰 우를 범한 것이다.


해답을 찾아서

*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첫 선포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로 압축된다. 그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중요한 메시지도 바로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였다.

따라서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는 구약성서의 압축적 교훈이라 할 수 있고 신약에서 제시된 어떤 길잡이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 2000년의 과정 속에서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가 고백될 때마다 강조된 내용이었고 교회 자신의 척도요 가르침이기도 했다. 물론 상황에 따라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를 교회라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할 때도 있었지만,회개와 하느님의 나라란 주제는 교회를 쇄신하고 진전시키는 동인(動因)이며 핵심적 요소인 것이다.

회개란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근원적인 변화 말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근원적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회개란 초월적,영원한,하느님 은총의 작업이다. 회개란 신자 개개인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꼭 요청되는 요소이다. 회개의 이러한 항구적, 초월적 의미 때문에 우리는 “교회는 늘 새로워져야 한다. 교회는 새 꼴을 갖추고 늘 쇄신되어야 한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추종자들인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 특성상 초월적인 것,영원한 것에로의 진전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안주 하거나,타성에 빠져 있거나 부동(不動)을 고집한다면 그는 예수께서 질타하신 회개를 거부한 불신의 부류에 속하리라. 따라서 교회를 회개의 측면에서 고찰한다면,교회는 곧 회개의 반복,회개의 연속이라 설명하게 된다. 이미 회개의 지향이 언급되었지만,회개란필연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미래 지향적이며 무한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회개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완전, 무한,영원한 가치들이다. 영성 신학에서 말하는 완덕(完德)이란 하느님 나라를 향한 끊임없는 회개의 결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무한한 이상(理想), 하느님의 초월적 이상을추구하며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의 한계가 있기에 고뇌와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힘은 젊은이들 안에 더욱더 뜨겁게 솟구치고 있다. 교회의 진전, 문명의 발달,세계사의 변혁은 다 이러한 뜻 있는 이들의 고뇌와 싸움의 결실인 것이다. 20세기의 교회는 겸허하게 이런 사실들도 인정하면서 과거에 교회의 이름으로 저질렀던 잘못들을 고백하고 하느님과 역사 앞에 솔직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 솔직해야 할 교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철학적 무신론자인 이반을 통해 수사(修土)인 동생 알로이시오에게 교회의 많은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를 비롯한 로마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교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그중 우리를 부끄럽게 한 고발은 중세 스페인에서 있었던 종교 재판 내용이다. 종교 재판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많은 내용과 역사적 배경을 교회는 나름대로 지니고 있겠지만 어쨌든 역사적으로 평가된 종교 재판은 폐쇄적 신앙,곧 광신(狂信)의 표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종교 재판을 함께 비웃어야 할 가톨릭인들은 그런 재판으로 희생된 숱한 억울한 형제들을 함께 기억하며 그와 같은 일이 이 현실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굳게 다짐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종교 재판을 통해 교회의 현주소를, 교회의 기원(起源)을 되묻고 있다. 16세기 스페인의 세빌리아를 찾아온 예수는 자기 특유의 품성과 미소로 백성들의 벗이 되고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며,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면서 작은 기적을 베푼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를 따르고 환호하며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90여 세의 종교 재판장 추기경은 예수를 붙잡아 투옥시킨다. 그리고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가. “예수님,당신이 지금 이렇게 오셔서 활동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당신은 교회에 모든 것을 위임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이제는 당신 없이도 교황,추기경,주교, 사제 등 교계 제도를 통하여 교회가 잘 움직여지고 있는데 당신이 불쑥 나타나시면 방해가 됩니다……자,제발 빨리 사라지십시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십시요.” 대충 이런 내용으로 엮어진 이야기 끝에 예수의 대답을 재촉하는 추기경에게 예수는 뚜벅 뚜벅 앞으로 가 그의 입에 입을 맞출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추기경은 일종의 전율을 느꼈다. 침묵의 예수, 침묵의 키스,이것은 분명 수수께끼이며 신비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수의 이 입맞춤을 하나의 신비라고 표현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발적 문학은 교회가 과연 예수의 가르침과 복음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반성의 자료가 된다.

II. 교회의 기본적 요소

교회의 본질과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신학자들은 오늘도 고뇌하고 있다. 교회는 근원적으로 예수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 자체로 역동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물음은 곧 예수께 관한 물음이 된다. 사실 교회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며,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예수의 사람이기에 교회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예수께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하여야 한다.


1. 예수 고백과 증거

그리스도교의 근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증거이다. 예수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구분하는 척도이며 근거이다. 구약의 유일신 사상, 선민, 구원, 약속,메시아 사상 및 각종 경신례와 율법 준수를 통해 유다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예수는 구약의 완성자로 거기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선포하고 구원의 보편 시대를 실현한 것이다. 새로운 삶의 양식은 필연적으로 구질서에 마찰을 가져왔고 이와 관련된 많은 이유 때문에 결국 예수는 종교적 이유와 정치적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 이것은 모순과 불의,부조리한 현실의 사회 구조와 상황을 압축한 사건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난 자리(강생의 신비)이며,구약과 신약의 갈림길(약속된 메시아), 유다 민족에 이방인을 접목시킨 구원자(보편 사상)로서 그 존재상 신인 양성(神ㅅ兩性), 특수와 보편,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하여 우주 역사를 집약한 초월적 존재이다. 예수는 불의한 사회 구조, 종교,정치 질서에 의해 거짓된 고발과 조작된 죄목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모순된 현실의 상황에서 세기를 두고 제기된 무수한 사람들의 끊임 없는 왜?라는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적 대답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이었다. 죽음이 현실 모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예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생명, 영원,부활의 첫 신호였다. 죽음은 초월직 삶을 향한 비약의 발판임을 모두가 깨닫게 된 것이다. 곧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유 다인들의 틀에 박힌 신관,인간관, 구원관을 깨고 그 영역을 무한히 확산시킨 것이다. 예수는 개체와 특수라는 제한된 의미를 자신의 죽음을 통해 보편화한 존재이다. 때문에 예수를 수락함은 곧 하느님을 수락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구원의 보편 역사,전인류에 대한 수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2000년 전 당시 유다 문화권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예수의 수락 여부로 판가름났던 것이다. 그것은 사도신경의 형성 과정과 신약 여러 곳에 언급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분명한 사실로 입증된다. 사도 필립보가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가르치며 세례를 줄 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내가 믿는다”(사도 8,3기라는 고백 내용이 바로 그 구체적 예이다. 율법의 전수자인 유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수락 여부일 뿐,그 외의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는 분명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것은 세기를 두고 고백될 그리스도인들의 필수적 공개 선언이다. 죽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 선포는 바로 그를 죽인 불의한 무리에 대한 분명한 고발이며 거부의 몸짓인 것이다. 고백은 늘 증거를 전제한다. 예수께 대한 고백은 따라서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예수께 대한 고백은 그의 초대에 대한 확실한 응답이며, 그의 언행에 대한 충실한 추종과 실천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또한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이기에 그는 우리 중의 하나 아니,우리 개개인과 동일시되며, 특히 가난한 이웃, 약한 이웃,억울한 이웃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예수는 이제 인간의 총체이며 인간의 대명사이다. 따라서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은 인간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며 나아가 우리의 삶 자체 그리고 현실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성실히 살려는 노력이며 다짐인 것이다.

이 고백은 참으로 전인적 고백이며 자신의 전존재를 건 결단이다. 사도신경이 이를 말해준다. 사도신경은 목숨을 건 순교자들의 피로 쓰여진 고백 문서이며 예수에 대하여 침묵하기만 했다면,우상 앞에 끌려가 절 한 번 하거나 향불을 피 우기만 했다면 살아날 수 있었을텐데,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예수를 고백한 것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께 대한 고백은 참으로 두려운 행위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선언해야 할 절대적 명제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릅쓴 결단,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죽음 앞에서도 예수를 고백하는 사람이다. 이 고백은 인간에게 참된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 준다. 그것이 사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존재 근거이며 목적이다.


2.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

교회의 기본적 개념은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원초적 모형은 하느님 자신이며,역사적으로는 유다의 선택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예수의 강생을 통하여 공동체의 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신인(神人)의 합일(合一)인 예수가 공동체의 이상이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저서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삶 곧 만남, 친교,모임,그 자체가 교회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삶이 풍요롭고 심오한 것과 같이 교회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상징적 표현들을 통해 교회의 신비를 터득하며 그 안에서 예수를 체험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헌장 2장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란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교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고 있다. 하느님 백성이란 관점에서 이해된 교회는 역사 선상에서 통합 된 견해로 역동적이며 포괄적 의미를 지닌다. 물론 구약에 언급된 하느님의 백성은 유다 선민에 국한한 제한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나,메시아 구원 사상에 펼쳐진 보편 사상이라든지 또는 예수를 통해 신약에서 완성된 구원의 결정적 보편 사상을 종합한다면, 하느님 백성이라는 표현, 그 자체로 보편을 지향하는 포괄적 의미를 지닌 성서 특유의 표현인 것이다.

학자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에 제시 된 교회론의 도식을 언급하면서,교황,주교 등 교계 제도를 정점으로 하여 펼친 전근세적 교회관을 수정 보완하여, 교계 제도보다 앞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선언했다는 데에 경의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즉 교황, 주교 등도 바로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강조된 점이다. 이것이 형제성, 평등성과 함께 미래 교회상을 설정함에 있어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이다. 이와 관련 하여 언급해야 할 것은 구원의 개방성이다.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Nulla salus, extra Ecclesiam )라는 도식적 격언에도 불구하고, 교회란 개념을 아주 크게 이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구원의 가능성도 넓어진 것이다. 교회 헌장은 가톨릭 신자는 물론 갈라진 형제들에게,그리고 유일신 및 고등 종교의 신봉자들에게도 구원의 보장을 과감히 선언하고, 비록 하느님을 모르지만 선의의 양심인들과 박애 사상의 실천가들,참된 사람 모두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개방적 구원관은 교회의 겸허한 고백이며 하느님의 전능성과 은총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서 연유된 아름다운 결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 등 성서에 기초한 이 가르침은 교회에 깊은 뿌리를 내린 전통적인 것으로 교회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란관점에서 이해된 교회는 역사적,역동적인 교회로서, 인간적 측면이 강조된 반면,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설명된 교회는 역사와 현실, 시공을 초월한 교회의 신성(神性),초월성,은총이 강조된 것이다. 신비체와 하느님 백성의 의미를 상호 연관지어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교회 본래의 풍요로움과 그 영성적 깊이를 조화있게 접하게 될 것이다. 신비체의 가르침은 인체의 유기적 관계 논리에 그 근거를 갖는다. 머리와 몸, 또 몸 안에 여러 지체와 기관이 있지만 이것은 모두 불가분의 관계여서 분리될 수 없고 필연적으로 하나이듯,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나누일 수 없는 한 몸을 이룬다는 고백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비체란 단순히 교회에 대한 인식의 방법이나 설명이 아닌, 예수의 강생,그 신비를 역사적 실재에서 체험하고 인간의 삶 한가운데에서 재현시키는 구원의 행위인 것이다. 인간 공동체 안에 새 톱게 강생된 그리스도,바로 여기에 교회의 신비와 존재 의미가 있다. 때문에 교회에 대한 고백은 이웃을 향한 개방심과 구체적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3. 하느님 백성의 봉사자로서의 교계 제도

교회의 기본 요소를 흔히 회개( Metanoia ),공동체( Koinonia ),봉사( Diakonia) 라 꼽는다. 이 중, 봉사는 예수의 소명과 직결된 것으로 예수의 삶을 특징짓는 구원적 행위이며,예수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는 여러 기회에 병자를 치유하면서,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당신이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공언하심으로써 섬김,곧 봉사가 당신의 첫째 소명임을 확인해 주었다. 교회란 그리스도 삶의 연장이며 계승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봉사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소명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권력과 명예에 집착한 제자들에게 소명의 본 목적이 바로 봉사임을 늘 강조했다. 겸손과 양보를 강조하고 특히 사랑의 계명과 함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스승의 표양은,결코 전례 때의 형식적 행위를 통한 기억으로만 그 본뜻이 살아나지 않는다. 제자들,믿는 이들,교회 공동체는 봉사에 기초한 존재들이어야 한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되었음에도,제자요 추종자인 교계 종사자들은 스승의 길,봉사의 길을 걷기보다는 흔히 군림하는 길을 걷고 있다. 따라서 지난날의 미흡했던 점을 부끄럽게 고백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봉사자로서의 교계적 임무를 분명히 깨닫고 재삼 강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의 교회는 너무 법적인 면에 치중하여 교계 중심의 외적 인간적 제도적 틀에 순응하는 신자 교육을 강조해 왔다. 교회도 늘 스승의 입장을 강조했을 뿐,봉사란 사명은 뒷전에 밀리고 있었다.

봉사란 인간의 소명을 특징지을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성서적 표현이다. 하느님께 대한 봉사,말씀과 성찬에의 봉사,소명에의 봉사,성무 집행에의 봉사,이웃에 대한 봉사 그리고 가난, 순결,순명 등 복음적 덕행들도 다 봉사에 귀결 된다. 봉사의 기능은 사람의 수만큼, 은총이 다양한 만큼 다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양한 봉사 기능은 성령께서 이끄시듯,늘 일치,평화, 화목을 지향·하고 있는 교회가 신비체이기에 각 구성원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듯이 봉사자들의 기능도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떠한 일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구원의 열매는 쉽게 영글것이다.

참된 봉사는 참된 권위를 가져온다. 우리는 이를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확인 하고 있다. 예수의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철저한 봉사에서 연유된다. 그 분의 봉사는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준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완결된다. 참된 봉사는 곧 순교적 봉헌이다. 참된 봉사는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던지는 사랑의 헌신이다. 따라서 참된 봉사만 참된 권위를 보장한다. 교회와 교계의 권위는 바로 이러한 봉사적 헌신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전례의 간소화 등 공의회 이후에 실현된 부분적 변화도 사실 모두 봉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아우구스띠노의 고백과 같이 신자들을 위한 사제, 신자들과 함께 하는 동료, 형제임을 교직자들이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부제의 본래 이름은 봉사자란 뜻이 아닌가. 교황,주교,사제,부제,그들의 본래 이름은 봉사자이다. 교황도 자신을 하느님의 종이라 부르지 않는가. 종이라면 마땅히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의 모든 이웃이 또한 우리가 모셔야 할 주인이다. 이러한 봉사적 결단을 통해 교회는 늘 새로워진다.


III. 실천적 숙고

1. 가치 지향적, 질적 교회가 되어야

한국 교회는 속된 표현으로 현재 호황기를 맞고 있다. 가톨릭이건,개신교이건 또는 비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신자 증가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나름대로의 긍정적 평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적 증가에는 필연적으로 질적 저하가 따르게 마련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이른바 신앙의 관용령에 의해 종교 자유를 얻게 된 교회는 지하의 박해 상황에서 대낮의 교회로,황제의 비호를 받는 제국 교회로 성장했지만,성장의 반비례로 교회가 때 묻고 속화(俗化)된 것이다. 학자들의 견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교회를 오히려 영적으로 퇴조했다는 뜻에서 이른바 쇠퇴 이론 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박해 시대에 고통당했던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적응이 빠른,권력 지향의 상술인(商術人)들이 제국 교회에서는 훨씬 더 큰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250년을 전후하여 싹텄던 은수적 삶과 수도원 유형의 삶이 복음에 충실하려는 신앙인의 의지가 표출되었고,4세기에는 교회가 황금기일 때, 뜻 있는 신앙인들은 이른바 복음 3덕의 삶,가난, 순결,순명이라는 그리스도의 철저한 비움과 봉사,투신의 삶을 자원으로 선택하여 물량적인 무게에 짓눌린 당시 교회에 영적인 풍요로움과 신선한 바람을 제공한 것이다. 수도회는 체계적 교회 쇄신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는 기형적이다. 왜 그리스도인인지, 왜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근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과연 믿음이 신앙인의 전인적 결단의 결과인지 의문스럽다. 신앙은 문화적 삶의 선택과 유사하게 비추어지며 어느 종교 단체의 일원이라는 귀속감에 불과하다. 병든 사회,불의한 현실에서 교회는 치유자이기보다는 같이 병들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가 병들은 그만큼 교회도 나쁜 영향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주의,물량주의, 황금주의,인간 경시 및 권력 지향의 기회주의 등이 그대로 교회를 잠식하고 있다. 그래서 신자는 어쩔 수 없이 타협주의에 빠지고 교회는 일종의 혼합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는 현실이다. 믿음의 가치, 예수를 추종한다는 분명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두운 현실에서 목숨을 걸고서 라도 분명한 선택의 결단을 내리는 신앙인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신자들 중 그 얼마가 쇄신의 긴박성을 감지하고 있는가. 본당 내의 많은 단체들,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성령 운동,부부 모임, 성모회, 사목회 …… 이 단체와 회원들이 철저한 소명 의식에 불타 있는가. 강도당한 이웃을 외면하면서 우리는 로사리오 27일 기도,54일 기도를 바치다가 하루라도 거르면 큰일이나 나는 줄 알고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는 너무나도 미숙한 상태에 머물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관심은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어느 성모상에서 흘러나왔다는 눈물에 더 쏠리고 있지는 않았는지,회개를 다짐하 기보다는 태양이 빙빙 돌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났다는 등 참으로 부차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비성서적 삶의 장본인들은 아니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성전은 하느님의 거룩한 집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인 것은 자명하며 사도 바오로가 이를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성역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인 공직자,관리,장관이란 사람들이 정부의 법 앞에서는 그 어떠한 성역도 없다고 외치고 있으니,도대체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인간은,성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한때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적 무신론자라는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겉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일 뿐,사실상 무신론자와 똑같은 가치와 이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 하고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되묻고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우선으로 하는 가치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가. 우리가 모두 그 몸의 지체들이 아닌가. 따라서 서로의 유기적 관계를 확인하는 형제적 사랑과 관심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의 믿음과 교회는 참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 방식과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생활양식에 물들어 있다. 세례받은 자신,그리스도를 고백한 자신이 이루는 종교적 삶의 양식이 있고, 사회와 직장에서 타협하며 무신론자와 같이, 유물론자와 같이 생활하는 철저한 비그리스도교인의 생활 양 식을 함께 지니고 있다. 여기서 바로 세례 때의 그 결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면서 우리는 비그리스도교적인 비인간적인 가치와 이념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 결단을 통해서만 교회가 쇄신되고 세상이 밝아진다.

2. 거짓 권위를 벗어야

교회론을 할 때 초기 교회에서는 흔히 주교 중심의 교회론과 성체 중심의 교회론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주교(사제)와 성체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결코 분리하여 논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교부들의 사상 변천과 진전 과정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렇게 일단 구분한다.

주교 중심의 교회론이란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 기초를 둔 것으로, '사도 교부 안띠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두드러지게 강조한 내용이다. 당시 박해 상황에서 가현론 등 이단이 함께 교회를 어지럽혔을 때 참 믿음과 진리의 교회에 머물러 있다는 기준과 근거는 바로 사목자였다. 때문에 이냐시오는 순교에 앞서 집필한 7통의 서간 곳곳에서 한결같이 주교의 수직 임무를 상기하면서 주교는 일치의 보증이며 지역 공동체의 핵심임을 역설했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교 군주제라 칭한다. 반면 디다케의 교회론은 성체 중심의 것으로 거기에는 주교와 부제의 선출만 언급되어 있을 뿐 전례와 가르침 등은 모두 예언자 중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디다케는 예비자들을 위한 길잡이이며 새 영세자들의 생활 지침이기도 하다. 즉 빛과 어두움,생명과 죽음의 길 등, 세례받은 신앙인이 택하고 걸어야 할 길과 실천해야 할 규범을 담고 있고 특히 성체 중심의 공동체적 삶이 강조되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저 하게 성체 중심의 교회론을 주창했다. 즉,사제와 주교는 신품성사상 똑같은 신분의 사람들이고 다만 직책상 곧 관할권에 있어서만 구분된다고 가르쳤다. 사실 사제와 주교는 모두 미사성제를 통한 성체를 이루고 있다. 성체가 현존한 그곳,그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가장 유력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으로 높게 평가받아 왔었다. 다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교들의 동료성( Collegialitas episcoporum )이 강조되다 보니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되었던 교황 중심의 교계와 교회론이 시대적 성숙과 요청에 따라 주교들의 동료성과 연대성 안에서 이해되면서 상대적으로 주교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언급된 주교(감독, episcopus)란 직책과 사제(장로,presbyter)란 신분에 대한 내용 규명에 있어서는 계속 성서-신학적 연구와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2세기의 필립비교회 공동체는 주교가 아닌 일단의 사제들에 의하여 사목되었으리라는 추정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오늘의 교구 및 교구장 제도는 현실적으로 부적합할 뿐 아니라 성서적 공동체 실현을 위해서 때로는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깊이 재고해야 할 숙제이다. 지금도 물론 만 75세라는 교구장 은퇴 연한이 정해져 있어 이것도 교구장 주교 종신직보다는 진일보한 분명한 쇄신의 조치이긴 하지만 이제는 과감히 교구장의 임기제를 실천해야 할 때이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교구장 임기제가 제도적으로 실천되기 전에 주교들 스스로 교구장 임기제를 주창하고 일정한 연령이 지나면 용기 있게 사임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교구장 임기제가 가능할 뿐 아니라 아름답다는 모형을 우리는 수도원의 양식과 삶에서 볼 수 있다. 어제 총장이었던,어제 원장이었던 장상이 오늘은 평수도자와 함께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는 그 자체가 웅변이며 겸손의 거울이기도 하다. 오늘의 교구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 교회 내의 쇄신의 선구자인 수도원 삶의 양식이 보완해 주고 지탱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여기서 우리는 1973년에 전주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981년에 사임한 김재덕 주교를 기억할 수 있다. 그의 사임이 자의,타의,정치적 배경 등 여러 관점에서 추정되고 논란된 바 있었지만 어쨌든 사임을 스스로 택한 결단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당시 전후 여러 사정을 종합할 때 김재덕 주교의 사임은 한국의 동료 주교들에 대한 권고적 의미의 교훈이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귀감이라 생각된다.


3.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자전적 소설「죽음의 집의 기록」첫머리에서 사람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로서,모든 불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베리아 유형지의 극한의 고통,죽음 앞에서의 극단적 상황에서 발휘된 초인적 힘을 그는 몸소 체험했고 또한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초인적 체험을 우리는 다른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자녀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불사한 부모들의 헌신적·행위가 바로 이를 말해준다. 사람의 초인적 힘이란 결국 사람 안에 내재한 하느님의 구체적 증거가 아닐까.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 때문에 순교가 가능하고, 완덕에의 오름이 가능한 것이다. 복음의 예수는 우리에게 무한을 요구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하늘에 계신 아버지 깨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완전한 이상 실현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바로 신앙인의 의무인 것이 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상 실현을 재촉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수백 번 주의 기도를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지의 반영이어야 한다.”

기성인들의 특징은 안주(安住)와 포기이다. 흔히 지혜 문학적 염세 사상을 기초로 하여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느니 역사는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느니 하면서 이상에 불탄 젊은이들에게 기성인들은 오히려 걸림돌을 놓기 일쑤다. 이보다 더 큰 불신과 죄가 있을까. 예수는 하느님의 이상 실현 자체였으며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이상 실현의 가능성을 확신했기에 기쁘게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쇄신과 결단이 가능한 것이다. 뜻 있는 신앙인들이 교회 쇄신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숨차게 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교회는 신비체 곧 성장하는 몸이다. 성장하는 과정에는 변화가 있게 마련이고 그래야 성숙할 수 있다. 그리고 성숙을 위하여 거쳐야 할 위기,위험, 모험 등이 있다. 때문에 실수하는 경우도, 쓰디쓴 실패를 맛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상을 향한 끊임없는 발걸음은 필연코 목적을 완수시킨다. 구원, 하느님 나라,이상적 공동체 실현을 위한 신앙인의 노력은 그래서 끝없이 반복되는 쇄신 운동이다. 따라서 교계 제도 또는 제도로서의 교회는 결코 평신도들의 자발적 운동과 자생적 노력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다양성은 교회의 본질적 특성 중의 하나이다. 복음을 보더라도 열두 사도 외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실천했던 사도들과 다른 부류의 추종자들이 있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고 또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을 붙잡아 고발한 유다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가믈리엘이 오히려 인위적으로 사도들에게 제재를 가하기보다는 자연적 결과에 맡기자는 여유 있는 태도를 보 여 주고 있는 사실에서 현실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미래 지향적인 가치관,하느님 나라의 개방성, 예수의 보편 사상이 교회의 특징이어야 하며 교계 제도의 실천 기준이어야 한다.

최근 주교회의에서 몇 차례 언급된 적 있는 공인(公認)되지 않은 단체는 천주교란 말을 쓸 수 없다는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시대 착오적이며 퇴행적이다. 가톨릭이란 결코 법적으로만 제재될 칭호가 아니다. 그것은 법 이전에 세례받은 신앙인이 선택한 공동체이며 만인이 공유할,이름 그대로 보편적인 가치이다.

스스로 천주교에 속함을 선언하는 것은 공적 고백인데 어떻게 신앙 고백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가. 공인(公認)의 기준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이다.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성실한, 거듭거듭 회개 하는 무리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신앙인 개개인의 자유와 특은을 기초로 한 다양성 위에 세워지며 예수를 머리로 하기에 늘 하나인 것이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는 성장하는 몸, 움직이는 몸에서와 같이 동적인 요소를 지닌다. 법 중심의, 권위 중심의 교계 조직에 어느 젊은이가 이러한 물음을 던졌다. “주교님,순교할 때에 주교님의 공인이 필요합니까?”

맺음말

시대의 표징이란 무엇인가? 시대의 상황을,시대를 진단하는 작업이다. 복음의 예수는 시대의 표징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요한 23세는 이 말씀에서 깊은 영감을 받고 교회의 위치와 시선을 분명히 바꾸어 놓았다. 세상,사회,현실을 똑바로 보고 바로 그곳이 교회가 처한 자리임을 역설했다. 한국의 시대 표징은 무엇일까? 각자 나름대로 많은 것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 오늘날,젊은이들은 기성 세대에 도전의 가치를 제시한다. 역사 의식, 민족 의식,현장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참으로 이것이 우리 교회의 과제요 의무이다. 참된 의식은 시대의 표징을 읽게 하며 시대의 표징은 교회 구성원들의 동등성,동료성을 확인해 준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