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공동체관 1998년 11월호 (제 238호)

제47회 토착화 연구 발표회·공동체 개신교의 공동체관

송순재 (감리교 신학대학교 교수 목사)

개신교의 공동체관

주 제:개신교의 공동체관
주제발표:송순재(감리교 신학대학교 교수·목사)
약정토론:이정배(감리교 신학대학교 교수·목사)
박동균(가톨릭 대학교 교수·신부)
사 회:곽승룡(대전교구 금산 천주교회 주임 신부)
일 시:1998년 6월 29일(월) 오후 3`-`6시
장 소: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4층 강당

교회는 근본적으로 특유한 관점에서 공동체적 존재이다. 그렇지만 모든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은`─`그 전형이 초대 교회에서 유일회적으로 나타났듯이`─`선포(kerygma)와 봉사(diakonia) 그리고 교육(didache)이라는 차원과 더불어 친교(koinonia)를 나누는 행위에서 본질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진술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우리 문제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이 공동체는 더 좁게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삶이었지만,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아름답고 경이로운 삶의 방식, 곧 그가 관계하던 사람들이 누구이든 아무런 경계 없이 거침없이 넘나들며 사귀려 했던 관계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현대에 들어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삶과 존재 양식에 대하여는 본훼퍼(D. Bonhoeffer)가 깊은 통찰로 서술한 바가 있다.1)
하지만 교회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공동체적 삶을 충만한 방식으로 체현할 수 없었고, (종교 개혁 이래) 오늘날까지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교회의 역사는 이 공동체적 친교의 삶을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인가를 보여 주었다. 이는 실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불가시적이고 영원한 차원에서만 이상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자리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이 과제는 역사 안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성찰과 반성이 끊임없이 있었고, 그러한 결과 오늘날에는 교회의 공동체적 이해와 실천을 위한 몇 가지 의미 있는 시도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 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과 어떠한 공동체적 관계를 가지는가? 이는 교파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교의 문제로서, 세계 교회 협의회(WCC)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KNCC)는 그러한 노력의 역사적 산물이다.
─ 현대에 들어 교회는 세계에 대하여 좀더 다른 식의 관계 방식을 발전시켜 왔고, 이는 교회의 공동체적 삶을 규정하는 데 불가결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사회적 참여와 실천을 통한 세계와의 친교 문제이다.
─ 각기 다른 출발점을 가진 교파들, 또한 개별 교회들의 공동체적인 삶을 문제 삼으면서 오늘날 두드러지게 된 것은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아울러 타종교와 관계하는 방식이 좀더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문제로 부각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더 개방된 입장이 서서히 발전되고 있는데 비해, 개신 교회들 안에서는 교파에 따라 아주 다르고 경우에 따라 아주 극단적인 대립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 우리는 교회와 교파 그리고 종파와 세계 간에 존재할 수 있는 친교의 방식을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한편 공동체적 삶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지역에 산재한 개신 교회들이 봉착한 문제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다. 각 교회들은 내적으로 어떠한 공동체적 삶을 연습하고 발전시키고 있는가?

1.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성립과 전개 과정에서 본 교회 공동체의 문제

오늘날 전세계에 산재한 무수한 개신 교회의 교파들이 서로 타협하기 어려운 그들 나름대로의 생성과 발전이라는 이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세계 교회 협의회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자체의 발전이 가져온 역기능과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부터이고, 그 역사적 배경으로는 1910년의 세계 선교 대회(WMC)와 1912년의 국제 선교 협의회(IMC)를 들 수 있다. 이들 기구가 탄생한 것은 직접적으로 19세기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데, 곧 이 시기를 통틀어 열렬하게 일어났던 선교 운동들은 세계의 전지역에 걸쳐 거의 그 유래가 없을 정도의 영향력 있는 복음 전파와 교회의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피선교지에서 첨예한 교파주의적 갈등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갈등은 주로 성경 해석이나 신앙 고백, 신학적인 강조점들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극복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를 위하여 각 교파들은 제도나 신학적 정통성의 차이를 넘어서서 연합의 가능성을 찾았던 것이다. 특히 국제 선교 협의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가 조직된 1948년에 이르기까지 연합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서, 또한 신생 교회들을 성장시켜 기존의 서구 교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우리는 다음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의 발전사를 일견함으로써2) 오늘의 문제 상황을 밝히려 한다.
1) 세계 교회 협의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탄생하였는데, 그 배경이 된 것은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회의와 1927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회의이다. 앞의 회의가 교리와 제도를 넘어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가 주제였다면, 두 번째 회의에서는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 그리고 신학적인 일치까지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강조점은 세계 교회 협의회의 첫 번째 회의의 성격을 규정하는 배경이 된다. 초대 헌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들의 사귐”이라고 그 설립 취지를 공표하면서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가입하도록 하였다.
2) 두 번째 회의는 1954년 미국의 에반스톤에서 모였는데 그 두드러진 특징은 종래의 ‘교회 중심의 선교’가 ‘이 세상을 선교의 장으로 하는 하느님의 선교’로 전환하게 된 데 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선교의 방향을 그리스도 중심에서 철저한 삼위일체 중심의 구조로 이행시킨 국제 선교 협의회 회의(1952)라 할 수 있다. 곧 선교의 의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행동에 근거해야 하고 교회는 이를 토대로 이 삼위일체 하느님이 인류 역사 속에서 행하셨고, 행하고 계시는 행동에 민감하게`……`전폭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세계 교회 협의회의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특징을 견지하면서도 교회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일보하였다.
3)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회의는 여러 면에서 새로운 양상을 보여준다. 먼저 이 회의가 기독교인이 소수를 차지하는 인도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그 동안 세계 교회 협의회의 움직임에 강력한 배경이 되었던 국제 선교 협의회가 세계 교회 협의회와 연합하게 되었으며, 동방 정교회와 11개의 아프리카 교회와 2개의 라틴 아메리카 오순절 교회가 가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동방 정교회의 제안에 따라 ‘삼위일체 하느님’이 헌장에 첨가되었다는 점이다. “전교회가 참여하는 선교, 그리고 전세계를 파고드는 교회의 선교”가 이 모임의 주된 성격을 말해 준다. 이전 회의들에서보다 교회의 일치와 사회 참여의 문제가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4) 1968년 웁살라에서 모인 제4차 대회는 사회적, 정치적 국면에서 전세계적인 격동기(케네디 암살, 킹 목사의 암살, 신마르크스주의, 학생 운동, 월남전 같은 일련의 상황)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세계 교회 협의회 산하에 있는 여러 회의와 단체들이 격동기에 처한 사회에 참여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즈음은 “하느님의 선교의 신학”이 절정에 달하였던 때이다. 사회주의의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수용되었고, 선교의 개념은 인간화와 동일시되거나,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는 발전의 개념은 해방의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한국에서는 ‘민중 신학’이 등장하게 된다. 이 회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의 보편성을 시도성, 연속성, 다양성, 일치 또는 인류의 일치라는 맥락에 관련시켜 강조하는 것이다.
5) 1975년 나이로비에서의 제5차 대회는 아프리카에서 열린 첫 번째 대회였다. 따라서 제3세계 문제가 부각된 대회며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새로운 사업 주제가 설정되었다. 웁살라 대회에 이어 여기서도 교회의 사회 참여 문제가 강력한 주제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이형기는 그 성격을 ‘통전적 선교’ 대회로 요약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사회 참여적 주제가 한편에서는 복음주의적 신학자 그룹에게 상당한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나이로비 대회에서 되풀이된다. 이렇게 하여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 개인의 회심과 교회 성장이라는 주제는 사회 정의, 경제적 정의, 정치적 자유, 문화적 갱신, 인권 회복 같은 주제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립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부정적인 상황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생산적인 긴장 관계로도 볼 수 있다. 만일 후자의 의미를 새길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대회에 통전적인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6) 나이로비 대회가 하나의 생산적인 대립 구도를 보여주었다면, 1983년 벤쿠버에서 열린 제6차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는 사회 참여 문제가 여전히 핵심 과제로 다루어졌다. 그런데도 그 어느 때보다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직접적으로 1982년 신앙과 직제가 작성한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문서와 리마 예식서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회에서 BEM 문서는 세계 교회 협의회가 지금까지 이루어내지 못했던 세례, 성만찬, 제도상의 일치 문제에서 거의 모든 회원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동방 정교회는 제외). 이는 ‘신앙과 직제’가 지난 50년 동안 노력한 성과로서, 핵심적인 사안에서 신학적인 일치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교회의 정체성 문제와 사회적 실천의 문제가 동시에 무게를 가지게 되었지만, 이 양자가 한 울타리 안에서 기능하는 문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벤쿠버 대회부터는 실질적으로 고려되지 못했다. 그 결과 일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 교회 협의회에 가입하는 소속 교회가 늘게 되고 그만큼 서로 간의 차이와 다양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는 다시금 신학과 정체성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와중에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제7차 대회가 열렸다.
7) 캔버라 대회에서 분명해진 것은 지금까지 숱하게 노력했지만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 교회에 이르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전 대회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성과를 내었던 리마 문서를 검토하는 가운데 제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교회 일치와 인간 공동체의 쇄신이라는 주제로 연구에 들어갔고, 그 결과 새로운 문제 지평에 도달했는데, 곧 이 위원회에서는 ‘코이노니아’를 교회 일치를 서술하는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192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대교구 총회가 세계 그리스도교 교회들에게 보내는 회람 요서에서 ‘민족들의 코이노니아’(국제 연맹)를 본받아 ‘교회들의 코이노니아’(교회 연맹)를 이룰 것을 제안한 이래 처음 사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1983년도 벤쿠버 대회 때 사용했던 리마 예식서는 약간의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쳐 예배서로 채택되었고,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 예배에서 대부분의 회원 교회가 성만찬식에 참여하였다. 이는 리마 예식서가 오늘날 전세계 교회에서 가지게 된 중요한 위치를 말해 주는 것이다.
캔버라 대회에서 채택한 ‘코이노니아’라는 용어는 지금까지의 용례와는 분명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앞으로의 세계 교회 협의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이 문제는 좀더 자세히 밝힐 필요가 있다.3)
① 무엇보다 ‘다양성’(복수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제7차 세계 교회 협의회 총회에서 작성된 결과 보고문에 따르면 일치(unity)와 다양성(diversity)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새로이 가입한 교회들에게서 좀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것은, 차이점이 ‘코이노니아’에서 어느 한편을 제한하는 요인이 될 수는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서로 보충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지 제한점이 따른다. 곧 다양성이 정당하려면 그것이 상호간의 일치를 위한 뒷받침이 되며, 또한 일치 안에서의 다양성을 증언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또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그런 경우이다.
이렇듯 ‘코이노니아’의 개념에서 나타나는 제한점은 교회간의 친교를 초종파적인 사람들끼리의 교류와 구분 짓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다시금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만일 ‘코이노니아’가 만인을 위한 소망의 상징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세상을 향한 교제라는 것이 과연 타종교인들을 배제한 채 가능한 것인가?” 하는 말이다. 이런 물음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정 짓기 위해 테두리를 치던 작업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코이노니아’가 의미하는 바는 그렇듯 경계선이 있는 한 범주가 아니라, 경계가 없는 중심점,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중심점을 두고 가깝고 멀게 위치한 정도의 차이만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옳고 그름의 차이와는 다른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그러한 중심점을 다르게 접근하는 이들과의 사귐을 뜻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고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귐의 질은 차이가 있다. 타종교인들의 신앙 대상은 삼위일체 하느님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②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또 하나의 장점은 지금까지 평행선을 달렸던 두 가지 입장, 곧 교회의 정체성과 사회적 실천 사이에 존재하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코이노니아’는 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용어 중 그 어느 하나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성과 세계성을 지닌 사랑과 연합의 표현이다. ‘코이노니아’는 사회적, 정치적, 생태적 관심사를 중시한다. 그렇지만 이 세계관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전제할 때 존립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서로 대조적이었던 두 가지 입장은 서로 관련되어 나타나게 된다. ‘은사’(gift)로서의 ‘코이노니아’(신앙과 직제 위원회)와 ‘소명’(calling)으로서의 ‘코이노니아’(삶과 실천 위원회)는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코이노니아’의 개념을 지향한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여기서 말하려는 ‘코이노니아’란 동방 정교회의 용례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용례와는 사뭇 다른 특징을 지닌다. 동방 정교회의 용례에 따르면 그것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강조된 교회들과의 사귐을 뜻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우에는 개별 교회들이 교황과 그 이하의 교권들과 영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연합을 이루는 것(communio hierarchia)을 전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개념은 교회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그 유사한 형태를 찾으려면 아마도 초대 교회부터 전승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코이노니아’의 개념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이 지면에서는 하지 않고 토의에 붙이려 한다.

2. 한국 교회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KNCC)

한국 개신 교회들이 보여주는 교파적 난맥상은 사실 서구 기독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선교하며 생긴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감리교회의 경우, 애초에 미국에서는 분리되어 있던 남 감리교회와 북 감리교회가 한국에서는 한국인의 손으로 하나가 되었다. 한편 오늘날 한국에서 주류를 이루는 개신 교회들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KNCC)를 통해서 연합과 친교를 도모하고 있다. 이 협의회가 사실은 세계 교회 협의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기구라는 점에서 회원 교회들도 세계 교회 협의회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는 가입되어 있으면서도 세계 교회 협의회와는 무관한 교회들도 있다.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개방적이고 사회 실천적인 성격을 띠며 발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회원 교회가 아닌 교회들과도 손을 잡고 공동 사업을 추진하려 한다는 점이다.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가 1924년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Korean National Christian Council)라는 이름으로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 첫 모임을 가짐에서 비롯된다. 그 근본 취지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오이쿠메네’(oijkoumevnh) 정신을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선교와 일치를 하나로 보는 관점에서 곧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를 도모하면서 연합하여 선교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 발전 과정에서 다양한 방향과 발전이 교차되었는데, 타계적인 구원을 강조하는 ‘모이는 교회’의 형태와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현실에 대하여 다양하게 참여하는 ‘흩어지는 교회’의 형태가 공존하였다. 후자의 그러한 시도로서 도시 산업 선교, 빈민 선교, 농민 선교, 인권 운동, 민주화 운동, 그리고 통일 운동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종교간 대화 문제이다. 선교는 일치며 발전일 뿐 아니라 대화하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과 연대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거나 남북 평화 통일을 위한 다양한 운동(북조선 교회와의 두 차례에 걸친 회동, 통일을 위한 인간 띠 잇기 대회 등)을 전개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두드러진 활동은 인간화 운동과 통일 희년 운동이다. 인간화 운동이란 그 동안 복음화에 치중하여 지나쳐 버린 그리스도적 인간 형성 문제에 관심을 갖자는 것이며, 통일 희년 운동은 복음적 자유주의의 시야에서 경건주의적 전통이 강조하는 확신을 유지하면서도 진보적 사회적 개혁과 해방과 통일을 지향하려는 운동을 말한다. 아울러 종교간의 대화와 연대는 이러한 노력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보수에서 진보에 이르기까지 신학과 교리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한국의 개신 교회들이 이렇듯 연합적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아직 미진한 점이 있다면, 이 문제가 다른 신학적 과제와 마찬가지로 교직자와 전문가, 그리고 운동가들 사이에서만 다루어지는 경향이 짙고, 대중의 문제로서는 잘 경험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평신도들끼리의 예배나 성경 공부의 교류 또는 지속적인 공동 사업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또 다른 문제로서 교회에서 참된 의미의 공동체가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한편에서 성서적 선포와 기독교 전승에 충실하게 그 뜻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현실을 해명하기 위해 사회 과학과 교육학적 인식을 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내 집단 의식’의 문제 같은 것인데, 곧 개인은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 안에서 강한 응집력을 가지지만, 이것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 나타날 때는 배타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파주의나 교파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한국 개신교에서 앓고 있는 병 가운데 하나는 같은 교파 안에서도 지역이나 출신 학교의 차이에 따라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달라지는 문제이다.
거대한 교회나 학교는 중앙 집중식 행정 구조를 사용하고 권위주의를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구조 속에서 신도와 학생들은 종종 대중 속에서 익명으로 남아 있게 된다. 개인은 이 거대 구조 속에서 어떻게 다시금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개인이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더 작거나 적정한 규모의 학교와 교회를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Schumacher)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의식과 소공동체에 관한 논의는 이미 현장에서 다양하게 확산되고 또한 실천되고 있다.
대화 능력의 부재는 역시 공동체 형성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4) 독백과 일방적 주장은 종종 권위주의와 결합하여 나타날 수 있는데, 이로써 의사 소통이 저해되고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현장에서 아주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다양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대화의 문화 또는 토론 문화를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공동체는 한 쪽에서 너무 많은 힘을 행사하는 구조가 살아 있을 때 경험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어린이를 다시 발견하고, 여성의 자리를 찾아주고, 약자와 장애인과 함께하는 삶의 시도들이 요청된다. 이제 개신교에서도 자연이 기술 문명으로 자연을 억압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아직은 이론적 차원에 치우쳐 논의될 뿐, 실천적 장에서는 큰 변화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적 변화를 위한 노력은 아직 철저화하지 못했다.

3. 공동체 실천 사례

다음에는 아주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코이노니아’의 개념에 상응할 수 있는 공동체적 실천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예수 가족 모임:전통 문화에 깃들여있는 대동제의 정신을 사귐과 친교를 말하는 복음의 뜻`─`“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루가 8,21)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전거`─ 안에서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김영호 박사(감리교)가 제안하고 여러 지역에서 실천하고 있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진보와 보수, 가톨릭과 개신교 등의 모든 분파를 떠나 사귐과 일치라는 대동의 삶을 실천하려는 것이 목적으로 되어 있다. 김영호는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 남미의 기초 공동체, 중국의 가정 교회, 아프리카의 토착 교회를 들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의 속회나 구역회를 좀더 큰 형태로 만들어 약 10명 정도가 되도록 재조직하여 운영하도록 하는 안을 제시한다.5)
2) 정주 목회:약 3년 전부터 감리교 농촌 선교 훈련원과 몇몇 농촌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운동으로 지금은 전국에 30여 군데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목회자들은(차홍도 목사) 농촌과 농촌 교회가 끊임없이 주변화되어 가고 있는 정황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핵심은 농촌과 농촌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더 이상 이들 지역을 자기 발전을 위한 발판으로 삼거나, 단기간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또한 생활권에서 농촌은 대도시에 종속된 단위로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의미를 얻어야 한다.
이런 관점으로 목회자들은 농촌과 도시 사이에 그물망을 구축하고, 농산물을 직판하는 구조를 발전시키어(예컨대 아현 감리교회에 설치된 농산물 직판소), 농촌의 경제적 자립을 촉진시키려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 스스로 농부가 되어 농민들과 하나의 삶을 이루어간다는 점이다. 각 지역마다 나름대로 특색이 있도록 하여, 이를테면 평창 지역에서는 통나무 주택을 스스로 지어 살도록 하는 기술을 함께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방안이 좀더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확산되도록 하기 위해 대학과 농촌 선교 훈련원이 서로 연계된 교육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생으로 하여금 학창 시절에 하나의 폭넓은 삶의 전망 속에서 농촌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농촌을 사랑하고 평생을 이와 벗하여 살도록 안내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이와 관련된 다양한 영역에 대한 이론 수업을 받으며, 한 주일 정도 현장에 가서 실습하게 된다.
3) 1995년 이래 일어나기 시작한 ‘대안 교육 운동’(서울 평화 교육 센터)은 현재 한계 상황에 다달은 공교육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생산적인 대화와 개혁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 운동에는 다양한 종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론가와 실천가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실천 운동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기에는 개신교 평신도와 학자, 목회자들이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는 1990년대 새로이 조성된 사회 현실에 대한 참여라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 1980년대 반독재 정치 투쟁에서 일어났던 사회 운동이나 전교조 운동들과는 달리, 이 시도는 고도 기술 산업 사회와 거대 자본이 강요하는 기계화된 삶과 소비주의 문화에 대항하는 평화 운동의 맥락에 서서, 대안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교육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다. 행정 구조에서 관료주의를 추방하고, 지역을 소중히 하며, 학부형, 교사, 학생이라는 교육 주체를 새로이 자리 매김하고, 학교에 자유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교육 과정과 수업 방식을 학생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개선하는 등의 개혁을 모색하고 있다. 풀무 농업 기술 학교와 거창 고등학교 등은 이 운동의 성격을 가늠하는 데 좋은 예가 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지역을 기반으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다양한 형식의 모임들이 있고, 정규 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시도되고 있다. 이를테면 무주에서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푸른꿈 학교’는 생태 마을을 기초로 한 생태 학교를 구상하고 있다. 여기서는 학교가 하나의 삶을 위한 공동체로서 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지역과 학교가 하나의 생태학적 공동체로서 성장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학교 개혁에 관한 방안도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학교가 기존의 선교적 관점에서는 일정한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식에 따라 새로이 변한 상황에서 기독교 학교를 공동체적으로 쇄신하기 위한 구상이라 할 수 있다.
4) 아직은 실천 단계까지 이르지 않았지만 그 착수를 앞두고 있는 것으로서 간(間) 종교 교육이 있다. 이는 종파간에 종교 교육적 실천을 교류하려는 것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배움을 얻어 좀더 새로운 지평에서 공동체를 경험하려는 시도이다(감리교 신학 대학교 기독교 교육 연구소). 이런 종류의 시도는 이전에도 간간이 있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여기서는 정규적인 차원에서 좀더 밀도 있게 지속적으로 수행하려는 것이다. 종파 대학 간에 강의와 세미나를 교류하고, 타종교에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실습 과정을 포함하여) 세밀히 연구하며, 일정한 기간 동안 공동 생활을 연습하는 등의 안이 마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개신교 신학 교육은 가톨릭 수도원 공동체의 공동 생활과 노동의 개념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풍부한 자연을 터전으로 하여 실제로 함께 살고, 일을 통해서 삶의 다양성을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책을 읽는 것이 지금까지 신학 수업의 거의 전부였다면, 이제는 기도와 노동을 통한 영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마찬가지로 원불교의 ‘반농반선’의 개념이나 사찰에서의 수행 방식과도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필자는 타교파인들에게 생소한 부분을 소개하는 데 치중하였고, 더 상세한 토의가 필요한 쟁점들은 논의를 전개하는 대신 그대로 남겨두었다. 마지막 실천적 예는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도 있고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논의가 실제적인 교류와 사귐으로 인도되기를 바란다.


1) D. Bonhoeffer, Gemeinsmens Leben, Mu촱chen, 1953 참조.
2) M. Van Eldern, 「세계 교회 협의회 40년사」, 이형기 옮김, 장로회 출판사, 서울, 1993, 225면 이하 참조.
쪱`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본 발표문에도 ‘하나님’으로 되어 있으나, 본지의 성격상 ‘하느님’으로 표기하였다.`?편집자 주
3) 한정애, “코이노니아와 교회사”, 「협성 신학 논단」 창간호(1998. 봄), 협성 대학교, 110-116면 참조.
4) 남재현, “의사 소통 공동체로서의 교회 :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 이해를 위한 하나의 시론”, 「교회와 코이노니아」, 대한 기독교 서회, 서울, 1993, 245-265면 참조.
5) 김영호, “대동 마당을 여는 기독교 교육”, 「교회와 코이노니아」, 291-310면 참조.
약정 토론 1`:이정배(감리교 신학 대학교 교수·목사)

평소 대안 교회 운동 차원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남다른 정력을 쏟고 계시는 송순재 박사님의 글을 읽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안 교육 잡지 「처음처럼」을 편집 주관하면서 의식 있는 교사들과 더불어 교회 운동, 대안 운동, 교육 방법론 개편들에 열심을 다하던 중 천주교 토착화 연구 모임을 통하여 개신 교회의 공동체관에 대한 고견을 듣게 된 것이다. 먼저 송순재 박사님의 논문을 제 나름대로 간략하게 재서술하면서 본 글의 내용을 보충하는 관점에서 논평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1. 송 박사님의 글은 교회 공동체에 대한 고전적인, 그러나 여전히 놓칠 수 없는 개념 정의를 가지고 시작하고 있다.
곧 선포, 봉사 교육 그리고 친교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교회)적 삶이자 존재 양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가시적이며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교회 및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는 구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초대 교회의 공동체 이상을 실현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개신교 안에서 세계 교회 협의회의 조직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곧 세계 교회 협의회는 서로 다른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동방 교회)과의 대화를 비롯하여 개신교 모든 교파들 간의 상호 이해, 그리고 세계의 이데올로기와 복음과의 관계,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밖의 신앙 세계(타종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친교 문제를 핵심 과제로 놓고 하나의 교회 공동체, 인류의 한형제 됨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다.

2. 본 논문 1장에는 1948년 암스테르담 회의부터 7년마다 열렸던 세계 교회 협의회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그 속에서 다루어진 중요 논제들을 요약 정리하며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렸던 제7차 세계 교회 협의회 대회의 최근 결과와 향후 과제가 소개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로서, 그리고 어느 종교 공동체에도 예외가 아닌 바, 세계 교회 협의회는 에반스톤 회의(1954년)에서 ‘하느님 선교’(Missio Dei)라는 새로운 신학적 개념에 합의하였고 그리스도 중심, 교회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자신들의 지평을 확대하였으며 이로써 공동체 개념도 가시적 교회의 범주를 넘어선 세계 속에서 그 자리를 얻어야만 되었다. 이런 발전적 논의 선상에서 서방 그리스도교의 틀 속에는 낯선 동방 정교회 등이 수용될 수 있었고(1961년 뉴델리) 월남전 반대 등의 평화 운동은 물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마르크시즘)의 신학적 수용에도 관대한 입장을 보일 수 있었다(1968년 웁살라).
제5차 나이로비 모임은 모든 자연의 생태학적 위기를 신학과 기독교 윤리의 핵심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최초의 준칙을 말했던 회의로 유명한데, 이는 그리스도 교회가 교회의 성장만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 공조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는 결국 ‘하느님 선교’의 장이 인간 공동체(세계)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느님 선교’를 강조하며 포괄적인 인류 공동체 형성을 위해 힘써 오던 세계 교회 협의회 모임은 1983년 벤쿠버 대회를 통해 방향을 달리하여 교회 내적인 일치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내부적으로 교회 협의회가 교회 밖의 문제에 지나친 정력과 관심을 쏟았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벤쿠버 모임은 교회들간의 내용적 사실적 일치를 도모할 수 있는 리마 예식서, 곧 세례, 성만찬 예식을 공동으로 집행할 수 있는 단일 예식서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외적으로 ‘하느님 선교’의 공헌만큼이나 대내적으로는 교회 일치를 사실적으로 가능하게 해왔던 사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일들은 송 박사님의 글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세계 교회 협의회를 어려움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하느님 선교’로 너무도 다양한 종파, 이념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혼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단일 예식 강요는 개별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역 교회들 안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제7차 대회는 “오소서 성령이여, 전 피조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코이노니아’ 개념을 집중으로 연구 검토하게 된다. 주지하듯 성령은 늘 교회에서 위험시 되는 개념이었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도 성령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였고, 교회 제도에 도전하는 사람들 모두는 성령 열광주의자로 치부되어 왔기 때문이다(몬타니즘). 그러나 캔버라 대회는 성령 은사의 다양성을 들어 상호 차이, 다름, 곧 다양성(복수성)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명료화하였다. 그래서 캔버라 대회는 동방 교회 사제와 아시아 여성 신학자 정현경에게 주제 강연을 의뢰할 정도였다. 또한 하느님 영으로서 성령은 지금껏 성부, 성자를 상호적으로 일치시키는 힘이자 인간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내적인 힘으로만 설명되어 왔는데, 캔버라 대회는 성령을 모든 피조물 속에 거주하며 피조물들의 삶을 지속시켜 주는 하느님의 호흡(생명력)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였다. 곧 성령에게 하느님과 모든 자연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송 박사님께서도 잘 지적하셨듯이 교회 내적 일치를 강조하는 교회 세력과 ‘하느님 선교’에 역점을 두었던 진보 그룹 간의 차이 역시 성령 은사의 결과로서 양자의 공존과 연합만이 참된 의미에서 성령의 역사이며 코이노니아의 실현이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강조와 이에 대한 근거 다양성, 차이, 다름을 긍정하는 코이노니아 개념은 본 회의 말미에 다시금 도전을 받게 된다. 다양성이 정당할 수 있으려면 ‘상호간의 일치’가 전제되어야 하는 바, 다양성의 토대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확고하게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삼위일체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본 회의의 4분과 모임은 “영들을 분별해야 한다. 모든 영들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성령의 불변하는 표준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데 있다.” 라고 확실한 제한 조치를 남겨놓았다.
다가올 1998년 세계 교회 협의회 모임의 주제가 ‘교회와 직제’로 정해진 것은 이러한 제한 조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일부는 이를 가리켜 ‘하느님 선교’를 후퇴시키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보수화 경향이라 지칭하고 있다.

3. 세 번째 항목에서 송 박사님은 한국 내 개신교들이 보여주는 교회 분열상을 서구 기독교 교회들의 선교 형태의 결과에서 비롯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가 조직되어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고무적으로 바라본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시대 요청에 따라 빈민 운동,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 통일 운동 등을 통하여 교회 중심적인 성장 운동과는 다른 방향에서 세속 이데올로기, 타종교인들과 손을 잡고 함께 일해 왔었다. 최근 북한으로 쌀 보내기 운동 역시 6대 종교들의 협력의 소산물이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와 마찬가지로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먼저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 속하지 않는 개신교 내 보수 교파들(예장 합동)을 중심으로 개혁적, 자유주의 시각을 배척하는 집단(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을 만들어 개신교를 완전히 둘로 나누고 있는 현실과 또 다른 하나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내에 그 동안 전혀 이질적 집단으로 존재해 왔던 순복음 교단이 가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으나, 보수·경건주의적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단이 가입하게 됨으로써 대 사회적인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의 기존 목소리가 약화될 수 있는 우려도 있고, 결국 평소 신학과 신앙을 달리하는 교파가 서로의 필요 ─ 재정적 빈곤과 교파의 고립감 극복이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 에 따라 함께 소속되었을 경우 30여 년 간 쌓아왔던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위상이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우려다.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를 통한 교회간의 일치 노력은 돈이나 교파 자체의 필요성이 아니라 초대 기독교의 공동체관, 곧 교회적 소명의 빛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집단이나 인간의 이해 관계가 먼저이고 보면, 그리고 큰 교회일수록 그리고 연합된 교회 기구일수록 의사 소통의 합리성이 결여되고 일방 통행식 명령과 비이성적 정치 논리만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참된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하느님 영의 도움을 구할 뿐이다.
송 박사님께서 본 논문 3장에서 소개하신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구체화된 모습에 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 원하며 향후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점점 확대·증폭될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구체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았으면 한다. 송 박사님의 발제에 대하여,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 드린다.



약정 토론 2`:박동균(가톨릭 대학교 교수·신부)

‘개신교의 공동체관’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해 주신 송순재 목사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다. 현실적으로 접근하기에 매우 까다로운 주제이지만 첫 머리에 네 가지 핵심 주제를 간결하게 설정해 주시고 세계 차원 곧 세계 교회 협의회의 발전 과정과 한국의 현황, 그리고 미래의 과제를 제시하신 것은 참으로 돋보이는 내용이었다.
특히 첫 머리에 제시하신 네 가지 질문은 지상에 있는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주제들이다. 곧 교파간에 존재하는 친교의 문제, 사회 참여와 실천을 통한 세계와의 친교, 타종교와의 관계 방식과 관련된 복음과 교회의 정체성 문제, 마지막으로 미래를 향한 과제로서의 친교, 곧 ‘어떤 공동체적 삶을 연습하고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질문들은 비록 내용과 형식, 방법을 달리하긴 하지만 다른 종교에도 해당되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개신 교회 내의 첨예한 교파주의적 갈등을 극복하고 연합의 가능성을 찾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설립과 전개 과정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각 교회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경험과 지침이 될 것이다. 특히 ‘친교’에 관해 토의하고 연구하는 과정은 종파간의 연대뿐만 아니라 각 교회 안에서도 송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교회의 정체성과 사회적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 개신 교회들의 연합과 친교의 장으로 설립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역시 서구 기독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선교함으로써 생기게 된 교파적 난맥상을 극복하려는 구체적 시도의 결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가 개방적이며 사회 실천적인 성격을 띠고 발전하였으며 송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도시 산업 선교, 농민 선교, 빈민 선교, 인권 운동,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종교간 대화 등’ 이러한 연합적인 사역의 중심에는 언제나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한국 개신교 내의 일치와 화합을 막는 요소를 간결하면서도 솔직하게 지적하였다. 자신의 소속 교회 안에서는 강한 응집력을 발휘하면서도 타교회에는 배타적인 ‘내 집단 의식’과 ‘대화 능력의 부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려는 노력들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서, 인간화 운동, 통일 희년 운동 그리고 어린이를 다시 발견하고, 여성의 자리를 찾아 주고, 약자와 장애인과 함께하는 삶, 기술 문명에 의한 자연의 억압에 대한 대처 등도 앞으로 좋은 결실을 얻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지금까지 연합적인 사역이라는 매우 귀중한 경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친교의 개념에 상응하는 공동체적 실천 사례들로 소개하신 ‘예수 가족 모임, 정주 목회, 대안 교육, 간(間) 종교 교육 등’은 이미 그 희망의 싹을 가지고 있으며 친교의 원리가 구체화된 적극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
우선 ‘코이노니아’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청하셨는데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려 한다.

가톨릭 교회의 친교

짧은 시간과 지면 사정을 고려하여 개략적으로 설명하겠다. 친교의 개념은 교회를 정의하는 필수 요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사로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라고 정의하고 있다. 곧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 친교의 성사이기 때문에 친교의 개념은 교회를 정의하는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치프리아노 교부는 교계적 친교만 강조하는 교회가 아니라 신학적 친교의 모형인 삼위일체의 친교와 함께하는 교회를 강조하였다. 가톨릭 교회를 교계적 친교로만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를 통해 하느님과의 친교에 들어오는 사람은 또한 그 형제들과의 친교에 들어오는 것이다. 하느님은 친교의 원천이며 교회는 그 도구이다. 실제로 교회를 움직이는 성령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친교를 실현시킨다. 하느님의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친교 모형을 따라 그와 같은 방식으로 교회는 친교를 완성한다.

친교의 원리
친교의 원리는 존재론적인 차원(수직적 구조)과 구조적인 차원(수평적 구조)의 두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 말씀과 성사 안에 기초를 두고 있는 존재론적인 영역 곧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communio cum Deo et hominibus),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는 친교에서 출발하여 교회 설립의 구조적인 차원 곧 수평적 구조에서 인간과 인간, 공동체와 공동체, 교회들의 친교(communio ecclesiarum)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친교로써 하느님의 초자연적 질서들이 현세 질서에 수용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곧 신앙을 고백하여 성사와 교계 제도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의무를 실천하면서 친교 본연의 이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① 친교의 존재론적인 차원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론적인 친교에는 말씀과 성사라는 두 가지 기본 요소가 있다. 말씀만도 아니고 성사만도 아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사 위에 세워져 있다. 말씀과 성사가 교회에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사 자체가 교회의 원형인 것이다. 말씀으로 전달된 구원의 신비가 성사 안에서 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곧 성사의 표징으로 육화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말씀과 성사의 동시적이고 상호 연관성을 갖는 질서는 교회 구성원 상호간에 매우 긴밀한 관계를 이끌어내며 지상에서의 복합 현실인 교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사와 말씀의 일치는 친교 원리로서의 교회론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인 동시에 친교 원리의 구조적인 차원을 드러낸다. 곧 항구하고 다양한 성령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연대성을 탄생시키고 발전시키는 이른바 ‘믿는 이들의 친교’(communio fidelium), ‘영성적 친교’(communio spirituale)를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재화시킨다.

② 친교의 구조적 차원
이 땅에 구체화된 친교는 수평적 구조를 띠고 있다. 곧 하느님과의 존재론적 차원에 근거를 두고 인간과 인간, 공동체와 공동체의 친교가 이루어져 사회적 신비체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을 이 땅에 현존시키며 ‘교회들의 친교’를 구체화시킨다. 곧 모든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면서 이웃간, 공동체간, 교회간의 사랑의 친교, 성사의 친교, 믿음의 친교, 생활의 친교로 발전하게 되며 그 안에서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직무의 친교’(communio charismatum et ministeriorum)를 이끌어낸다. 이와 같이 친교는 단순히 친밀감을 나타내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법적 형식이 필요한 ‘구조적 실체’인 것이다. 육화된 말씀의 신비로 유비되는 교회 본성 자체는 단지 영성적이고 볼 수 없는 실재로가 아니라 볼 수 있고 협력하는 실재로서의 친교를 요청한다.
이렇게 볼 수 있고 협력하는 실재인 교회의 친교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와 그와 일치하는 주교들이 통치하는 가톨릭 교회들 사이에 그리고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실현되면서 교회적 친교와 교계적 친교로 구체화된다.

교회적 친교(communio ecclesiastica)는 교계적 친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톨릭 교회 안에 모든 세례자들 사이에서 드러난다. 신앙 고백, 성사, 교회의 통치 등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이루어지며 개별 교회와 보편 교회의 완전한 친교(이를 내재성의 원리라고 한다)와 성찬 거행 그 자체로 드러나게 된다. 이로써 교회적 친교는 ‘충만한 가톨릭 친교’(plenitudo communionis catholica)를 형성한다.

교계적 친교(communio hierarchica)는 친교로서의 교회를 정의하는 데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요소로서 모든 교회 구성원과 관계되는 것이다. 교계적 친교는 개인이나 단체로서 교황의 직무와 주교들의 직무를 정초하는 요소이다. 교황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주교들에게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의 친교와 신앙의 단일성을 보증하는 볼 수 있고 항구한 원초적 근거다. 주교는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보편 교회에 대하여 특별히 하느님 법으로 설정된 확실한 교도권의 행사에서 최상의 완전한 권한을 행사한다. 곧 주교단은 그 머리(교황)와 함께 사도단을 계승하며 친교를 보증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모든 사제단과 함께 형제적 친교(communio fraterna)를 형성하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유기적 조직체 곧 다양한 여러 기능들이 활발히 움직이며 하나의 조직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위계적인 구조로만 질서지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 내에 있는 신자들의 복합적인 질서는 그들 사이에 다양한 위계를 형성하지만 그 위계 질서는 은사들을 거르고 모든 차원에서 교회적 친교의 단일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적 친교와 교계적 친교는 보이지 않는 은총의 요소들로부터, 또는 보이는 구조적인 조직체로부터 구성되며 친교의 복합적인 본질을 표현한다. 이를 통해 교회의 선교 사명이 수행되며 교회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하나하나 실현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질문을 하나 하겠다. 제7차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 이른바 친교 공동체론을 전개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특징을 공동체의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바로 원근의 차이라는 비유로 설명했다. 곧 코이노니아가 의미하는 바는 경계선이 있는 범주가 아니라 범주가 없는 중심점을 향한 원근의 차이로 지적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라는 조직을 구성하는 구조적인 실체는 어떤 것이든 구조가 그 나름대로 있기 마련인데, 바로 그러한 구조적인 실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약정 토론에 대한 답변

먼저 박 신부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원근의 차이’라는 해석은 그 문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합의된 내용을 소개해 드린 것입니다. 이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 것인지, 개념 정리가 잘 된 것인지는 저도 의문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세계 교회 협의회에 가입한 세계의 수많은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고려할 때, 다양성의 가치를 재고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전에 제기되었던 ‘전승은 어떻게 된 것이냐’, ‘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정배 교수님께서 보충해 주셨는데, 성령론적으로는 개방되었으나 그리스도론적으로는 제한되었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타문화권의 전승 속에 나타나는 초월적인 차원이 진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타종교와 타 문화권 안에 나타나는 초월적인 표현들도 같은 범주에서 비교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신앙 고백에 따르면 받아들일 수 없는 진술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명했는데, 이것은 과연 질적인 차이인지, 원근의 차이인지를 박 신부님께 되묻고 싶습니다.


일반 토론

박동균: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의 기본 정신은 타종교와 갈라진 형제들, 타종파,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하느님 모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친교의 문제를 질적 차이가 아니라 원근의 차이라고 새롭게 해석하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땅에 뿌리박고 있는 현실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실체는 갈라진 형제들뿐 아니라 타종교, 나아가 이방인까지 공동체라는 구조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든 구조가 질적인 또는 원근의 비유로 설명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 근거로서 그들이 비록 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더라도, 송 교수님께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 제한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지적하신 바로 그런 부분이 질적인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근의 차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와 원근의 차이를 현명하게 구분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적하신 것처럼 친교의 개념은 일정 부분 질적인 구분으로서가 아니라 원근의 구분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갈라진 형제, 또는 부분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공동체에 한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친교의 개념을 그냥 원근의 차이로만 구분하기에는 제한이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이정배:제가 조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감리교에는 선행적 은총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양심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 밖으로 던져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이중 내정론이라고 해서 개별 구원론과 만인 구원론이 있는데, 만인 구원론은 타종교인들이 이런 입장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타인을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행적 은총이라는 틀에 따라 원근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질적인 차이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더 따뜻한 접근을 위해 그런 표현도 수용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송순재:또 하나의 문제는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의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인데, 그것은 결국 교회가 수천 년 동안 발전시킨 전승입니다. 고전적으로는 삼위일체의 신앙 고백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성서 해석이 다양해지고, 또 새로운 형태의 고고학적 발견이 뒤따르면서 이러한 신앙 고백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 조류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한편으로는 현대에 서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고전과 전승에 우리를 붙들어매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승은 항상 끊임없이 해석되어 왔기에, 오늘의 관점에서 새로이 발전된 성서 해석학이나 고고학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할 때 역시 다른 형태나 양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해석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최근에 제기되고 있습니다. 타문화권에서 다른 언어로 해석하는 그리스도교적 유산과 방식에 대해 울타리를 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다른 형식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회:코이노니아에 대한 다양한 개념을 말씀해 주셨는데, 결국은 다양성과 정체성의 문제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인정하되 정체성이 너무 완고하면 배타성이 될 수 있고, 또 상대방의 정체성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하나의 그리스도교이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동방 교회를 구별해서 보면, 신학적인 원리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은 교계 제도 안에서 교계적인 친교가 강조되는 반면에 개신교는 어떤 틀이 없는 자유로운 친교가 강조되고, 동방 교회는 두 가지가 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조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구조 안에서도 친교가 이루어지고 구조가 없는 부분에서도 친교가 이루어지는 통합적인 의미에서의 친교를 생각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송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자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교회에 대한 것이 있었는데 요즘 우리 나라의 상황에서 기존의 교회들이 구조 조정을 할 가능성은 없겠는가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송순재:개신교는 197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교회의 선교 우선 정책과 당시 군사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도시에 공장, 회사, 교육 기관, 의료 기관이 집중되었고, 모든 생활 조건이 도시 중심으로 갖추어지자 이런 혜택 때문에 농촌에서 중소 도시로, 중소 도시에서 대도시로 빠져나오는 흐름이 갑자기 확장된 것입니다. 이를 기화로 1980년대를 거치면서 작게는 1,2만 명에서 크게는 2,30만 명의 규모를 자랑하는 맘모스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집중한 것은 생계 수단으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지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처방은 초월적인 가치만 강조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교회가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자본과 산업화의 흐름을 따라 교회가 팽창하면서 사회에 환원할 시민 의식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사회적인 차원에서 도시 구조가 해체된다면 자연히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그런 교회에 한계를 느낀 젊은이들이 떠나면 그 교회는 해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런 상황도 아니고, 내적 변화로서 사회 의식을 가지고 문제를 개선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다행히 젊은이들이 작은 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있고, 기존 교회의 청년들이나 신학생들도 대형 교회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농촌 지역을 살 만한 공동체로 바꾸는 것입니다. 농촌에 교육 기관, 의료 시설, 사회 문화 시설 등을 갖추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큰 교회, 큰 공동체 안에서 개인들이 자본과 결탁해서 안주하기보다 그 안에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리교에서는 속회나 구역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큰 단위를 여러 단위로 나누어 속장이나 구역장을 임명하여 돌보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 구조에도 문제가 많이 있는데 실제로 거기서 친교나 사회 참여가 이루어지고, 자율적인 성격을 지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가 커다란 공동체의 종속적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사를 밝히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존 교회를 생동화하려면 자율적인 통찰과 가치 판단이 가능해지도록 교육하고 그런 공동체를 구성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정배:오늘 박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교회에 대한 신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는데, 우리 개신교도 교회를 하느님의 몸으로, 불가시적인 것과 뗄 수 없는 가시적인 공간으로 보지만, 반면에 교회는 늘 비판이 가능하고, 항상 새롭게 쇄신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맥락에서 보면 교회의 신비감을 상당히 강조하셨고, 그에 따라 교회에 대한 귀속감을 강조하셨는데, 귀속감의 본질은 자연이나 우주까지 우리를 이끌어감으로써 소외감에서 극복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소외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송 목사님은 귀속감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송순재:저도 박 신부님께서 가톨릭 교회의 본질을 규명하실 때 교회가 참으로 거룩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역시 가시적인 공동체, 또 인간들의 관계에서 수평적으로 나타나는 친교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관계, 곧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유대감을 기초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개신교가 갖지 못한 영성적인 면을 호소해 오신 것 같아서 도움이 됐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귀속감과 소외의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깊은 신앙 체험이 있는 성인이라면 교회의 성사, 전례, 또는 공동체적 나눔 속에서 귀속감을 깊이 체험할 수 있겠지만,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아직 그러한 체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아주 추상적인 존재로 남아있고, 인격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학적인 면도 고려해야 하지만 사회학적이고 교육학적인 면도 고려해야 하고, 또한 다양한 삶과 체험을 고려하면서 종교 교육도 좀더 대화식으로 발전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언어가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며, 교회의 제도는 너무 권위적이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감명받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신교 차원에서 말씀 드리면 가능한 한 교회 제도의 관료주의적 체제를 허물고 대화적 체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현현 방식이 성서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와 문화 안에 존재하며, 청소년들은 그러한 자연과 사회와 문화 안에서 더 깊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의 종교 교육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에서, 특히 종교와 철학 교육은 자연을 느끼도록 하며,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말하고 받아들이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성우(수원 가톨릭 대학교 교수·신부):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송 목사님은 우리 나라 개신교의 난맥상에 대해서, 또 이 목사님은 분열상에 대해서 평하시면서 그 원인을 서구 교회의 경쟁적 선교에서 찾으셨는데, 혹시 그뿐만 아니라 가톨릭이건 개신교건 그리스도 교회가 계시를 이해하는 방법에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로 구분하여 사적 계시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으로 가능성을 열어놓는데, 개신교는 사적 계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교회의 집권자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작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내적 체험이건 신비 체험 또는 종교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자꾸 분열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분열의 원인이 사적 계시의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개신교의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주제가 일치나 인류의 단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 20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의 의식이 2000년 전에 초대 교회가 형성하였던 그런 공동체의 외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입니다. 계속 분열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다양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일치나 공동체의 다양한 외형적 형태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여야 한다는 것에 꼭 집착해야만 하는가입니다. 이번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일본의 어떤 주교님께서는 동양에서 타종교와 대화를 할 때 다른 성현들을 구세주로 인정해야만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인류 공동체든 우주 공동체든 공동체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보다 인간성과 인간의 생명에 맞추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송순재:우리 나라에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이후 전개된 교파의 분열은 신학이나 민족 감정이나 어떤 선교사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비본질적인 요소의 작용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권력 다툼이나 돈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문제는 개신교 신학에서도 개척 단계이고, 서구 교회에서 형성된 전승을 모든 문화권에 강요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역시 의문입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전승이니까 받아들이라고 강요해 왔습니다. 결국 우리 나라의 선교 초기에는 우리 문화의 기존의 표현 양식들이 거세당했고, 지금도 서구적인 것에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도 이벽, 정약용 등의 선구자들은 오히려 동양의 고전들을 함께 연구했고, 개신교에도 윤성범, 변선환 등 토착화에 선구적인 분들이 계셨습니다. 오늘날 동양의 고전들을 연구할수록 그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려 했던 것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묻게 됩니다. 그래서 노자나 공자 등 예전의 성현들이 그들의 삶 안에서 어떻게 궁극적인 것, 본질을 체험했는지에 대한 물음을 개인적으로 많이 하면서, 그런 것들을 묶을 수 있는 띠가 생명이라면 공동체를 묶을 수 있는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보다 인간성과 인간의 생명에 둘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박일영(가톨릭 대학교 교수):한국의 전통적 종교들의 기질을 볼 때, 개신교의 분위기는 유교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오히려 샤머니즘의 경향을 상당히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성장하는 원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송순재:개신교에 샤머니즘의 영향이 크다고 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개신교가 가톨릭에 비해 엄청나게 성장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조금 전 말씀 드렸듯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이고 또 다른 하나가 부흥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흥회 목사님들은 참석한 사람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모든 시름을 잊고 노래하고 손뼉치며 하느님을 느낍니다. 거기서 목회자는 더 이상 형식으로 있는 사람이 아니고 대중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연극 배우입니다. 이런 부흥 목사님들이 선교 초기부터 있었고, 거기서 기적도 많이 일어나고 회심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이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무속적인 성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유교적이지 않습니다. 카리스마를 가진 목회자가 단 위에서 춤을 추면서 무인같은 성격을 보여주지만 목회자와 평신자 간의 담은 낮춰지고 허물어집니다. 그런 혼연일치 속에서 열정이 분출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기정(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신부):오늘 우리가 공동체, 코이노니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다음에 사도들과 신도들이 함께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이 우리 공동체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회의 모습이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빵을 나누고 형제의 친교를 맺으며 기도에 전념하였다.” 네 가지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인 교육(didache), 기도 그리고 형제적 친교와 빵 나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했던 ‘koinonia’는 형제적 친교입니다. 반면에 빵나눔은 또 다른 관점의 공동체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koi’는 ‘함께’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개념은 구심점으로 향하는 운동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여야 합니다. 안 쪽으로 모이는 모습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서로 교류가 있고, 친교가 있을 때 코이노니아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빵 나눔은 원심적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 때 빵을 나눈다는 것은 성찬을 가리키기도 하고, 예찬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빵을 가지고 와서 서로 나누고, 그 빵을 공동체 밖으로 들고 나가서 고아, 과부,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 나누어 주는 것이 ‘dia’이고, 이 ‘dia’는 확산입니다. ‘diaconia’를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우리가 친교를 이야기하면서 코이노니아만 강조하고 디아코니아는 강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구조적 문제든 원근의 문제든 저는 강조점의 차이라고 봅니다.
송순재:나 신부님께서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비교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실천과도 관련된 것인데, 이정배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실학화라고 할 수 있고 저도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실패를 했다면 실학화를 못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실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도 사회 참여를 많이 강조하고 있지만,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은 대부분 전문가들, 학자들, 목회자들이었지 일반 대중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실천은 대중화가 되어야 하고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연결 고리가 아주 취약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 일을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것입니다.
홍희숙(본지 편집부원):이정배 목사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개신교가 보수파와 진보파로 다시 나뉘었다고 하셨는데, 나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까 송 목사님께서는 비근원적인 요소가 직접적 원인이라고 하셨는데 교의적이거나 성서적인 원인은 없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기구는 없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정배: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와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간의 신학적 차이는 두 집단을 하나로 일치시키기에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말씀 드린 대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지금껏 ‘하느님 선교’를 기존 노선으로 하여왔습니다. ‘하느님 선교’란 ‘하느님`쭭`세계`쭭`교회’의 입장을 지닌 것으로, 이전의 ‘하느님`쭭`교회`쭭`세계’의 입장과는 다른 선교 신학입니다. 곧 하느님은 세계를 통하여 말씀하시기에 교회는 세계로부터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속화한 시대에서 교회는 세계의 흐름에 민감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미세한 소리에 응답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선교는 세속적 이데올로기,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하여 타종교들과 적극적으로 사귐으로써 배움을 얻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는 여전히 교회 중심으로 생각하며 교회만이 하느님의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입장은 전통적 신학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으로 교회 성장주의를 최상의 의제로 생각하는 흐름과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신학과 교회 성장주의를 기저로 하는 보수 신학 사이의 갈등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 속해 있는 8개 교단들도 내부적으로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의 신학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부 신학자, 교회 정치가,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관계자들만이 세계 교회 협의회와 관계를 맺고 하느님 선교를 표방하지만 개별 교회들은 이에 대해 동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 협의회나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가 교회적 현실을 많이 반영하려고 노력하지만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의 신학적 노선과 많이 다르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 구원이냐, 사회 구원이냐, 만인 구원설이냐, 예정론이냐 하는 교리적 문제를 비롯하여 사회를 보는 시각이 많이 다릅니다.
이런 교리의 차이는 신학의 본질적 문제에서 발생합니다. 본래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하강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육화의 의미를 자연 전체에까지 확대해 가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초기 그리스도교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말하듯 현상 세계를 과소 평가하고 상승한 자리, 곧 천국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로부터 현실 세계를 떠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할 수 없다고 보는 세계 교회 협의회 계통의 진보 자유주의적 신학과 이 세계를 인간이 잠시 머물다 가는 이질적 공간으로 보고 상승된 공간으로서 천국을 본향으로 보는 보수 전통주의의 사조 간에 근복적 차이가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양자간에 누가 틀리고 맞다라는 흑백 논리의 싸움이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오늘 한국 교회는 그리스화된 기독교의 영향 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신학적인 문제 외에도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와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의 일치를 어렵게 만드는 사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치 운동에 대한 주도권 문제, 연합기관 내 각 교파의 처분 문제, 부활절 행사 때 집전권 문제, 또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 성서 번역에서 용어 선정 문제, 찬송가 가사 수정 등에 대한 입장 차이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인간이 원하는 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합니다. 때로는 이런 차이를 ‘하나’ 되게 만들겠다는 노력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일치의 문제는 성령의 몫이라고 믿습니다.
사회:오늘 ‘개신교의 공동체관’을 들으면서 친교에 대한 우리의 갈라진 형제에 대해 더 많이 이해를 하게 되었고, 한편 문제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는 희망적이라고 믿습니다. 오랜 시간 같이 하신 여러분께 감사 드리면서 제47회 토착화 연구 발표회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