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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교회의 성화 임무
1999년 3월호 (제 242호)
제 7 장 혼인성사7. 조사 결과의 통보제1070조:혼인을 주례할 본당 사목구 주임 이 외의 다른 이가 조사...

주일의 말씀
1999년 3월호 (제 242호)
예수 부활 대축일/부활 제2주일/부활 제3주일/부활 제4주일4월 4일:예수 부활 대축일친애하는 형제 자매 ...

한국 천주교 사회 복지사
1999년 3월호 (제 242호)
1. 서론1)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교회는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이다. ...

시편 4편을 중심으로
1999년 3월호 (제 242호)
2. 본문의 문학적 이해1) 유형시편을 해석하기 위하여 그 시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

사회 생활과 회개
1999년 3월호 (제 242호)
이번 달에는 회개를 사회 생활과 관계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다. 서로 의지하며...

창조 신앙과 자연 이해
1999년 3월호 (제 242호)
생태학과 신학적 연관성이 가장 잘 연결되는 주제가 창조론이다. 왜냐하면 이 두 주제는 공통적으로 땅과...

교회의 혼인 교육을 위한 서론
1999년 3월호 (제 242호)
오늘날 ‘혼인’이란 그리 명확한 것이 아니다. 화려한 시장의 논리와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른 가치관의 ...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1999년 3월호 (제 242호)
사목자료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http://www.stpaulchong.org) 노희성(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행정실 ...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
1999년 3월호 (제 242호)
사목자료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 토마스 M. 킹(예수회) 칼 바르트와 토마스 머튼의 공통점 1968년 ...

서울의 성지와 사적지
1999년 3월호 (제 242호)
성지1)나 사적지 순례는 전통을 되찾는 일, 곧 ‘고유한 전통의 회복’ 또는 ‘우리 것의 자리 매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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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호 (제 242호)

서울의 성지와 사적지

차기진



성지1)나 사적지 순례는 전통을 되찾는 일, 곧 ‘고유한 전통의 회복’ 또는 ‘우리 것의 자리 매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앙 선조들이 자발적으로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던 영성(spirituality)의 전통을 잇는 것이며, 서적이나 누구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례하는 가운데 복음의 위대함과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닫는 길이다.
이처럼 순례를 통해 자발적으로 순교 선조들을 현양하면서 그 신심을 이어받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별로 성지와 사적지를 순례할 수 있도록 엮어 보았다. 앞으로 본 지면을 통해서, 첫째 서울의 성지와 사적지, 둘째 경기도 일대의 성지와 사적지, 셋째 충청도 북부의 성지와 사적지, 넷째 충청도 남부의 성지와 사적지, 다섯째 전라도 일대의 성지와 사적지, 여섯째 경상도 일대의 성지와 사적지, 일곱째 남은 지역의 성지와 사적지, 여덟째 성지 순례와 순교자 현양의 의미들이 소개할 예정이다.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 대성당

100년 전인 1898년 5월 29일. 서울 남부 명례방(지금의 명동)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사적 제258호)이 축성된 날이다. 당시 대성당의 건립은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뾰족집’의 상징인 종탑은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민주화의 요람이요 억압받는 민중들이 해탈을 염원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바로 이곳의 복음사는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 1784년 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 해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곧 명례방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성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명례방 마을에는 당시 김범우(토마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벽의 집이 비좁아 집회 장소로 적당하지 않자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1784년 늦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봄까지 유지되었으나, 형조의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됨으로써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을사년(1785)의 사건으로, 갓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가 얻은 최초의 시련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이렇게 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이어 김범우는 유배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로 인한 상처가 덧나 배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4-25).
김범우의 죽음은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얻게 될 수많은 혈세(血洗) 곧 ‘피의 세례’를 예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가장 아래에 있는 주춧돌은 바로 김범우와 같은 초기 희생자들이었다.
을사년 사건 이후 명례방 공동체의 역사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기록에서도 명례방이란 이름 석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그것을 영원한 역사의 단절로 남겨 두지 않았으니, 박해가 끝나 갈 무렵인 1882년부터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다시 터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를 책임지고 입국한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 주교는 명례방 언덕에 대성당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1882년부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그 중 한 한옥에 종현 학당(鐘峴學堂)을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모아 기초 학문을 가르쳤다.
블랑 주교는 이 때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부지를 매입하였다. 조선 정부의 방해, 일본인과 개신교인들의 질투도 이를 막지는 못하였다. 1887년 겨울에 부지 정지 작업이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차츰 신앙의 자유를 찾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어 1892년 5월 8일에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 주교는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맞이하였고, 1898년 5월에 마침내 한국 교회는 40m가 넘는 종탑을 갖춘 길이 65m의 고딕식 건물을 갖게 되었다.
1900년 9월 5일에는, 1899년에 왜고개(瓦峴, 현 용산 군종 교구청 인근)에서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성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와, 1882년에 남포 서들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성 다블뤼(Daveluy, 安) 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유해를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어 1901년 11월 2일에는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 소재)에서 용산 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던 성 앵베르(Imbert, 范) 주교 등 3명의 유해를 지하 묘지로 옮겼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을 왜고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들 중 훗날 복자·성인품에 오른 이들의 유해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성당 지하 묘지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성스러운 곳이다. 또 지금까지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순교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의 유해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새남터·당고개와 용산의 사적지

사실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국의 순교 성지나 사적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 곳만을 따로 떼어 내 설명하기란 어렵다. 서울의 경우만 해도 순교 터인 새남터, 당고개, 서소문, 절두산, 그리고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노고산, 삼성산, 왜고개, 용산 신학교, 명동 대성당 등이 순교자들의 유해 이장과 관련하여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지금의 용산 일대는 새남터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성지와 사적지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새남터의 저녁 풍경. 조선 후기까지 수목이 울창했던 이곳은 ‘용산 8경’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박해 선풍이 일게 되면서 용산 일대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고,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는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요람지인 신학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함벽정(涵碧亭, 현 원효로 성심여고 위치) 터에 마련된 예수 성심 신학교와 예수 성심 성당(일명 원효로 성당)은 현재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186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교구장 블랑 주교는 용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한 뒤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소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중 신학교 건물은 1892년에 벽돌조 2층으로 건립되었고,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되었다. 또 1890년에는 용산의 삼호정(三湖亭) 언덕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그 인근에 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됨으로써 사적지로서의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삼호정 공소는 1942년 1월 용산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까지 그 복음의 끈이 이어져 오고 있다.
새남터 형장의 본래 위치는 서부 이촌동 아파트 인근으로, 한자로는 사남기(沙南基) 또는 노량사장(鷺梁沙場)으로 표기되어 왔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미 1890년부터 이곳의 순교 터를 매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부선 공사로 인해 실패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래의 순교 터보다 북쪽으로 500보 남짓 되는 곳(현 용산구 이촌2동)에 현양비를 세울 수 있었다. 현재 한식의 새남터 성당이 들어서 있는 곳이 바로 이 자리다. 이 새남터의 북쪽 공터는 일찍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어 왔고, 조선 후기까지 숲이 울창하였다. 따라서 군문 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는 중죄인인 경우에는 서소문 밖 대신 이곳을 형장으로 사용하였다. 1468년 모반죄로 처형된 남이(南怡) 장군의 형 집행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새남터가 천주교 순교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군문 효수형을 당한 때부터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맞이해 들인 최초의 성직자 주문모 신부. 그러므로 그의 최후를 지켜본 신자들은 훗날 그의 성덕을 기리면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사형 집행을 준비하는 동안 맑고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이 덮이고, 형장 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 소리, 억수같이 퍼붓는 흙비, 캄캄한 하늘을 갈라 놓는 번개, 이 모든 것이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가슴을 놀라고 서늘하게 하였다. 이윽고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라 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황사영의 ‘백서’, 81행; 신미년(1811년)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가 함께 어울어진 형장의 모습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재현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Maubant, 羅)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한 것이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와 마찬가지로 군문 효수를 당해 그 머리가 장대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 시신은 3일 동안 백사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러나 20일 후 용감한 신자들의 노력으로 시신이 수습되어 노고산(老姑山, 마포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런 뒤에도 새남터의 북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1846년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해 성 현석문(가롤로)이 다시 망나니의 칼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모두 6명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우세영(알렉시오), 정의배(마르코) 성인 등이 이곳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 중에서 정의배의 시신은 가족들이 수습하였고, 나머지 시신은 신자들이 거두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한편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12월 27일(음력)과 28일에는 당고개(堂峴, 원효로 2가의 문배산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망나니들의 칼날이 10명의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본래 이곳은 형지가 아니었지만, 상인들이 닥쳐 올 설날 대목장이 방해받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주도록 요청한 때문이었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마리아)를 제외한 9명은 훗날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였고, 이제 당고개는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근래에 도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이 성지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의 의미를 깨우쳐 줄 수 있을 것인가?
순교 성지 새남터와 당고개는 이렇게 창조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북소리가 이곳을 찾아 순례하는 신앙인들의 마음 안에서 울리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곳에서 처음 순교한 주문모 신부가 초기의 순교자들과 함께 훗날의 시복 시성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 후손들의 순례가 계속되고 그분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한 시성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최대의 순교 성지 서소문 밖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창업 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서경」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지금의 사직 공원에 위치)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 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에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252호)이 완공되었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 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하여 품 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밖은 분명 한국 교회 최대의 순교 성지였다. 103위 성인 중 44명이 이곳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교회 측에서는 시성식이 이루어지던 1984년에 순교 기념탑을 서소문 공원 안에 건립하였으나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훼손된 상태이다.
역사는 우연일 수 없다. 우리의 복음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말하곤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체포, 투옥,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형벌, 서소문 밖에서의 죽음. 이들은 모두 복음의 고리를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섭리요 한국 순교사의 맥(脈)이다. 따라서 형리들이 채찍질하는 수레의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수많은 순교자들이 ‘착하게 살고 영생의 복락을 얻기 위해 올바른 길을 걷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삶을 살아 왔다면, 순교 성지 서소문 밖 형장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결코 초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잠두봉과 절두산 사적지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곳은 양화나루(楊花津) 윗쪽의 ‘잠두봉’이다. 그 이름은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용두봉(龍頭峰) 또는 들머리[加乙頭]라고도 불리었다. 이곳 양화나루는 용산 쪽 노들 나루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풍경이 밤섬을 돌아 누에 머리처럼 우뚝 솟은 이곳 절벽에 와 닿고, 이어 삼개 곧 마포 나루를 향해 내려가던 곳으로, ‘버드나무가 꽃처럼 아름답게 늘어진 곳’이었다. 특히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에 대한 시는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많은 문인과 명사들이 이러한 시를 남겼다. 이곳 잠두봉 명승지와 양화나루는 1997년 11월 11일에 사적지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아름답던 이곳이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병인박해 때문이었다. 그 해 벽두부터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 흥선 대원군은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 직후 이곳 총융진(總戎陣)에 형장을 설치하고 신자들을 체포해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1866년 9월 26일(음력 8월 18일)에 로즈(Roze)가 이끄는 세 척의 프랑스 함대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나루와 서강(西江)까지 올라갔다가 중국 체푸로 돌아갔으며, 10월에는 다시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갑곶진(甲串津)을 거쳐 강화읍을 점령하였다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에게 패하여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두 차례의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대원군은 전국에 명하여 천주교도들을 남김 없이 색출해 내도록 하였으며,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천주교 신자는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영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나루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에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프란치스코)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 10월 25일에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요한) 등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효수형뿐만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몽둥이로 쳐죽이는 장살로, 얼굴에 한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 등으로 계속하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 안의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피는 잠두봉 바위를 물들이면서 한강에 흩뿌려졌다고 한다.

“어떤 순교자는 죽은 뒤에도 얼굴 색이 변하지 않았고, 어느 순교자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으며, 또 어떤 순교자가 죽은 뒤에는 한강에서부터 무지개가 떴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신자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를 목격한 외교인은 무서운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씨는 복음의 터전이 되었고, 복음에 대한 믿음은 다시 순교자를 탄생시킨 것이다.”(한국의 여러 ‘순교사기’)

이 때부터 이곳은 양화나루나 잠두봉 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불려진 이름이 절두산(切頭山).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 탓에 애닯은 의미가 더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행렬은 이후로도 3?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절두산은 이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사 100년을 대변해 주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교회측에서는 순교자 현양 운동의 일환으로 1956년 5월 20일에 이 일대를 매입하였고, 6년 뒤에는 순교자 기념탑과 노천 제대를, 1967년에는 순교 기념 성당과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명동 대성당 등 여러 곳에 안장되어 있는 순교 복자들의 유해를 옮겨다 안치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절두산이란 이름은 그렇게 순교자들의 혼과 넋을 담은 곳으로 우리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또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순교자 현양 대회도 자주 열리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공경하올 순교자들의 유해, 한국 성인들이 남긴 유품과 유물 등은 복음의 가르침과 함께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우리 신앙 후손들이나 그 자손들 또한 이를 통해 내면의 양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100여 년 전에 이곳에서 일상의 영욕을 버린 채 천국이라는 영원한 본향(本鄕)을 찾아간 그들의 신앙을 되새겨 보아야만 한다.

쪱``이번 호부터 한국 교회의 사적지를 지역별로 묶어 8회에 걸쳐 격월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1) 한국의 성지들은 엄밀히 말해 ‘사적지’(史蹟地)라고 해야 옳다. 본래의 ‘성지’란 팔레스티나(Palestina)를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이므로, 우리가 말하는 성지는 순교지·사적지·교우촌 등으로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에 103위 성인을 얻게 되면서 이들의 탄생지나 순교 터, 유해 안치소 등을 ‘순교 성지’라는 개념으로 이해해 왔고, 더 나아가서는 일반 교회 사적지들에도 성지라는 명칭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